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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는 뭐라고 생각하세요?

잡을 수 없고 높은 곳을 향하는…

by 철없는박영감

학원 MT를 다녀오고 나서 어딘가 알 수 없는 붕 뜬 어수선함이 느껴졌다. 처음에는 ‘이사를 막 해서 그런가? 하나씩 차츰 자리를 잡아가면 곧 가라앉겠지’라고 생각했는데, 변화를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연기처럼 슉 사라져 버린 상태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 원장님이 바뀌면서 그랬던 것 같다. 사무 업무를 보던 아르바이트생이 바뀌는가 싶더니, PD 님들이 안 보이기 시작했다. 선생님들도 한분, 두 분 바뀌더니 나중에 보니 대폭 물갈이가 되어 있었다. 우리 주말 심화반도 녹음수업선생님이 새로 오셨다.


녹음실 첫 만남, 차가운 표정에, 인사를 해도 고개만 까닥할 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요즘 말로 하면 ‘냉미녀’ 같은 도도한 표정으로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전 시간 연기 수업을 마치고 왁자지껄 떠들며 녹음실로 이동하던 반친구들은 알 수 없는 아우라에 기가 눌려 갑자기 입을 다물고, 조용히 까치발로 입장했다. ‘우리가 뭐 잘못했나?’ 싶어서 서로 눈치만 보며 분위기 파악 중이었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반 전원이 착석하자 선생님이 입을 열었다. 간단한 자기소개를 하고, 으레 그래왔듯이 공부한 지 몇 년 됐으며, 지원 동기가 뭐고, 그동안 수업은 어떻게 진행했는지 물어볼 줄 알았는데... 만나서 반갑다는 인사 후 바로 대본을 나눠주고 ‘하고 싶은 연기로 준비하세요’라고 툭 던졌다. 반친구들 사이에 더 정적이고 은밀하게 강력한 눈빛들이 오갔다. 잠시 서로 반사하며 길을 잃었던 눈빛들이 반장인 나에게로 쏠렸다. 어쩔 수 없이, 용기를 내어...

“저... 선생님... 녹음 수업은 한 명씩 부스에 들어가서 마이크로 녹음하고, 끝나면 녹음파일 들으면서 피드백해 주시는 순서로 진행되.... 는... 데.... 그게... 그러니까.... “ 이 무슨 쌀로 밥 짓는다는 소리인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녹음은 다 완성되면 마지막에 할게요. 준비하세요.” 그동안 첫 수업에 선생님들이 존댓말 하는 것은 예의상 그렇다고 생각해 왔는데, 이 분의 존댓말은 왠지 거리감이 느껴지고 한기까지 느껴졌다.

“아... 네... 알겠습니다...”

“이 반 반장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안녕하세요. 헤헤...” 젠장 ‘헤헤‘는 무슨 ’헤헤’. 찐 썩소가 나와버렸다.

“그럼 첫 번째로 해볼게요. 준비하세요” 젠장 진짜 망했다. 어쩔 수 없이 친구들에게 미안하다는 합장표시를 하고 숨 막히는 침묵 속에서 대본 분석을 시작했다.


대본은 막 소리를 질러야 하거나, 폭풍 오열을 해야 하거나, 열혈 캐릭터로 에너지를 내뿜어야 하거나, 차가운 냉혈한이 되어 극한의 차분함을 연기해야 하는 대사는 아니었다. 그냥 소소한 생활대사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그거 아는가? 이런 소소한 생활대사가 진짜 어렵다. 그동안 캐릭터 연기만 해왔는데... 이런 생활대사는 어떻게 해도 연기력을 보여주기에는 심심하고 따분했다. 그래도 서브텍스트라는 비장의 무기를 장착했으니 최대한 상황을 설정하고 캐릭터를 잡아서 그럴싸하게 장면을 연출했다. 준비시간 10분이 10초처럼 지나가고 드디어 첫 타석에 올라섰다.

“아....”

“일어나서.....!!!” 입을 떼자마자 선생님이 갑자기 버럭 화를 낸다. 그것도 반말로....

‘어! 뭐지? 내가 방금 뭘 들은 거지?’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고 있는데...

“연기의 기본이 안되어있네. 앉아서 무슨 연기를 한다는 거야?” 당최 혼잣말인지 혼내는 건지 애매모호하게... 반말인 듯 아닌 듯 아리송하게 꾸짖기 시작했다.

“아... 네 죄송합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그래요 서서 다시 해보세요.” 다시 냉미녀 포스를 풀풀 풍기며 차분해졌다.

“아니,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는 거예요?”

“다시...” 한기서린 차가운 목소리로 연기를 끊고 말했다.

“네?”

“다시 하시라고요. “

“아 넵! 흠흠... 이건 내 잘못이... “

“처음부터 다시! 끊은 데서 하는 게 아니고 처음부터 다시 해야지!”

전에도 한번 언급한 드라마인데... ‘베토벤바이러스’는 꼭 보시길 바란다. 오케스트라 첫 연습날 첼리스트 정희연 씨는 강건우 마에스트로에게 이런 식으로 ‘똥덩어리’라는 피드백을 받는다. 약 5분 정도 탈탈 털리고 식은땀을 한 바가지 흘렸다. 결국 대사는 한 줄도 다 못하고 똥덩어리가 되고 나서야 끝났다. 녹음실 안은 그야말로 공포분위기였다. 다음 순서 친구들도 마찬가지로 잘근잘근 씹혔고, 입도 못 떼 본 친구도 생겼다.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가고, 잠시 쉬는 시간이 되어 선생님이 물을 뜨러 밖으로 나갔다. 반친구 모두는 한숨을 쉬며 그야말로 풍선에 바람 빠지듯이 축 쳐졌다. 다들 패잔병 같이 넋 나간 표정으로 진이 빠져버렸다.


잠시 후, 선생님 인기척에 자세를 고쳐 잡은 우리는 다시 열공모드로 대본을 씹어 먹을 듯 노려보는 척했다. 녹음실 안이 열기로 후끈 달아올라 있었는지 자리에 앉은 선생님은 문을 열라고 하고, 잠깐 스트레칭을 시켰다. 환기가 되자 우리도 긴장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리고 선생님이 말씀했다.

“여러분, 연기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대사 틀리지 않고 기계처럼 다다다다 읽는 게 연기 같으세요? 지문에 소리치며라고 쓰여있다고 소리치고, 훌쩍이며 쓰여있다고 우는 게 연기 같으세요? 연기는 대사이기 전에 말이에요. 말! 지금 이 대사를 하겠다가 아니고, 지금 이 말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없는데, 대사랍시고 그냥 냅다 읽어버리면 그게 연기인가요? 제가 여러분께 바라는 것은 딱 하나예요. 이 말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 때 시작하세요. 우선 냅다 읽어버리지 말고, 그리고 다시 하라고 하면 처음부터 다시 하세요. 연기가 중간에 끊고 다시 하는 게 있는 줄 아세요? 아니면 틀려도 그냥 가던가...”

“.........”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우리는 고개를 푹 숙였다.

“자 다시, 다시 할 건데. 방금 전에 했던 거 말고 다른 걸로 준비하세요. 이번엔 진짜 말을 하세요. 알았죠?”

“네!” 우리 반이 대단한 게 이 분위기에서 한 명도 풀 죽지 않고, 파이팅 하며 잘해보자고 크게 대답했다. 반장으로서 너무 고맙고 대견해서 울컥했다.

두 번째 연기 또한 ‘다시’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역시나 한 줄도 넘기지 못했다. 다만 바뀐 것은 선생님도 우리도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내려고 한마음이 되었다는 것이다. 욕먹었다고 핀잔 들었다고 주눅 들고 삐지고 툴툴대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대사 한 줄이라도 넘어가 보고 싶다는 욕구들이 충만해졌다.

‘욕먹는 것이 기분 나쁜 게 아니다. 그동안 아무도 들어주지 않을 대사를 혼자 나불대고 있었던 시간이 아까워서 기분이 나쁜 거다.‘ 그날 우리 반 친구들이 뒤풀이에서 내린 결론이다. 어쩌면 합격자가 나오지 않는 오래된 심화반을 위한 원장님의 극약처방이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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