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는 재주
연기(演技) 1. 배우가 배역의 인물, 성격, 행동 따위를 표현해 내는 일. 2. 어떤 목적을 위하여 일부러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하는 말이나 행동 [엣센스 국어사전 제6판, 민중서림]
요즘 '가짜 연기' 발언이 이슈다. 유명배우가 인터뷰 중에 본의 아니게 말실수를 한 것 같은데, 워낙 유명배우이다 보니 파장이 크다. 거기에 원로 배우들의 일침이 기름을 붓고 있는 형국이다. 뉴스 인터뷰에 나와서 '미숙한 언어로 인한 오해'라며 반성하고 있다고 까지 했는데, 논란은 여전하다. 인기라는 것의 무게를 실감할 수 있다. 인기 배우가 아니었다면 이런 논란도 없었을 거다. 배우 본인도 단순히 솔직한 심정을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했을 뿐일 텐데, 인기로 인해 말에 힘이 붙게 되면서 원로들도 가만히 좌시할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가해자는 없고 피해자만 있는 안타까운 사건이다. 말이라는 것이 이렇게 무섭다. 그래서 오늘은 '말'에 대해서 써볼까 한다.
필자는 성우도, 연기 전공자도 아니다. 그저 성우라는 꿈에 도전했던 5년 간의 추억과 생각들을 날려버리지 않고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을 뿐이다. '글'도 '말' 못지않게 파급력이 있기 때문에 앞의 사건을 보며 그동안 써 온 것들을 세심히 되짚어 봐야 할 것 같다. 다행히 십여 명 정도의 관심을 받는 변두리 글이다 보니, 파급력은 고사하고 더 잘 써야겠다는 고민이 먼저 필요할 뿐이다. 작가에게 '글'이라는 표현 수단이 있듯이 배우(연기자)에게는 '말'이 표현 수단이다. 그래서 결국 배우는 '말을 하는 직업'이다. 그리고 이런 말들이 어떤 목적을 위해 모이면 연기가 된다. 즉 연기라는 재주(기술)는 말하는 재주(기술)다. 앞의 사건에서 '말실수'라고 했지만, 사실 배우의 말하는 재주가 부족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 물론 일침을 가한 원로 배우들도 마찬가지다.
말이라는 것에는 개성이 묻어 나올 수밖에 없는데, 이것이 지난 글에서 썼던 '매력'이다. 사람 냄새나는 말, 그래서 배우의 말은 매력적인 개성과 공감되는 보편적 평범함이라는 서로 상충되는 요소가 적절히 짬뽕되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을 연기화술(話術)이라고 한다. 연기화술 세련미의 극치를 볼 수 있는 곳이 성우이다. 사실 말이라는 것이 입으로 하는 것뿐만 아니라 표정과 행동이 합쳐져야 하는데, 성우들은 표정과 행동이라는 수단을 잃었으니 목소리, 호흡, 발성, 발음의 세련됨을 극한으로 수련할 수밖에 없다. 일부 연예기획사에서는 신인 배우 혹은 연습생들의 화술 훈련을 성우에게 맡기는 경우도 많다. 지망생들이 학원에서 배우는 것 말고, 성우님들의 매력적인 화술을 배우게 하는 것이다. 과거에는 배우가 연기하고 성우가 더빙을 하는 CF가 특히 많았다. 요즘은 성우들의 화술을 배우들에게 훈련시켜 자연스러움을 더 추구하는 것 같다. 가끔 커피 CF를 보면 배우 목소리인지 성우 더빙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잘 들어보면 비슷하지만 다른 목소리이다.
학원을 다니면 가장 많이 듣게 되는 말이 "말을 해라"이다. 정확히는 "읽지 말고, 말을 해라"이다. 음악가에게 악보가 주어지듯이 연기자에게는 대본이 주어진다. 대본은 글로 쓰여 있고, 우리는 글을 받으면 자연히 읽게 된다. 그리고 흔히 말하는 '국어책 읽기' 연기가 시작된다. 다들 학창 시절에 국어책 많이 읽어보셨을 테니 아실 거다. 어미가 이상하게 올라가거나 구부러지거나 하면서 똑같이 마무리된다. 이게 흔히 말하는 '쪼'다. '이런 쪼다 같은 녀석'이라고 욕할 때의 것이 아니라 '음조(音調) : 소리의 높낮이와 강약'의 '調'에서 나온 말 같다. 특히나 읽으면 호흡이 사라진다. 앞에서 말했듯이 성우 연기의 꽃은 호흡이다. 이런 호흡을 빼고 읽게 되면 '발연기', '똥배우'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읽는다는 행위는 이상하게, 하다 보면 완벽을 추구하게 된다. 틀리는 것을 경계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틀릴까 봐 노심초사하게 되고, 조심스러워지고, 위축되게 된다. 생각해 보면, '말하기'에는 틀린다는 개념이 없다. 일단 입으로 내뱉은 말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고, 일단 꺼냈으면 '못 먹어도 고'같은 '노빠꾸'의 개념이 '말하기'이다. 만약 틀렸다 하더라도 사과 혹은 반성하지, 수정의 개념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서 연기할 때 선생님들이 "틀려도 그냥 가세요"라는 말씀을 많이 하신다. 말하기는 '노빠꾸'니까...
그리고 대사를 치다 보면 글씨를 잘못 보거나 조사를 잘못 붙여서 틀리는 경우가 있는데, 대본을 읽다 보면 잘못 읽었음을 인지하게 되고, 잘못을 인지하는 순간 주저함, 머뭇거림이 발생한다. 말도 하다 보면 주저하고 머뭇거릴 수 있지만, 잘못 읽어서 주저하는 것은 느낌이 달라서 아무리 잘해도 연기내공이 높지 않음을 들킨다. 그래서 필자가 추천하는 것이 외우는 것이다. 성우 공채 시험 연기는 대부분 단문이라서 보통 4~5줄, 길어야 6줄이다. 암기 적극 추천한다.
연기가 말하는 기술이라고 할 수 있는 또 한 가지가 이유가 바로 말할 때의 더듬거림, 주저함, 머뭇거림, 추임새, 의성•의태어, 말버릇의 자연스러움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한 읽다가 틀려서 머뭇거리는 것과 느낌이 다르다가 무슨 말인지 설명하려고 한다. 읽거나 외우지 않은 이상 한 번도 안 틀리고 앞뒤 문맥에 맞게 조리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아니 전무하다. 연설가, 아나운서, MC들이 그럴 것 같지만, 대본이나 프롬프터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 생각이나 느낌, 주장을 말로 표현하다 보면 생각과 말 사이의 간극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데 그럴 때, 머뭇거림이나 더듬거림이 생긴다. '말 더듬'이 말보다 생각이 앞설 때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따라서 이 부분을 자기의 언어습관에 맞게 연기하면 굉장히 자연스러운 연기가 된다. 그리고 언어습관이 보편성과 타당성을 갖췄다면 공감까지 얻을 수 있다. 앞에서 자연스러운 연기에서 끝나면 안 되고 '나'를 내려놓고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고 했다. 자연스러움을 넘어서 잘하는 연기가 되려면 마무리는 캐릭터의 언어습관을 자기에게 덮어 씌워야 한다. 그래서 캐릭터가 실존할 듯한 생명력을 불어넣어야 한다. 즉 연기는 필연적으로 거짓말이다. 진짜 같은 거짓말이다. 따라서 연기는 거짓말 잘하는 기술이다. 거짓말이 진실이라고 믿는 리플리 신드롬이 같이... (이 정도면 사기…? 에헴. 쿨럭~!) 그래서 연기자들이 배역에서 빠져나오기 힘든 경우가 발생한다. 앞에 썼던 에피소드들이 다 '연기', 말하는 기술과 관련된 것들이다.
이렇게 정리해서 글로 쓰고 보니, 필자도 고민이라는 것을 꽤 많이 했다. 선생님들이 얼마나 많은 것들을 가르쳐 주셨었는지 이제야 제대로 알 것 같다. 이렇게 배운 게 많은데 다 어디다 엿 바꿔 먹었는지... 아쉽게도 나는 '실전파'라기보다는 '이론파'에 가깝다. 옛날 개그 마냥 '10년 만 젊었어도... 아후~!'
아침부터 아쉬운 사건을 마주하며, 하루를 아쉬움으로 시작한다. 인터뷰에 미숙한 언어 대신 조금 더 프로다운 겸손한 표현을 썼더라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서브텍스트는 이해하겠으나 말재주가 아쉽다. 그런 후배의 실수에 일침을 가하는, 그리고 일침을 가하도록 부추기고 기사거리를 뽑아내는 언론도 매한가지로 아쉽다. 밖으로 비친 설전은 있는데, 서브텍스트는 서로 딴 말하고 있는 아쉬움 가득한 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