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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내려놓으라는 말

‘나’라는 쐐기를 뽑으라는 말

by 철없는박영감

흔히 연기자 하면 남의 인생을 살아볼 수 있는 재밌는 직업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렇다 틀린 말은 아니다. 현생이라면 절대로 살아볼 수 없는 악마, 살인마, 슈퍼히어로, 악당, 운동선수... 셀 수 없이 많은 소재들이 극화되며, 다양한 소재만큼 다양한 인생을 살아볼 기회를 배우는 갖는다. 작가와 감독이 치열하게 고민해서 탄생시킨 대본. 그 안에 녹아있는 혹은 숨어있는 서브텍스트들을 찾으며 배우는 집중, 몰입해서 인물을 표현해 낸다.


가끔 영화를 보다가 ‘어디서 진짜 깡패를 데려왔나?’ 싶을 정도로 소름 끼치는 연기를 하는 배우를 보면 이제는 이런 생각이 든다.

‘아~ 저 사람도 밑천 다 드러냈구나...’

사실 조폭이나 강력범죄자 같은 역을 실감 나게 연기한 사람은 심심한 연기를 할 기회가 없어진다. 게다가 ‘진짜 깡패 아니야’라는 반응은 배우의 얼굴이 대중에게 익숙해질수록 점점 먹히지 않는다. 평범한 역할로 전향해서 몇 작품 찍어도 이내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는 그런 배우들을 많이 봤다. 이제는 센 역할도, 착한 역할도 제대로 할 수 없는...


훗!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이렇게 연기에 대해서 글을 쓴다는 것이 좀 웃기긴 하지만, 뭐 전문 서적을 쓰는 것도 아니고, 남의 얘기를 쓰는 것도 아니니, 작은 깨달음이지만 느낀 점을 써볼까 한다. 처음 성우학원을 다니면서 장단음, 비어, 비문, 잘못된 발음, 호흡, 발성 같이 기초적인 것들을 고치고 훈련한다. 말을 하는 직업이므로 우선 올바른 말을 배운다. 그리고 조금 지나서 본격적으로 연기를 배우기 시작한다. 처음이 머리로 하는 공부라면, 나중은 가슴으로 하는 공부다. 이 과정에서 많은 말들이 나온다. 감정, 공감, 감동, 몰입, 집중... 이루 말할 수 없는 용어, 이론, 실기 등등. 즉, 지망생들을 훈련시키는 프로그램이 돌아간다. 그중에서 제일 많이 듣는 말이 나를 내려놓으라는 말이다. 나를 내려놓고 배역에 집중하라는 말.


처음에는 나를 내려놓으라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이어지는 ‘배역에 집중하라’는 말에 꽂혀 철저하게 나를 버리고 배역에 동화되려고 했다. 집중과 몰입을 넘어선 ‘빙의’를 추구했다. 그런데 빙의는 신내림 받고 작두 타야 한다. 절대로 될 리가 없다. 나를 내려놓고 배역에 집중하라는 말은 감정적으로 혹은 상식적으로 '평소의 나라면 하지 않을 짓'이라는 쐐기를 뽑아내라는 뜻이 더 맞다. 평소의 나라면 이 정도에서 끝낼 감정의 흐름을 연기를 할 때는 버려야 한다는 말이다. 즉 감정의 흐름의 끝을 정하지 않아야 한다. 나를 없애는 것이 아니고 나라면 이쯤에서 끝냈을 한계를 없애야 한다. 한 번씩 선생님들이 ‘한 단계 더 나아갔으면 좋겠는데...’라는 아쉬움을 피드백으로 주실 때가 있었는데... 그 뜻을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아직도 연기를 하는데 '나'가 가로막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만약 처음부터 배역에만 집중해서 ‘나’를 완전히 배제하고 연기하려고 하다 보면 작위적인 연기가 되기 쉽다. 연기의 출발은 ‘나’다. ‘내가 지금 이 상황이라면?’이라는 질문에서 출발해서 감정의 흐름을 진행시키다가 ‘나’의 흐름이 끊기는 한계 부분에서는 쐐기를 뽑고 ‘이 상황의 이 캐릭터는 이렇게까지 할 것 같아...’까지 발전시켜야 한다. ‘나’가 개입된 감정의 흐름에 따르는 연기는 자연스럽다. 다만 끝에 ‘나’를 남긴 연기는 감동을 주지 못한다. 남의 다리 긁고 시원하다고 거짓말하는 것과 진배없다. 내 다리 긁고 진짜 시원해지자. 내 성격대로 하되, 끝은 내가 아니게 되어보자. 그래서 연기수업에서 선생님들이 가끔씩 감정과잉을 주문하신다. 감정의 한계를 체험해 보면 그 아랫 단계 감정들은 스스럼없이 표현해 낼 수 있다. 물론 연기의 흐름에 정답은 없다. 이것저것 생각하고 연기해 보면서 제일 적당한 것을 찾는 것이다. 아마도 이런 작업이 나를 내려놓으라는 말의 진정한 뜻일 것이다.


연기는 남의 인생을 살아 보는 가상현실이나 RPG게임이 아니다. 나를 극의 상황에 밀어 넣고 나라면 어땠을까를 고민하고 그 안에서 내 한계를 돌파해 내는 어려운 작업이다. 그래서 연기자는 얼굴만 예쁘고 잘생긴 사람들이 아니다. 그리고 성우 또한 목소리만 좋은 사람들이 아니다. 자신의 한계를 돌파해 낼 수 있는 강력한 정신력의 소유자들이다. 아마 그래서 연기가 학문으로도 인정받는 분야가 된 것이 아닌가 싶다. 강한 정신력, 이것이 연기하는 사람들의 가장 강력한 무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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