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서의식과 발상의 전환
우리는 앞뒤, 위아래, 좌우의 경계가 애매한 시대에 살고 있다. 아니 경계가 애매하다기보다 무너진 세상에 살고 있다. 조금 더 삐딱해지면 적극적으로 무너뜨리는 세상에 살고 있다. 어제는 앞이었다가 오늘은 뒤고, 위였다가 아래가 되고, 왼쪽으로 사라져 오른쪽에서 나타는 매트릭스의 네오가 갇혔던 'Mobil ave'가 생각나기도 한다. 어쩜 우리는 갇혔는지도…
양자역학 이야기 인가?
길을 걷다 보면 폭이 좁은 인도가 꼭 한 두 코스 나온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날 수 있는 좁은 길에 마주 오는 사람이 있으면 난감한 경우가 많다.
- 억지로 어깨를 부딪혀 끼여가며 서로 갈 방향 가다 시비 붙는 경우
- 서로 비스듬히 최대한 몸을 비틀어 지나가는 경우
- 한 사람이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는 경우
- 인도를 벗어나 차도로 내려가는 경우
그 밖에도 무수히 많은 경우의 수가 존재한다. 가정이므로 실제 사건을 목격할 때까지는 모든 경우의 발생 확률은 동일하다. 여기까지는 양자역학 같은 생각이다. 철학적으로 생각해 보면 그럼 가장 이상적인 경우는? 정답은 없다. 그런데 정답을 강요하는 경우는 있다. 대부분 시비 붙는 경우가 그렇다. 그럼 또 수만 가지 정답이 발생한다. 그러면 또 양자역학 같은 생각이 된다.
좌측통행을 하냐, 우측통행을 하냐, 우산(양산)을 접어라, 자전거나 전동휠체어는 인도로 다니면 안 된다...
질서의식은 선량한 민주시민의식의 척도이다. 그런데 이런 질서의식이 각자 저마다의 기준으로 강요된다. 틀리다, 다르다를 넘어서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기준이라고 생각한 것들이 정작 혼란을 초래한다. 그놈의 '해석하기 나름'이라는 귀걸이, 코걸이 이야기다. 이런 오류는 방향성의 부재에 기인한다. 기준이 없다는 얘기다.
같은 목표, 같은 행동을 추구하는 것은 전 우주를 포괄하는 엄청난 시야를 갖지 않으면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하지만 잘못된 방향성은 시비로 끝나지 않는다. 전체주의가 그렇다. 우리는 이미 역사적으로 어떤 재앙이 발생했는지 알고 있다. 체감하지 못했을 뿐. 부작용만을 강조해서 그렇게 보일 수도 있지만, 악화는 양화를 구축한다. 선한 영향력도 중요하지만 개중에 하나의 삐딱한 경우만 발생해도 모래성은 쉽게 무너진다. 모방범죄, 각자도생... 요즘 이슈 되는 키워드가 그 방증이다.
모래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모래알들이 서로 잘 붙어있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없을까?
선거철만 되면 어떤 후보자가 되었든 공약은 대동소이하다. 문제의식이 비슷하다는 얘기다. 그렇게 비스름한 정책을 들고 나와서 오른쪽, 왼쪽 편을 가른다. 필자의 부모님부터 민주주의의 적은 공산주의라고 한다. 민주주의 적은 '왕정'과 '독재'이다. 온갖 기준들이 짬뽕되어 적용되다 보니 저런 일이 발생한다. 기준이 흔들려 버리니 편을 이상하게 가른다. 기준, 즉 뼈대가 있으면 모래성도 쉽게 안 무너진다.
좋아하는 것 VS 싫어하는 것
이게 무슨 편 가르기 기준인가? 싸우자는 거지... 편을 가르는 이유부터가 틀려먹었다. 상호견제 속에 선의의 경쟁으로 발전하자는 것이 올바른 이유이다. 이러려면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위가 아래가 되고, 앞이 뒤도 되고... 더 나아가 위가 오른쪽도 되고, 왼쪽이 앞도 되고… 해야 한다.
기준을 없애야 한다.
이 무슨 헛소리인가 하실 거다. 기준이 없어서 문제라고 해놓고 기준을 없애야 한다니? 앞에서 정확히는 '방향성의 부재, 즉 기준이 없다.'라고 표현했다. 필자가 의도하는 정확한 의미는 경계를 없애자는 의미이다. 그리고 우리는 경계가 애매한 시대에 살고 있다고도 했다.
그럼 좋은 시대에 잘 살고 있는 거네요.
하지만 이 시대를 걱정하는 소리가 어느 때보다 크다. 그리고 실제로 기후위기나 국제정세는 좋은 시대와는 거리가 멀다. 기후위기는 이제 말하기 입 아픈 수준으로 세계 곳곳에서 자연재해가 끊이지 않고 있다. 국제정세도 동북아, 아프리카, 동유럽 등 자연재해가 심하지 않은 곳은 전쟁위기가 고조 혹은 전쟁이 발발했다.
혈액이 역류하면 사람은 죽는다.
그래서 방향성이 필요하다. 어딘가 소외되는 구석 없이 순환이 돼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 사회도 어딘가 구석이 막혀 역류하지 않게, 경계와 구석이 만들어져 혈전이 쌓이지 않게 해야 한다. 그리고 혈액 역류를 방지하기 위해 판막이 있듯이 안전장치도 반드시 필요하다. 꿈을 좇다가 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그런 안전망이…
결국 뻔한 얘기로 구만...
순환을 인생에 적용하면 윤회가 아닐까? 필자는 윤회가 있다면 그냥 무(無)로 돌아가고 싶다고 예전 글에서 피력한 적이 있다. 아이러니하게 희망사항이 있다는 것은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즉 윤회가 있다면 무로 돌아갈 수 없다는 말이다. '나'를 구성하고 있던 물질들은 어디 다른 평행우주로 가는 것이 아니다. 결국에는 지구상 어딘가에는 존재한다. 그중 핵심 물질들이 확률에 의해 언젠가 발현되면 그게 윤회 아니겠는가? 억겁의 시간이 흐르면 결국에는 윤회하는 게 맞다. 그래서 요즘 불교철학, 불교에 대해서 관심이 많이 간다. 윤회라는 것이 결국 경계가 없어지는 상황이다. 우리가 수명이 짧아서 확인 못할 뿐, 돌고 돌아 제자리... 오죽하면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의 경지가 윤회의 고리를 끊고 도달하는 경지라고 할까...
허무주의는 아니다.
돌고 돌아 다시 원점이라는 관점보다는 인간의 원죄에 대한 징벌이 윤회가 아닐까 라는 관점이다. 그럼 결국 이 난국을 헤쳐나갈 방법은 해탈하는 거다. 해탈의 길을 먼저 가신 선배님이 계시다. 석가모니의 길을 따라가 볼까 한다. 출가하겠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일단 매트릭스 전편을 정주행 한번 해보고... 윤회에 대해서 양자역학과 함께 깊이 생각해보려고 한다.
과연 그럴까? 진짜일까?
결국 이 글도 뫼비우스의 띠 같이 돌고 있다. 모든 것은 윤회하고 있다? 아무도 모른다. 석가모니의 해탈은 제자들이 말씀을 전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말씀에서 힌트를 얻어 추론할 뿐이다. 다만 한 가지 필자가 깨달은 것은 윤회는 '나'를 중심으로 생각한 개념이다. 내가 혹은 내가 아는 사람이 먼 훗날에 다시 태어나냐 아니냐를 판단한다는 말이다. 결국 윤회는 '나'를 기준으로 생각해서 발생했다고 할 수 있고, 인간의 원죄에 대한 징벌인 윤회를 없애려면, '나'에서 벗어나 세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된다. 착한 일을 얼마나 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나'에서... 즉, 욕망에서 벗어나 얼마나 세상을 객관적으로 보느냐가 해탈의 경지에 이르는 길 중에 하나가 아닐까?
모든 것을 품는다.
세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본다는 뜻은 '타인의 시선으로 나를 본다' 즉, 3자의 입장에서 관망한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전 우주를 포괄하는 엄청난 시야를 갖고 방향성과 기준을 정한다는 뜻일 것이다.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 곤충, 식물... 뿐만 아니라 지구, 달, 태양계, 은하계... 전 우주를 포괄하는 시야.
그럼 그게 목표가 되겠네... 어떡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