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 빤다'

선량한 단어의 조합이 불량하게 느껴질 때

by 철없는박영감
신조어에 새로운 트렌드가 나타났다.


한동안 줄임말과 자음만 쓴 단어로 정신을 쏙 빼놓더니 익숙해질 만하니까 강한 표현이라며 접두사로 '개~'를 붙여 천박하게 변형시키다가 언제부턴가 자칭 '힙(Hip)'하다는 신조어가 출현하기 시작했다. '킹받다=열받다', '찢었다=굉장하다', '퇴사(퇴근) 마렵다=퇴사(퇴근) 하고 싶다', '그 잡채=그 자체', "미쳤다=매우 좋다". (미안하지만 필자가 알 정도면 이미 신조어의 범주는 벗어났다.)


유튜브나 브런치를 포함한 여러 블로그에서 이런 단어들이 들리고 보이면 '그런가 보다~'하고 애교정도로 넘기기도 하고, 나름 이해하려고 애쓰기도 했다. 그리고 신세대에게 어필하기 위한 글을 쓸 때는 일부러 골라서 쓰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적응이 안 되는 신조어가 하나 있다. '꿀 빤다' 다른 신조어들은 글로 보건, 말로 듣던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꿀 빤다'는 기분이 나빠졌다. 유튜버들이 방송에서 하는 말을 듣고 나서 생겨버린 악감정 때문인지 이제는 글로도 보기 싫어졌다. 왜 그럴까?


군대에서 흔히 쓰는 말로 '편히 쉬고 있다'는 뜻


'벌과 나비가 꿀을 채집하는 행위'가 얼마나 힘들고 고된 작업인지 알고 있나를 따지려는 것이 아니다. 처음엔 꿀 같은 달콤한 휴식을 재미있게 표현하려는 의도였겠지만, 지금은 이기주의적 행태를 꼬집는 뉘앙스로 바뀌었다. '빤다'라는 동사가 해충의 대명사인 모기가 '피를 빤다'를 연상시키고, '어부지리로 이득을 보려는 못된 심보'를 뜻했던 신조어 표현 '빨대를 꽂다'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꽃 속의 진액인 꿀을 아무 노력 없이 취하는 이기주의가 잔뜩 묻어있음을 비꼬는 표현으로 많이 쓰인다. 그런 뉘앙스를 반복적으로 접하다 보니 악감정이 생겼다.


곰은 벌에 쏘이는 것에 상관치 않고 벌집의 꿀을 훔친다. 그 모습은 딱 '꿀 빤다'로 묘사된다. 그래서 '무임승차, 가로채기'의 뉘앙스까지 추가됐다. 이제는 '꿀 빤다'라는 표현을 접하면 '식탐, 탐식, 욕심'이 떠오른다. 일이 진행되는 고된 과정에는 빠졌다가 다 해결되면 갑자기 나타나 힘으로 혹은 무신경함으로 이득만 쏙 골라 취하는 곰의 이미지가 겹쳐지며 '빤다'라는 동사 하나로 꿀을 먹는 동작이 불량해졌다. 그 뒤로 '개~'가 붙으면서 '개꿀'이라고 하면 선량하던 '꿀'이 사행성의 부정적인 뉘앙스로 바뀐다. 이쯤 되면 백성의 고혈을 빼먹는 탐관오리, 심하게 생각하면 소시오패스도 떠오른다.


단순히 재밌자는 말에 너무 지나친 거 아닌가?


과잉반응일 수도 있다. 신조어에 대한 우려와 걱정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다. 반면 또래문화, 개성표현, 누군가는 창조적 파괴(경제학 용어이기는 하지만 기술발전에 적응해 간다는 개념은 일맥상통하지 않을까?)까지 언급하며 언어가 살아있다는 증거라고 권장하는 학자도 있다. '신세대 용어, 신조어'라며 기성세대들에게, 모르면 시대에 뒤처진 뒷방 늙은이라는 인식이 들 수 있는 퀴즈형식의 프로그램도 많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많을 예정이다. 하지만 안 그래도 불량함이 넘쳐나는 세상에 굳이 선량한 단어들까지 불량하게 만드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방송에서 조차 '삐'소리면 욕을 해도 된다는 기적의 논리가 일상의 논리가 되어버리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꿀 빨다'의 'ㄲ', 'ㅃ'이 주는 된소리의 자극이 쌍자음으로 된 욕과 같은 수준이라고 하면 과잉반응일까?


재미있으면 된다는 '재미지상주의'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무한도전 시절부터 사람들의 머릿속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나만 아니면 돼'라는 생각은 고문에 준하는 온갖 가학적인 오락거리를 낳았다. 그리고 그 광경을 화면으로 지켜보며 폭소를 터트렸고 그렇게 '재미'로 포장되어 아무 저항 없이 왕좌에 올랐다. 이런 경향은 개인방송이 대세가 되며 더 맹위를 떨쳤다. 이제 사람들은 웬만한 자극에는 눈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이렇게 더 강하고 새로운 자극을 계속 낳으며 점점 더 위세가 당당해졌다. 이제는 너도나도 꿀만 빨려고 하고 존중과 배려를 외치면 유난 떤다며 도리어 괴롭힘을 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희생은 돈 받은 만큼만 하는 것이 되었다.


교향곡에서 완벽한 화음들의 홍수 속에 찰나의 불협화음은 일탈의 자유라는 큰 감동을 준다. 하지만 불협화음으로만 채워진 음악은 소음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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