뭐가 그리 바쁘세요? 순서를 지킵시다!
오늘도 “빨리빨리. 급하다 급해!” 혼잣말을 한다. 그런데 뭐가 그렇게 바쁜지 정확한 실체가 없다. 설거지 천천히 하면 누가 잡아가나? 청소기 천천히 밀면 법에 저촉되나? 백수에다가, 특별히 할 일도 없이 놀면서, 왜 뭔가를 할 때마다 속으로 저런 말을 되뇌는지 이해가 안 된다. 오늘 못하면 내일 해도 되고, 약속이나 다른 일정이 있어서 집안일을 일찍 끝내야 하는 것도 아니면서, 일단 무슨 일이든 빨리 끝내놓고 보려고 한다. 이런 실체 없는 조급증은 나뿐만 아니라 한국사람의 종족특성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오래간만에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내린 아메리카노가 먹고 싶어서 근처 카페를 찾았다. 요즘은 거의 키오스크로 주문을 받아서, 대부분의 카페는 근무자가 한 명이다. 3,200원짜리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결재하고, 번호표를 뽑자 마자 "Pick-Up" 푯말 아래로 직진한다. 아르바이트생은 설거지 중이다. 그 모습을 보고 ‘앗! 또 뭐가 그리 급해...’라고 번뜩 깨닫고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주문내역을 확인하면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잔 뽑는 거야 10초도 안 걸리니까 느긋하게 앉아서 기다리기로 한다. 그런데 아르바이트생이 확인할 생각을 안 한다. 계속 설거지에만 집중하고 있다. 속으로 조바심이 조금 났지만 다시 느긋함을 찾기 위해 애써 스마트폰을 바라본다. 하지만 아르바이트생의 움직임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다. 내 아메리카노는 언제 제조가 시작되는지 무신경한 척 선글라스 너머로 눈을 굴린다. 한 5분 기다렸나, 요란한 헤어스타일의 아저씨 한 명이 키오스크 앞에서 주문을 한다. 이 사람도 결재를 끝내고 바로 “Pick-Up" 푯말로 직진한다. 아저씨가 푯말 아래에서 진을 치고 있으니까 이를 발견한 아르바이트 생이 주문이 조금 밀려서 5분 정도 기다려야 한다고 안내한다. ’우씨, 나한테는 그런 설명도 안 해줬는데...‘ 혼자서 기분 상해 상황파악을 해본다. 배달주문 음료를 만들고 있던 아르바이트 생은 뭔가 기계가 작동하는 사이에 설거지를 하고 있었고, 매장에 사람은 적었지만 배달 주문이 많이 밀려있었던 상황이다. 설명을 들은 아저씨는 알았다며 잠시 후에 오겠다고 밖으로 나갔고, 상황파악이 끝난 나는 ’에이 똥 밟았네...‘라고 생각하며 ’다시는 여기 안 온다.‘라고 다짐한다.
저런 다짐을 하게 된 조바심의 실체는 없다. 그런데 만약 아르바이트생이 융통성을 발휘해서 설거지를 중단하고 잠깐이면 완성되는 내 아메리카노 한 잔을 먼저 뽑아줬으면, 나는 아마도 으뜸 아르바이트생이라며 칭찬 별점 5개를 눌렀을지도 모른다. 병원에서는 더 하다. 나보다 늦게 온 사람이 먼저 진료실을 들어가지 않을까 전전긍긍 주변을 살피고, 혹시나 간호사가 실수로 나를 먼저 호명하면 모르는 척하고 그냥 진료실로 들어간다. 실수는 간호사가 했으니 뒤수습은 알아서 하겠지라고 생각하며... 은행에 예약제가 생기며 이 제도를 모르는 어르신들이 한동안 늦게 온 사람 업무를 먼저 처리해 줬다고 은행원들과 실랑이하는 모습을 많이 봤다. 거기에 요즘은 VIP라운지까지 생기며 순서를 기다리지 않고 은행업무를 보는 사람들은 어깨 힘을 빡 주고 다닌다.
한국 사람들은 순서를 앞당겨주는 대접을 최고의 대접으로 친다. 그리고 순서를 무시할 수 있는 특권을 최고의 특권으로 여긴다. 그래서 각 집마다 의사나 간호사를 꼭 한 명은 배출해야 성공한 집안으로 여겨진다. 원인은 누군가의 배려 혹은 실수일 수도 있고, 특혜일 수도 있다. 다른 사람들이 모를 것 같지만 다 알고 있다. 표현을 안 할 뿐이지… 간혹 불같은 성미를 가진 사람은 크게 항의한다. 그러면 그 사람 한정으로 순서는 재조정된다. 그런데 무엇이 그렇게 바쁜 걸까? 할 일을 빨리 마치고 나면 그 뒤는 자유시간이니까? 그러면 자유시간이 조금 더 주어지면 뭘 할까? 백수인 나와 진배없이 특별히 할 일은 없을 것 같은데… 그저 할 일을 빨리 끝마쳤다는 성취감, 안도감 정도? 하지만 그렇게 순서를 지키지 않는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 마음속에는 질서 따위는 개나 줘버리라는 어둠이 점점 커진다. 요즘 계속 일어나는, 아니 오히려 증가한 것 같은 우회전 사고는 이런 마음과 다르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