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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 어디까지 가봤니? (두 번째 이야기)

오만과 편견 사이 외줄 타기

by 철없는박영감

예전 영업사원일 때도 그랬지만, 뭔가 불순한 의도를 갖고 안 그런 척 위장해서 사람을 만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이번 이태원 방문도 마찬가지였다. 게이 살인 로봇이라는 역할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더 파고 들어가면 연기하지 말라는 선생님의 독설에 오기를 부렸다. 그리고 주사위는 던져졌다. 어쨌든 상대방 모르게 누군가를 관찰해야 한다. 금요일 퇴근을 하고 회사 앞에서 만난 우리 세명은 우선 저녁을 먹기로 했다. 회사 근처에서 뜨끈한 국밥을 먹으며 소주도 몇 병 시켰다. 우리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줄 포션이었다. 유비, 관우, 장비가 도원결의를 할 때 이런 심정이었을까? 결국에는 소맥까지 말아가며 취기를 올렸다. 그렇게 배도 부르고 알딸딸해진 우리는 이제 할 일 하러 가자라는 심정으로 택시에 올라탔다. 2차는 이태원으로...!


분명히 취기가 많이 오를 정도로 용기포션을 마셨는데... 점점 이태원 근처에 다다르자 다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남자 3명이 이태원 소방서 앞에 내려달라고 하니, 괜한 자격지심에 택시 기사님도 이상한 눈빛으로 보는 것 같고, 어느새 취기는 싹 사라졌다. 퇴근해서 6시부터 저녁식사 겸 술을 마시고 택시를 타고 이태원에 도착해 보니 8시가 조금 안된 시간이었다. 겨울이라서 그렇지 여름이었으면 아직 훤한 시간이었을 거다. 이태원 소방서 앞에서 내린 우리 세명은 소방서 오른쪽으로 들어서서 천천히 골목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잠시 후 휘황찬란한 네온사인들이 눈에 들어왔다. 드디어 목적하던 곳에 도착했음을 직감했다. 데리고 온 사람이 앞장서야겠다는 생각에 제일 처음 눈에 띄는 곳으로 향했다. 마치 놀이공원에서 귀신의 집에 들어가듯이 발걸음 소리도 나지 않게 조심히 들어섰다. 지하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밖의 네온사인은 화려했지만 지하의 술집은 어두컴컴했다. 진짜 귀신의 집 같았다. 중간에 무대 같은 것이 보이고 생각보다 좁았지만 새빨간 조명 때문에 정신이 아득해지고 있었다. 예전에 사이판에 친구들이랑 놀러 갔을 때, 시내 Pub에서 술을 마시고 흥이 오른 친구가 여기저기 물어 스트립바를 찾아간 적이 있었는데, 딱 그 분위기였다. 그때도 불편했지만 지금은 그때보다 배는 더 불편했다. 다행히 시간이 일러서 그랬는지, 우리가 들어온 것을 아무도 신경 안 썼다. 아니 아예 사람이 없었다.

“아직 문 안 열었나 보다. 다른 데로 가보자.”

침을 꿀꺽 삼키고 같이 온 동생들에게 나가자고 했다. 다시 지상으로 나오자 그동안 나도 모르게 숨을 참고 있었는지 심호흡을 크게 했다. 긴장을 많이 해서 그랬는지 약간 현기증도 났다. 무릎을 짚고 허리를 숙이고 있다가 동생들 쪽을 봤다. 괜찮은 척하고 있지만 생전 처음 느끼는 감정에 다른 곳으로 가보자는 말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그 거리에서 저녁 8시는 아직 초저녁인 것 같았다. 가게들이 거의 문 열기 전이었고, 클럽 같은 곳은 새가슴을 가진 나에게 무리였다. 동생들은 신기한 듯 가보자고 했지만, 내가 도저히 안 되겠다며 사양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우리 같은 사람은 들어가고 싶어도 못 들어가는 곳이었다.


문 연 곳이 별로 없다며, 길을 서성이며 그냥 집에 갈 궁리를 하다가 일행 중 한 명이 한쪽을 가리켰다. 1층이었고, 우리가 흔히 가는 바 분위기였다. 다만 여자가 없을 뿐이었다. 조명도 새빨갛거나 휘황찬란하지 않고 그나마 차분한 분위기였다. ‘그래 칼을 뽑았으니 무라도 썰어야지’라는 하찮은 용기가 갑자기 발동했다. 가보자며 그곳으로 돌진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서 최대한 구석자리에 앉았다. 셋다 이미 취기는 싹 가신 상태였다. 일단 자리에 앉아 술을 시키기로 했다. 반짝이 슈트를 입은 짧은 금발염색머리의 종업원이 우리가 흔히 아는 여성스러운 말투로 다가와 옆에 앉았다. 맥주와 소주가 필요했지만, 테킬라와 양주 밖에 없었다. 우선 양주를 주문하자 곧 과일 안주와 함께 술상이 차려졌다. 일단 용기포션 도핑이 필요했다. 이번에는 비싸고 향기 좋은 포션이니까 효과도 좋으리라 생각하며 스트레이트로 한잔 쭉 들이켰다. 식도와 위를 싹 쓸어내리는 느낌이 익숙해질 즈음 다시 취기가 올라오며 긴장이 풀렸다. 처음 맞아준 ‘마담’(아마 그렇게 불렀던 것 같다.)과도 어느 정도 친해져서 분위기는 점점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점점 흥이 오르며 어느 순간에 보니까 여기저기서 다른 마담들이 와서 우리 테이블에서 같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나중에 보니 술값이 어마어마하게 비싼 곳도 아니었고, 막 바가지를 씌우는 곳도 아니었다. 운이 좋았는지, 좋은 가게에, 좋은 사람들을 만났다.


분위기는 점점 무르익어 어느 순간 사장님까지 동석해 있었다. 분명히 다른 테이블에 손님들도 많은데, 우리 근처에만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사실 그때는 이미 만취를 넘어서서 술이 술을 먹고 있던 때라서 기억도 안 난다. 다만 약간 기억나는 것은 술에 점점 취하면서 선을 넘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하면 낯부끄러워서 이불킥 백만번은 해야 할 정도이다. 그래도 우리 같은 손님이 하나 둘이었겠는가... 다행히 웃으면서 잘 이해해 줬다. 같이 간 동생들은 취하지 않았다면 ‘저 형이 왜 저렇게 선을 넘지?’라면서 외줄 타기 하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점점 취하면서 혀 꼬부라진 목소리로 여기 계신 분들은 다 그쪽이냐라는 질문을 시작으로, 같이 간 동생들과 나까지 인기투표를 하자고 하지 않나, 인기투표에서 꼴찌를 하고 질투 나서 집에 가자며 진상을 부렸던 기억까지... 아주 대~단했다. 결국에는 연기 공부하러 왔다며 게이 살인 로봇 연기까지 그들 앞에서 했다고 한다. 나중에 동생들이 얘기해 줬는데, 그건 하지 말았어야 했다며... 내가 그런 진상을 부리자 같이 술 마시던 마담들이 표정관리가 안 됐었다고 했다. 아휴~ ‘어차피 얼굴 다시 안 볼 사람들...’이라는 위로를 스스로 했다. 즐겁고 재밌었던 기억까지만 남겨두고 나머지 진상 기억은 알코올과 함께 홀라당 휘발시켜 버렸다.


그래도 연기 공부는 많이 됐다. 인사불성이 되기 전까지 좋은 분위기에서 다양한 분들과 대화를 많이 했다. 우리가 흔히 가지고 있는 편견으로, 여성스럽고 가식적이고 교태 부리며 오버해서 행동하는 게이만 상상했는데, 물론 그런 분들도 있지만, 아닌 분들도 많았다. 얘기하지 않으면 전혀 알 수 없는... 그냥 착한 학교 후배 같은... 전혀 위화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게이 살인 로봇을 연기한다고 요상한 말투와 베베꼬는 행동을 했던 내 연기를 보고 마담들이 표정관리가 안 됐다는 증언이 더 부끄러워졌다. 연기를 할 때, 막연하게 ‘이 화자는 이런 감정일 거야...’라고 추정해서 연기하는 것은 아마 이 시점에서 딱 끊었던 것 같다. 그래서 애니메이션이면 시사를 더 열심히 하고, 실사 연기면 버스나 지하철, 시장에서 캐릭터에 맞는 사람들을 찾아다녔다. 선입견, 편견... 그런 주관적이고 나 중심의 판단이 타인을 배척하는 오만이 되는 것은 아닐까? 아마도 선생님은 그런 오만함을 고쳐주고 싶은 게 아니었을까? 다음 수업시간, 이태원을 다녀온 나의 모험담은 잠깐의 주목을 끈 후, 못하는 연기에 대한 혹독한 독설에 그대로 묻혔다. 그래도 선생님의 독설이 예전과 조금 달라진 것 같다는 느낌은 혼자만의 착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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