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간 소음
얼마 전 전주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다시 의정부로 이사를 왔다. 부모님과 같은 단지로 이사를 왔는데, 부모님이 2000년에 이사를 왔으니 벌써 24년이 됐다. 옛날 유머에서나 들어봤을 법한 ‘군대 가서 휴가 나왔더니 집이 이사를 갔더라’가 내 얘기다. 2000년 8월에 입대했는데 100일 휴가를 나오니 여기로 오라고 했다. 휴가를 나와서 아무도 없는 집에서 샤워를 하고 낮잠을 자려고 누웠는데, 천장이 심하게 울렸다. 이전까지는 단독주택에만 살아서 울리는 소리가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한 1시간 정도 계속 울렸다. 그래서 위층으로 올라가서 벨을 눌렀다.
“누구세요?”
“네 아랫집인데요?”
문이 열리며 남자가 나왔다. “네! 그런데요?”
“아... 네 아랫집인데 잠을 잘 수 없을 정도로 천장이 심하게 울려서요. 조용히 좀 부탁드려요.”
“네? 우리 집에는 뛰는 사람 없는데요?” 남자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그리고 그 뒤로 한 4~5살쯤 돼 보이는 여자아이가 내복바람으로 거실을 가로질러 뛰어갔다. 저기 좀 보고 말씀하시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냥 못 본척하고, 한 시간가량을 참다가 올라왔으니 조심 좀 부탁한다고 하고 내려왔다. 윗 집도 알았다고는 했지만, 후에 들어보니 엘리베이터에서 부모님과 마주칠 때 눈초리가 장난이 아니었다고 한다. 나는 그 뒤로 복귀했기 때문에 뒷사정을 몰랐다. 전역하고 어쩌다 이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제야 부모님은 ”아~“하면서 나중에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윗집 사람과 오해를 풀었다고 했다. 우리 애가 단독주택만 살다와서 예민했다고... 내가 나쁜 놈이 된 것으로 좋게 마무리 됐다. 거의 2년간 부모님은 이유도 모르고 윗집의 눈초리를 받아왔다. 윗집은 떡집을 운영했는데 그 뒤로 아버지 생신에 떡 케이크도 선물하고, 우리도 과일이나 채소가 생기면 윗집과 나눠 먹으며 잘 어울려 살았다. 그런데 20년 전 거실을 가로질러 다다다다 뛰어가던 윗집 그 꼬맹이가 시집을 간다고 한다. ‘하긴 시간이 그럴 정도로 흐르긴 했지’라고 생각하니 학원에서의 벽간 소음 에피소드가 생각났다.
언젠가부터 우리 반은 고인 물들 만 몰려 있는 뒷방 늙은이 반이 되어있었다. 원장님이 바뀌며 물갈이 중이던 시기인데... 나중에는 오랫동안 사사해주시던 선생님도 우리를 위해 끝까지 버티시다가 결국 출강을 그만두셨다. 학원을 뭐라고 할 수 없는 게, 막 기초반 수료한 친구들과 실력차이도 있었을 거고, 우리 반이 워낙 들락날락하는 친구들이 많아서 정원이 꽉 찬 적이 별로 없었다. 뮤지컬이나 연극을 전공한 친구들이 살 길 찾는다고 성우에 도전하기 위해 오거나, 다른 학원에서 오랜 기간 공부해서 합격권인 친구들을 원장님이 끌어온 경우도 있었다. 이런 친구들은 그동안 공부해 온 가닥이 있고, 전공자라는 자부심도 세서 다른 반에 보낼 수가 없었을 거다. 어쨌든 그래서 주말 심화반이 2개, 나중에는 3개까지 늘어나면서, 정원도 못 채우는 우리 반은 점점 뒷방으로 밀려났다. 인원이 적으니 작은방으로 몰리는 것은 인지상정. 학원이 나쁘다고 할 수 없다. 어쨌든 그날도 1~2명이 수업시간 전에 작은 강의실에 대기하면서 연습하고 있었다. 그런데 새롭게 꾸려진 심화반이 바로 옆 큰 강의실에서 수업 중이었는데, 벽이 가벽으로 되어 있다 보니 소음이 그대로 전달됐다. 옆 강의실에서 벽을 쾅쾅 치면서 조용히 하라고 소리를 쳤다. ‘앗! 옆반 수업에 방해가 되고 있었구나’를 알아차리고 조용히 연습을 이어갔다. 이후에도 반친구들이 한 명 한 명 도착할 때마다 어김없이 강의실 벽이 쿵쿵 쳐졌다. 조용히 하라고... 어느덧 우리 반도 오기로 한 인원이 다 모이고, 선생님도 도착하셨다. 수업이 시작되고, 우리가 소리를 제대로 못 내자 선생님이 무슨 일 있냐고 물으셨다.
”아~ 그게, 옆반 수업에 저희 소리가 방해가 되나 봐요? 몇 번 주의를 받았더니 조심하게 되네요... “
“그랬어? 근데 이제 괜찮아... 아까는 대기 중이었던 거고, 이제는 우리도 수업인데 뭐! 그냥 해. 또 뭐라고 하면 내가 해결할게. 그냥 하던 대로 해.”
‘흥! 우리도 선생님 있다고...’ 엄마 앞에서 친구들에게 큰소리치는 아이처럼 꾹꾹 참았던 것들을 확 펼쳐 보였다. 연기를 하고 있는데 이전보다 더 심하게 벽이 쿵쿵 울리더니 엄청나게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조용히 하라고! 시끄러워, 시끄럽다고! “라는 목소리가 벽을 타고 넘어왔다. 순간 움찔하고 강의실 안이 조용해졌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우리도 수업 중인데... 누가 이런 소리를 내?” 하면서 선생님이 옆반 강의실로 가셨다.
잠시 후, 벽으로 가려져 있지만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옆반 선생님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았다. 우리 선생님 목소리는 하나도 안 들리는데, 옆반 선생님의 ‘죄송합니다’ 소리만 연신 벽을 관통하고 있었다. 상황정리하고 오신 선생님이,
”옆 반 문을 열었더니 전부 조용히 눈을 감고 있더라고, 마음 다스리는 훈련 중이었데, 그래서 소리에 예민했나 봐! 우리가 좀 봐주자. 일단 소리 지르는 거 빼고, 내레이션부터 할까? “
“네, 알겠습니다.” 살짝 억울할 뻔한 시간이었는데, 체증이 확 내려갔다. 한 30분 정도 지났나? 강의실문을 똑똑 두드리더니 옆반 선생님이 죄송하다며 빵을 사 왔다. 우리에게 사과한다기보다 대선배님이 수업 중인지 모르고 신경질 내는 모습을 보여 죄송하다는 의미가 컸겠지만 덕분에 빵 맛있게 먹었다. 그렇다 성우지망생만 모여있다고 아무에게나 성질부리다가 큰코다치는 수가 있다. 겸손해야 한다. 서로 맞춰가며 조화롭게 살아야 한다. 연기 공부를 하다 보면 이상하게 아우라가 생긴다. 기가 세진다는 말이다. 연기 공부하는 분들은 성질 죽이고 살아야 한다. 유명한 연극배우나 뮤지컬 배우들을 보면 느끼하다고 느낄 정도로 정중하다. 이들도 기를 숨기고 있다가 무대에서 펼친다. 그러고 보면 나르시시즘과는 다른 뭔가 정신병의 일종일지도... 지금 사는 곳도 천정이 뚫릴 정도로 발망치 소리가 어마어마하다. 예전 같으면 관리실에 전화하고, 바로 쫓아 올라갔겠지만, 요즘은 윗 집에 혹시나 장애를 가진 분이 살고 있다면, 쫓아 올라간 내 모습이 너무 못나 보일 것 같다. 이렇게 얘기했더니 엄마가 ‘우리 아들 어른 다됐네...’라고 한다. 뭐야 그동안 날 뭘로 본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