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고향
KBS 성우는 주 활동무대가 라디오라서 다른 방송사처럼 나이대 별 변성연기를 요구하지는 않는다. 시험 문제는 5문항이 나오는데, 한 문제는 내레이션, 한 문제는 드라마 해설이나 문학작품, 세 문제가 연기대사로 출제된다. 그중에서 한 개를 선택해서 시험을 보는데, KBS는 연기위주로 자연스럽고 기본기가 확실한 사람을 뽑기 때문에 보통 내레이션은 선택하지 않는다. 먼저 연기를 보여주고, 추가로 한 개 더 해보라는 요청을 받으면 내레이션을 한다. 선생님들도 내레이션을 먼저 하지 말라고 추천하신다. 내레이션은 임팩트가 약해서 기억에 안 남는다고 한다. 하지만 꼭 그렇게 정해진 것은 아니고 연기 항목 중에 본인에게 맞는 것이 없으면 내레이션을 해도 된다. 학원 PD님이 강의시간에 해주신 얘기에 따르면, 학원 원장님도 시험 당시 레전드 에피소드로 유명하신데... 모두들 불문율같이 연기를 할 때 혼자서 내레이션을 하셨단다. 그런데 레전드로 남게 된 이유가 폭주족 같이 입고 가서, 엄청나게 따뜻하게 내레이션을 했단다. 이어 추가로 요청받은 연기도 제대로 보여주고 오셨다고 한다. 그래서 한 번에 합격! 역시 시험은 전략이 필요하다. 우리에게 합격 전략을 전수해 주셨던 분이 바로 원장님이었다.
KBS 성우공채시험이 현장시험으로 치러질 때는 전국 각지에서 지망생뿐만 아니라 성우가 꿈인 사람들이 모두 모이기 때문에 진풍경이 펼쳐졌다. 학원에 구전으로 내려오는 전설 같은 이야기들에 따르면, 태권도복을 입고 오는 지원자, 부채춤 복장으로 나타나는 지원자, 한겨울에 얼어 죽기 딱 좋게 아주 야하고 끈 달린 나풀거리는 옷을 입고 오는 지원자 등등 기인열전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진귀한 풍경이 펼쳐진다고 한다. 그중에 가장 많은 일화가 술 마시고 시험 보는 일화다. 몇 년씩 공부해도 1차에 합격을 못하던 사람들이 술 마시고 1차 봤다가 덜컥 합격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대부분 2차에서 바로 탈락했다고 하는데... 만나 본 현직 성우님들 중에는 술 마시고 합격했다는 분은 없는 것을 보니 사실인가 보다. 대신 감기에 걸려서 감기약 먹고 비몽사몽간에 시험 봤다가 합격했다는 분도 있고, 감기 걸린 목소리가 더 좋아서 합격했다는 분도 있었다. 나중에 합격시켜 준 PD님이 사기당했다고 농담처럼 말씀하셨다고 한다. 그 시절에는 KBS가 마지막 시험이기도 하고, 현장시험을 보는 탓에 일 년간 얼마나 공부를 열심히 했는가 평가받는 기말고사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유종의 미를 거두려는 치열한 노력과 올해는 기필코 합격하리라는 간절함이 충만한 현장 분위기 였다.
필자가 직접 목격한 내용을 추억해 본다. 기억이 조금 뒤죽박죽 이기는 한데, 2013년도에 학원을 다니며 성우지망생 생활을 시작했고, 5년간 학원을 다니면서 KBS 성우공채시험을 봤다. 2017년도 마지막 시험은 앞에서 고백했듯이 포기했으니까 총 4번의 시험을 봤다. 첫 번째 시험은 아무것도 모르고 쳤고 앞서 말한 대로 떨지 않고 끝까지 하고 나온 것에 의의를 두고 스스로 대견해하며 마쳤다.
다음 해 두 번째 시험에서는 2번째 순서에 걸렸다. 복도에서 시험문제를 받아 들고 5분간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첫 번째 지원자가 한마디도 안 하고, 목소리도 안 내고 가만히 대사만 몇 번 훑어보더니 문제를 덮고 명상을 하는 건지 눈을 감고 가만히 앉아 있는 거다. 어려 보였는데 얼굴도 잘생기고 뭔가 달라 보였다. ‘우와 엄청난 내공의 소유자 인가보다. 연극 영화과 재학생인가? 어떻게 하는지 잘 보고 배워야겠다.’라고 잠시 딴생각에 빠져있다가 얼른 나도 준비를 해야 했기에 정신 차리고 문제를 살폈다. 작년에야 아무것도 몰랐지만 이번에는 조금 공부해서 그런지 연기문제는 하나같이 다 어려워 보였다. 긴장해서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중간에 잘리지는 말자는 생각에 소설 도입부로 생각되는 해설 문제를 연습했다. 5분간 연습이 끝나면 문제를 다시 걷어간다. 그리고 스튜디오에 들어가면 문제지가 마이크 앞에 있는데 이것으로 시험을 보게 된다. 이제 조금 안다고 이번에는 유난히 떨렸다. 드디어 첫 번째 지원자가 시험을 위해 마이크 앞에 섰다. 당당한 모습에 어떻게 할지 궁금하여 귀를 쫑긋했다. 목소리가 엄청 궁금했는데 기대만큼 발성이나 발음이 훌륭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일반인 같은 느낌이 강했다. 인사가 끝나고 연기를 시작하기 위해 흠흠 목을 풀더니 연기를 시작했다. 1번 문제를 선택했는데 청소년이 화자인 대사였다. 첫 번째 지원자의 나이대와도 잘 맞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연기는 필자의 입이 딱 벌어지게 만들었다. 이 친구 어디서 뭘 어떻게 듣고 온 건지는 몰라도 성우를 애니메이션 더빙하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왔는지 갑자기 5살 아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잘하는 것도 아니고 뭐라고 하는지도 모르겠고 묘사하면 ‘우쭈쭈~ 우쭈쭈쭈~’ 거리며 옹알이를 하고 있었다. 기가 막혔다. ‘재 뭐지? 장난치나?‘ 돌아이였다. 심사자들도 순간적으로 놀라서 지원자를 쳐다봤다. 다음 순서로 대기하고 있는 나랑도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친 순간 심장 박동수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어이도 없고 긴장도 되고 앞 지원자의 여운이 가시지 않았다. 필자의 순서가 되어 인사는 무사히 마쳤다. 심사자들의 눈치를 슬쩍 보니 살짝 관심 있어하는 것 같다. 그런데 긴장되고 떨리는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멋지게 해설을 해야 하는데 앞의 놀랐던 여운이 가시지 않아서 숨은 가빠지고 목소리는 둥둥 뜨고 난리가 났다. 버벅거리기까지 결국 중간에 잘렸다. 그때 우쭈쭈 했던 그분 지금은 어디에서 잘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세 번째 시험에는 작년 시험에서 너무 떨어서 청심환을 준비했다. 한병 다 먹으면 안 좋다고 해서 아침에 집에서 출발할 때 반 병을 마시고, 현장에 도착해서 대기하면서 나머지를 마셨다. 술 마시고 1차 합격했다는 사람들의 일화를 들었기 때문에 떨지만 않으면 잘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청심환을 처음 먹어 본 나에게 부작용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점점 입 주변에 마비가 오더니, 혀가 굳기 시작했다. 이런 차라리 술을 마실걸... 아침부터 술을 파는 식당도 없었겠지만 때 늦은 후회를 했다. 어쩔 수 없이 또 해설을 했다. 이번에는 끝까지 하기는 했지만 입이 굳고, 혀가 굳으며 완전히 망쳤다. ‘KBS 터가 나랑 안 맞나? 2년째 이게 뭔 일이래?’ 평소에 잘하다가 수능시험 날 컨디션 조절 망치는 수험생 기분이었다. 학원에 와서 선생님께 청심환 먹고 망했다고 하니 그런 지망생이 종종 있다고 하셨다. 필자가 그 ‘종종’ 중에 한 명이 될 줄이야.
어이없이 2년을 날린 뒤, 각오를 다지고 네 번째 시험에 응했다. 이번에는 지난 일 년간 KBS라디오 드라마도 전부 공부했고, 놀러 다니듯 학원을 다니던 방황을 끝내고 정신 차리고 '처음부터 다시'라는 심정으로 공부했다. 4번째 순서였고, 문제도 공부한 데서 나왔다. 조금 긴장하긴 했지만 시험이라는 분위기가 주는 압박을 느낀 정도지 벌벌 떨 정도는 아니었다. 준비가 되어 있으니 떨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연기를 마치자 심사자 들이 잠시 모여서 웅성웅성하더니 하나를 더 해보라고 한다. ‘Yes!!!' 그런데 하고 싶은 것이 아니고 5번을 해보라고 요청했다. 5번이 유일하게 처음 보는 지문이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살짝 떨렸다. 그때 선생님이 해주신 말씀이 떠올랐다. 또 시켰을 때 떨리면 잠시 물 좀 마시고 하겠다고 하며 시간을 벌라고 하신 말씀... 그래서 잠깐 물 좀 마시겠다고 했더니 충분히 시간을 갖고 하라고 하셨다. 우와 주목을 받는 것 같은 기분에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물을 마시며 마음을 진정시키고 대사를 다시 한번 훑었다. 선생님이 해주신 말씀이 또 있는데 만약 진정이 안되면 대사로 얼굴을 가리고 심사자들의 시선을 가리고 하라고 하셨다. 희한하게 선생님의 조언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대사로 얼굴을 가리고 손으로 귀도 막고 독실에 혼자 있다는 기분으로 대사를 했다. 필자는 진짜 합격하는 줄 알았다. 두 번째 연기를 끝내고 이번에는 간단하게 인터뷰를 했다. 나이가 좀 많은데 회사는 얼마나 다녔는지... 회사 다니기 전에 연기는 해봤는지 등등... 뭐야 4년 차에 좋은 기운이 한꺼번에 몰려왔나? 어안이 벙벙해서 뭐라고 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엄청 기대하며 시험을 마쳤다. 학원에 와서도 다들 내 시험 에피소드에 기뻐해줬다. 그런데 결과는 탈락 뭐... 워낙 아침에 시험을 봤고 그 뒤로 훨씬 실력 좋은 분들이 많이 나왔나 보다 생각하며 아쉬움을 달랬다. 비록 떨어졌지만 내년에 조금 더 노력하면 되겠다는 희망으로 올해 기말고사는 'A'의 성적표를 받았지만 내년에는 'A+'을 맞자며 하늘을 날아갈 듯 기뻐했다.
다시 일 년간 준비하며 이번에는 심사자들 앞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고 오리라 각오하고, 눈물 스위치도 장착하고, 감정서랍도 꽉꽉 채워 시험 준비를 했다. 하지만 어이없게 앞에서 밝혔듯이 시험 전날 부모님과 불화가 생기며 감정을 소진해 버리고 시험을 포기했다. 주말 동안 정신 못 차리고 멍하게 있다가 지망생 카페에 들어가 봤는데 난리가 나 있었다. 이번 시험에서 대다수 지원자들이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중간에 잘렸다고 한다. 원로 성우분들도 개인 방송을 통해 이번 시험은 주최 측이 지망생들의 일 년간 농사를 망친 격이라며 주최 측을 비난했다. 지망생들의 증언에 따르면
“안녕하ㅅ~”
“네 됐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이렇게 어이없이 시험이 끝났다고 하는 지망생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뭔가 엄청난 일이 있었다. 그 뒤로 시험이 녹음파일제출로 바뀌었다. 그리고 팬데믹이 오며 시험형식이 이렇게 확정되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녹음파일제출 시험은 당락이 어떻게 결정되는지 더 알 길이 없어서... 그나마 연례행사처럼 KBS시험을 보면서 전의를 다지던 많은 지망생들 및 성우가 꿈인 분들을 허망하게 만들었다. 나이가 지긋하셔서 컴퓨터 작업이 능숙하지 못한 분들이나 전설처럼 내려오는 다양한 기인 지망생들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이제는 ‘그땐 그랬지’가 되어버린 지금은 볼 수 없는 전설의 KBS성우공채시험 일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