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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시험 보는 날 (첫 번째 이야기)

전국 성우지망생 자랑!

by 철없는박영감

지금은 모든 방송사의 성우공채시험 1차가 녹음파일제출로 통일됐지만, 팬데믹이 오기 전까지 KBS는 1차부터 현장시험을 치렀다. 녹음파일제출 시험은 지금도 어떻게 당락이 결정되는지 아무도 속 시원하게 심사기준을 밝히지 않는다. 어쨌든 선택된 소수 인원만 2차 현장시험을 치를 수 있다. 이 때문에 다른 언론고시들도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성우공채시험은 운칠기삼이라는 말이 많이 돈다. 몇만 개의 녹음파일을 전부 다 듣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고, 인사말만 혹은 대사 첫마디만 듣고 바로 패스해버리지 않을까 추측해 본다. 수만 명 중에서 20~30명 추리는데 그냥 패스시킨 파일 중에 옥석이 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매년 공채를 뽑는 것도 아니고 다른 방송국에서 먼저 채가봤자 2~3년 후면 프리로 풀려서 더 좋아진 실력의 프리성우로 캐스팅하면 되니까 아쉬운 쪽은 방송국이 아니고 지망생들일 것이다. 지원서에 나이도 기재하고, 일부 방송국에서는 녹음파일에 출생 연도를 기재하라는 요청까지 있는 것을 보면, 설령 나이로 자른다고 해도 외부에서는 알 수 없는 속사정이다. 한 때 EBS 성우극회에는 고학력자들이 많아서, 명문대 졸업자를 우대한다는 소문이 날 정도였으니 성우공채의 당락 기준은 지금까지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연기라는 것이 잘하고 못하고를 판단해서 나래비를 세운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워낙 바늘구멍이다 보니 그저 ‘카더라 통신’이 만들어 낸 루머가 아닐까 짐작해 본다.


이런 녹음파일제출 시험을 치를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필자의 추론으로는, 아마도 KBS를 제외한 다른 방송사는 1차부터 현장시험을 치를 인적, 물적 재원이 모자라기 때문일 것이다. KBS야 시설자체도 넓고, 크고, 많다. 그리고 성우극회 전속 인원도 많아서 현장시험 진행이 가능하다. 하지만, 다른 극회들은 우선 몇 만 명씩 시험을 치를 공간이 없고, 진행인원도 턱없이 부족하다. 그래서 선택된 소수 인원을 추려서 2차부터 현장시험을 치르는 것이 아닐까라고 미루어 짐작한다. KBS는 공영방송사답게, 그리고 가장 역사가 깊은 방송사답게 많은 노하우가 쌓여있는지 매년 수만 명이 몰려도 사고 하나 없이 시험을 치렀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전국의 성우지망생이 몇 명인지 정확한 통계가 작성된 적은 없지만, 매년 KBS 시험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남자 수험번호가 2만 명 정도, 여자수험번호가 4만 명 정도로 집계되었고, 그중에 허수를 50%로 잡고 대략 3만 명의 지망생이 있다고 추정한다. 그리고 남녀 성비도 1:2 정도로 추정한다. 거의 5~6년 전 이야기니까 지금은 통계수치가 많이 변경되었을 수도 있다. 요즘이야 채용공고에 나이제한 없음이 당연하지만, 현장시험을 보던 당시에는 나이제한 없는 채용공고가 손에 꼽혔다. 그리고 그중에 하나가 KBS성우공채였다. 그래서 원서접수처에 가면 나이 지긋한 어르신부터, 동화구연가, 시낭송가, 연극배우, 연영과 재학생 등등 다양한 연령의 각계각층 사람들이 다 모였다.


KBS는 성우공채시험 접수도 현장접수만 받았는데, 대리접수가 가능했다. 그래서 직장에 다녀서 시간이 없는 원생이나 지방에 살아서 거리가 먼 원생들을 위해 학원에서 인적사항과 사진 등을 받아서 접수를 대행해 주기도 했다. KBS시험은 원서접수부터 눈치싸움이 대단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시험을 볼 때 한 스튜디오에 다섯 명씩 들어갔는데, 중간에 결원이 생겨도 그냥 비워두는 시스템이었다. 그래서 끝자리 1, 6번대가 모든 스튜디오에서 첫 순서였고 모든 사람의 기피 수험번호였다. 3~5, 8~0번대의 선호하는 수험번호를 받기 위해서는 눈치껏 줄을 잘 서야 했다. 필자도 첫 해는 학원에서 접수를 대행해 줬고, 운 좋게 4번대 번호가 걸렸다. 사실 실력에 자신 있으면 번호대가 무슨 상관이 있겠냐만... 그래도 다른 사람들이 선호하는 수험번호를 받으니 기분은 좋았다. 그리고 원서 접수를 일주일 정도 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처음 3~4일간 접수하는 번호는 거의 시험시간이 아침과 오전에 걸리고, 마지막 날에 접수를 해야 늦은 오전이나 오후에 걸리기 때문에 접수하러 가는 날짜도 중요했다. 그다음 해부터는 휴가를 내고 방송국 구경이나 할 겸 직접 접수를 했다. 어릴 때부터 완전 아침형 인간이었기 때문에 대부분 원서접수 첫날에 접수를 했다. 그래도 순서는 3~5번째가 좋은 것 같아서 눈치싸움에 동참했는데 나중에는 의미 없는 것 같아서, 1번도 해보고, 같은 반 동생이랑 연번으로 같은 스튜디오에 들어가 보기도 했다. 같이 간 동생도, 필자도 합격권이어서 비록 나중에 선생님께 한소리 듣긴 했지만...


KBS 성우공채시험 1차에서 시험을 잘 봤는지 판단할 수 있는 중요한 지표가 한 가지 있었는데, 바로 심사자가 한 번 더 시켰느냐 여부였다. 아니면 인터뷰라도 간단히 진행했느냐였다. 시험과정은 5명씩 불려 가 먼저 5개의 항목을 받고, 5분 정도 연습시간을 준 다음, 스튜디오에 들어가서 한 명씩 마이크 앞으로 나와 인사를 하고, 항목 중 한 가지를 선택해서 연기를 하는 순서로 진행됐다. 보통은 한 개를 겨우 하거나, 중간에 틀려서 많이 더듬거리면 심사자가 "됐습니다."라고 중단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다른 항목을 한 번 더 시켰다거나 인터뷰를 했다는 것은 해당 지원자에 관심이 있다는 얘기가 되고, 곧 시험을 잘 봤다는 소리가 된다는 논리다. 그리고 여러 해에 걸친 경험상, 그리고 합격자들의 증언에 따라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당연히 첫 해에는 경험상 지원한 것이기 때문에 아무 생각 없이 진행 측에서 시키는 대로 그대로 하고 나왔다. 긴장은 많이 했지만 다행히 안 틀리고 끝까지 하고는 나왔다. 바로 앞 지원자가 그중에서는 제일 잘했는데 나중에 합격자 명단에는 없었다. 원래 녹음이 불가능한데, 한국 사람들이 어디 말을 제대로 듣나? 필자도 몰래 바지 주머니에 녹음기를 넣어 켜고 들어갔다. 나중에 나와서 들어보니 뭐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 보통은 한 방에 들어가는 5명 중 1~2명은 결시자가 있는데, 우리는 5명이 전부 왔다. 앞의 1~2번은 더듬, 더듬 하다가 중간에 그만하라는 요청을 받았고, 3번 지원자가 차분하게 무리 없이 잘했다. 앞사람의 기운을 받아 필자도 처음 도전한 것 치고는 틀리지도 않았고 끝까지 했다. 한 번 더 해보라는 요청을 받은 사람은 없었고, 인터뷰 요청자도 없었다. 정설이 맞았다. 오랜만에 긴장이라는 녀석을 마주했다. 워낙에 잘 떨고, 앞에 나서는 것을 싫어하던 성격이라서 걱정했는데, 기초반 수업에서 껍질을 벗고 난 후로는 완전히 떨치기까지는 못했지만 예전에 사시나무 떨듯이 떨던 것과는 달라져 있었다.


시험이 겨울이었고, 토요일에 진행됐던 것으로 기억한다. 시험을 마치고 여의도 공원을 가로질러 여의도 버스환승 정류장에서 도봉산으로 향하는 버스를 타고 녹음해 둔 파일을 들으며 돌아왔다. 그런데 사실 시험장 녹음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선생님들은 녹음해 와서 듣고 반성하고 고치라고 하셨지만, 뭐랄까... 버스 출발하고 손드는 느낌이랄까... 시험이라는 게 그렇지 않은가? 100% 실력발휘 못하는 것은 당연하고, 얼마나 안 떨고 최대한 평소실력을 잘 펼쳐 보이냐가 관건인데... 뭐 그걸 녹음까지 해와서 반성을 한단 말인가? 그래서 다음 시험부터는 굳이 하지 말라는 거... 녹음은 안 했다. 녹음하다 걸리면 실격처리된다. 첫 시험은 실력도 부족하고, 가진 게 아무것도 없어서 아쉬움이라고는 없었고, 진짜 좋은 경험을 해봤다는 느낌만 있었다. 모르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아무것도 아닌 실력으로 시험 치고 와서 스스로 잘했다며 대견해하면서 버스 창밖을 바라봤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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