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려오는 길,

파전, 막걸리 못 먹으면 도토리묵, 동동주 먹으면 되지...

by 철없는박영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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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을 좋아하진 않지만, 단풍구경은 하고 싶어서 내장산을 찾았다. 한 번 신고 처박아 둬도 될 만큼 저렴한 등산화와 등산스틱을 준비해서 설렁설렁 다녀올 요량으로 출발했다. 다른 국립공원처럼 초입에 절(寺)이 있었다. 그리고 옆으로 완만하고 평평하게 잘 정리된 길이 나있었다. 따라 걷다 보니 이내 이정표가 나오고 본격적으로 코스가 나뉘는 갈래 길이 나왔다. 단풍구경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이정표나 코스를 자세히 보지 않았다. 경치 좋고, 경사가 없고, 사람들이 많이 향하는 길로 따라갔다. 울긋불긋 예쁜 단풍에 눈을 반짝이며 연신 셔터를 눌렀다. 그리고 단풍이 익숙해질 즈음 '아! 공기 좋다'라고 혼잣말을 하며 산림욕을 즐기면서 계속 천천히 걸었다.


걷다 보니 처음으로 경사가 가파른 언덕이 나왔다. 조금 숨이 찼지만 철제 계단이 잘 설치돼 있어서 큰 무리 없이 오를 수 있었다. 언덕을 오르니 공기가 더 좋아졌다. 그리고 옆으로는 맑은 계곡물이 흐르고 있었다. 잠시 후, 파전과 막걸리를 파는 식당들이 줄지어 있었다. 등산을 조금 더해서 허기진 상태로 내려오면 더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맛있는 냄새를 뒤로하고 조금 더 올라가기로 했다. 산을 오를수록 파란 하늘과 단풍 그리고 나무들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더욱 멋진 풍경을 선사했다. 등에 땀이 나기 시작했고, 겉옷을 벗어 허리춤에 묶었다. 숨이 차고 허벅지가 땅기기 시작했지만 등산스틱에 의지해서 천천히 걸으니 계속 오를만했다. 중간중간 계속 경사구간이 나왔지만 다시 평지가 나오면 쌩하니 신나게 걸을 수 있어서 등산의 묘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여기서부터 단풍놀이는 잊혔다.


처음보다 사람이 좀 줄었지만 내 앞으로도 사람이 있었고 따라오는 사람도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지만 같은 길을 간다는 묘한 동지애에 힘이 났다. '이제부터는 운동이고 다이어트다'라고 생각하며 지치지 않게 중간에 쉬어가며 계속 걸었다. 겉옷뿐만 아니라 남방까지 벗어서 이제는 티셔츠 차림이다. 티셔츠도 땀으로 흥건하다. 모자도 벗고 싶었지만 햇볕에 얼굴이 그을릴까 걱정도 됐고 모자를 들고 다니는 것이 더 귀찮을 것 같아서 그냥 내버려 뒀다. 하지만 이내 챙을 뒤로 돌려 거꾸로 썼고, 햇빛은 안중에도 없었다. 오직 오르겠다는 목표의식만 남았다.


길이 점점 좁아지다가 조금 전까지 푹신했던 오솔길 대신 가파른 경사의 계단이 나타났다. 정확히 말하면 계단처럼 놓인 바위들이 나타났다. 이쯤에서 그냥 내려갈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조금만 더 가면 정상이 나올 것 같았다. 여기까지 올라온 것이 아까워서 계속 전진했다. 이 지점부터 주위 풍경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볼 수가 없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앞사람의 뒤꿈치와 다음에 디뎌야 할 바위계단이 전부였다. 어느 순간부터는 등산스틱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마지막에는 네 발로 기어올랐다. 이 구간부터 사람 수는 현저히 줄어들었다. 나도 자신과의 싸움을 시작했다. 힘겹게 바위계단을 오르다가 숨이 턱까지 차면 옆으로 잠시 비켜 주저앉기를 반복했다. 비켜 있는 동안 높은 곳에서 보는 경치는 점점 전지전능해지는 착각이 들게 했다. 그래서 정상이 더 궁금해졌다. 네 발로 기어 꾸역꾸역 오르고 또 오르다 보니 드디어 정상에 도착했다.


정상은 생각보다 좁았고 경치도 올라오면서 본 것과 다를 게 없었다. 단지 이곳이 정상임을 알려주는 바위비석이 있을 뿐이었다. 뭔가 특별한 것을 기대했지만 그런 것은 없었다. 사실 무엇을 기대했는지도 잘 모르겠다. 정상에 도착했다는 성취감? 도시가 장난감처럼 보이는 우월감? 숨을 고르고 쉬면서 나는 그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정상에 있는 소수의 사람들은 내공이 있어 보였다. 군살 없이 탄탄한 몸매, 까무잡잡하지만 하얀 이가 드러나는 자신 있는 미소, 허리춤에 손을 얹고 절벽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용기. 삼삼오오 모여서 도시락을 먹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평온한 표정이었고, 여유가 있었다. 정상을 찍었으니 이제 내려갈 일만 남은 사람들. 앞으로 남은 길은 지금까지 보다 더 높은 곳이 없는 사람들. 그리고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의지로, 스스로 컨트롤할 수 있는 사람들 같았다. 같은 곳에 있는 나도 비슷한 부류의 노블레스가 된 것 같았다.


내려오는 길은 숨이 차거나, 기어가야 하거나, 땀범벅이 되는 힘듦은 없었다. 다만 중심을 잡고 흔들리지 않아야 했다. 그러면 무난하게 내려올 수 있었다. 정상을 향해 열심히 오르고 있는 사람들에게 조금만 더 가면 되니 힘내라고 응원해 주는 여유도 생겼다. 올라올 때 앞사람 뒤꿈치밖에 안 보이던 가파른 경사가 눈 아래로 펼쳐질 때는 조금 아찔하기도 했다. 하지만 집중해서 균형을 잘 잡으며 무사히 통과했다. 능선을 따라 하산하는 길에는 새소리도 들을 수 있었고, 요리조리 깡충깡충 뛰어가는 다람쥐도 만날 수 있었다. 올라갈 때 몰랐던 주변의 작은 변화와 움직임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를 때의 힘듦을 추억하며 파전과 막걸리를 더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등산의 기억은 인생의 기억과 많이 닮아 있었다. 부모님이 잘 닦아주신 평평한 길을 따라 학교를 마치고, 인생이 어떤 코스로 흘러갈지 모르는 상태로 갈래 길을 맞닥뜨렸다. 친구들을 따라 유행하는 공무원 준비를 시작했지만 공부는 하는 둥 마는 둥 단풍놀이 하듯 허송세월을 보냈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주변사람들의 도움으로 운 좋게도 대기업에 취직할 수 있었다. 나중에 파전을 더 맛있게 먹어야지라고 생각한 것처럼 나중에 임원도 되고, 사장도 돼야지라고 생각하며 열정적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낯선 멤버들과 팀원이 되어 호흡을 맞춰 프로젝트도 진행하고, 팀장이 되어 팀원들을 이끌며 목표달성을 위해 바위계단을 오르기도 했다. 작은 성공에 도취되어 '나 아니면 안 돼!'라는 오만함에 빠지기도 했다.


지금은 내려오는 길에 서있다. 정상에 도착하지는 못했다. 오르는 길이 너무 힘들고, 숨차서 이쯤에서 내려오기로 했다. 그렇게 14년간 올랐던 길을 천천히 6개월 정도 내려왔다. 과거의 일들이 떠오를 때면, 내리막 경사에 섰을 때처럼 아찔하기도 했다. 경제적 상황도 나빠지고 있다. 파전과 막걸리를 맛있게 먹지는 못할 것 같다. 어쩌면 못 먹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려오는 길의 작은 변화와 움직임을 발견하고 있다. 그렇게 중심을 잘 잡고 잔잔한 일상 속에서 울림을 발견하며 살고 있다. 그리고 다른 산을 오를 준비를 하고 있다. 어쩌면 아직도 올라가는 중에 잠깐 만난 내리막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번에는 케이블카도 타고, 도토리묵과 동동주도 먹어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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