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 어디까지 가봤니? (첫 번째 이야기)

미지의 영역에 발을 들이다.

by 철없는박영감

학원을 다니면서 알게 된 성우라는 영역은 공채합격이라는 큰 장벽이 있기 때문에 굉장히 폐쇄적이고, 소수의 사람들이 활동하는 영역이었다. 그래서 엄청나게 보수적일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또 꼭 그렇지도 않은 곳이 성우라는 영역이다. 일단 선생님들이 로맨티시스트가 많고, 소수이다 보니 진짜 가족적인 분위기이다. 흔히 말하는 가"족" 같은 회사와 정반대 의미의 찐 가족 같은 분위기이다. 물론 그중에서도 튀는 사람이 있고, 내놓은 자식같이 예외인 경우도 있지만, 적어도 직접 몇 년간 봐 온 성우계는 그랬다. 제자들 뿐만 아니라 학원의 다른 지망생들까지 챙겨주시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주활동 무대 중에 애니메이션이 있어서 그런지 순수한 분들이 많다.

이런 애니메이션 덕분에 다양성에 대해서도 크게 배타적이지 않다. 애니메이션이라는 극이 워낙 캐릭터 싸움이다 보니, 한동안 악당으로 중성마녀, 옛날로 치면 아수라백작 같이 수염 달고 미니스커트 입고 나오는 캐릭터들이 인기였다. 물론 악당으로 설정되는 한계가 있었지만, 요즘은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오빠 같은 언니, 강한 여군, 상여자 캐릭터도 많이 볼 수 있고, BL (Boy's Love의 준말) 같은 장르물도 많이 나오는 것 같다.


무서운 카리스마와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장착한 녹음수업선생님과의 시간이 돌아왔다. 이번에도 대사를 주고 준비하라고 한 다음, 연기를 하고, 모골이 송연하게 깨졌기를 기대하는 독자분이 있다면, 그런 분들은 변태다. 어쨌든 몇 번의 수업으로 도저히 당일 준비하는 연기로는 수업진행이 안 될 것 같았는지, 미리 대본을 주고 일주일 동안 준비해오라는 명이 떨어졌다. 남자 2개, 여자 2개 대사가 프린트되어 있었다. 남자 1번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특색 없는 대사였다. 2번이 게이 살인 로봇이었다. 모두의 예상대로 우리 반 남자들 중 2번을 준비해 온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고 예상하는 독자가 있다면 아직도 성우계에 대한 이해도가 한참 떨어지는 것이다. 희한하게 이찌마이(주인공, 아직 일본어 잔재가 좀 남아있어요.) 역할을 남자성우지망생들은 싫어한다. 대신 니마이, 쌈마이(조연, 단역) 역할은 서로 하려고 한다. 역시나 전부 다 2번 역할을 준비해 왔다. 결과는… 음, 여기부터는 여러분이 상상한 대로다. 불호령이 떨어졌다.

“여러분, 진짜 게이 본 적 있어요? 홍석천 이런 애 말고, 진짜 게이 만나서 이야기해 본 적 있어요?”

“.........” 우리는 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지금 받은 대사가 게이 살인 로봇이라고 해서 내용이 웃긴가요? 여러분이 지금 한 연기를 진짜 그분들에게 보여주면 어떻게 생각할 것 같아요? 배우는 어떤 배역이든 맡을 수 있고, 해야 해요. 그럼 이런 역할이 들어오면 적어도 그 캐릭터가 어떤 식으로 이야기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지 연구를 해와야죠... 나 같으면 이태원 같은 데 가서 직접 보고 연구해 오겠네... 그 정도 각오 없으면 연기하지 마세요.”

우리 반 남자들 아무도 고개를 들지 못했다. 칭찬을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연기하지 말라는 소리를 들으니 오기가 생겼다. 학원을 마치고 술에 취해 이태원 까짓것 가자고 카톡에 올렸다. 학원 동기들이 아닌 회사 동기 단톡방에… 밤새도록 회사동기 단톡방이 난리가 났다. 일요일 아침에 일어나서 이 사실을 알아차린 나는 하는 수 없이 이실직고했다. 성우가 되려고 학원을 다니고 있고, 다닌 지 몇 년 됐으며, 어제 수업에서 게이 살인 로봇 연기를 하다가 선생님께 된통 깨지고 술에 취해 카톡을 잘못 보냈다. 미안하다고...


그런데 의외로 몇몇 동기가 ‘형을 위해 그 정도도 같이 못 가주겠냐’며 지원하고 나섰다. 오 이런 고마울 때가... ‘그럼 다음 주에 한번 모여서 같이 가줄래?’라고 했더니 동기 동생들이 쿨하게 ‘콜’을 외쳐주었다. 그래서 다들 부담 없는 솔로들끼리 금요일에 이태원을 가기로 잠정적으로 약속을 했다. 월요일, 별 느낌이 없다. 아무 사건 없이 지나갔다. 화요일, "까똑~!"

“음... 그래도 이태원을 가서 어디를 가야 할지는 정해야겠지? “

“그러게요 형이 정해서 알려줘요.”

”ㅇㅋ, 콜” 역시나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수요일, "까똑~!!"

“야 이건 어디서 알아봐야 되냐? 네이버에 검색해도 안 나와. ㅜㅠ”

“글쎄요. 우리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인데... 어떡하죠? 나 금요일에 약속 다 비워놨는데? 그냥 가서 아무 데나 가볼까요?”

“그래도 공부하러 가는 건데 아무 데나 갈 순 없지. 알았어. 내가 좀 더 알아볼게.”

“그래요. 형 금요일에 봐요.”

목요일, "까똑~!!!"

“형! 제가 드디어 알아냈어요”

“어? 그래? 어디로 가야 돼?”

“음. 이태원 역 OO번 출구로 나와서, 이태원 소방서에서 그 옆으로 오르막길 골목이 나온데요. 그쪽에 길 따라서 전부 게이 클럽이라는데요?” 뭔가 구체적인 장소가 카톡에 올라오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아 진짜 가야 되는구나를 직감한 동기들도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다들 순간적으로 얼어붙은 것 같았다. 나도 ‘까짓 거 뭐 가지 머’라고 했지만, 막상 진짜 가려니 긴장이 됐다.

“오....! 그래 잘 찾아냈구나. 그럼 다들 금요일에 회사 앞에서 모여서 가자고?”

“아... 네, 그래요. 형. 근데 꼭 가야 하는 거죠? 진짜 가는 거죠?”

“어! 그럼 가야지. 너희들 부담되면 안 와도 돼! 나 혼자가지 머. 공부하러 가는 거니까 혼자가도 돼! ㅋㅋㅋ”

“어 그럼 형 전 빠질게요. 아무래도 실감 나니까 못 가겠네... 미안해요. 형!”

“ㅇㅋㅇㅋ 괜찮아요. 간다고 말해 준 것도 너무 고마워.” 이렇게 하나 둘 빠지고, 나까지 세 명이 남게 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금요일. 어색한 웃음과 함께 회사 앞에 모인 우리 셋은 이태원으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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