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골브레이커 연대기 (1991년)

금수저는 아니지만, 내 인생은 충분히 황금빛으로 채워져 있다. (5)

by 철없는박영감
FANTASY


여태껏 살아오면서 부러움의 대상이 됐던 적이 별로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서운하고 괴로웠던 기억에 먹혔을 뿐... 차분히 돌이켜보니, 진흙 속의 진주 같은 행복하고 즐거웠던 추억이 아주 많았다. 특히 유년시절에... 어쩌면 그런 추억들을 어른인 척, 성인군자인 척한다고 현학(衒學)에 빠져, 허영이나 사치 같은 부정적인 표현에 제물로 바치며 인생을 낭비하지 않았나 후회하기도 한다. 부모님의 추억까지 같이 싸잡아서...


자식들이 책상 앞에 앉아 뭔가를 열심히, 특히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으면 뭐 하나라도 더 도와줄 게 없을까 고민하는 게 부모의 마음이다. TV 속 드라마처럼 과일을 예쁘게 깎아서 접시에 담아 음료수와 함께 쟁반에 받쳐 책상 옆에 놔주며 '너무 무리하지 마'라는 대사를 친다던가... 엄마 몰래 밖으로 불러내 분식집에서 떡볶이를 사주며 지갑에서 용돈 턱 꺼내준다던가... 어쩌면 이런 게 그때 그 시절 부모님들의 판타지 아니었을까?


초등학생이 공부 잘해봐야 뭐 얼마나 잘한다고... 어렸을 때 공부 좀 한다고 엄청 유세를 떨었더랬다. 흔히 그러듯... 점수를 가지고 부모님과 거래를 하기도 했다. '100점 맞으면 OO 해줘' 같은... 나중에 커서는 '너 좋으라고 공부하라는 거지, 나 좋으라고 공부하라는 거냐?'라는 절세의 신공을 터득한 부모님께 절대 이길 수 없었지만 초등학교 까지는 그래도 먹혔다. 그리고 1991년 초 6학년 때, 꿈에도 그리던 미니카세트를 얻었다.


https://youtu.be/0W0jJb3LrQo?si=IF5G-MLCtHSK8INW


팔자에도 없는 첫 경험


미니카세트를 사준다고, 부모님은 난생처음 '신용카드'라는 것을 만들었다. 그리고 대우전자 대리점에서 개시했다. 아들내미 덕분에 팔자에도 없는 신용카드를 다 써본다며 이상한 표정을 지었던 부모님 모습이 생각난다. 카드를 긁는다는 말이 실감 나던 전표 밑으로 카드를 넣고 볼펜으로 긁어서 탁본을 뜨던 시절이다. 요즘은 무이자 할부가 보통이지만, 그때는 연회비도, 할부로 이자를 갚는 것도 낭비라고 생각하던 시절이다.


학교에 이어폰을 꽂고 나타난 모습에 곧바로 친구들의 관심 대상 1호가 되었다. 형, 누나가 있는 친구들은 집에서 몇 번 보기는 했지만, 그들의 재산목록 1호였던 미니카세트를 잘못 만졌다가는 사달이 났었다. 거의 한 달 넘게 그 미니카세트는 우리 반의 공공재가 됐었다. 내장 스피커가 있어서 이어폰이 없어도 들을 수 있었고, 라디오는 기본, 녹음 기능에, 이어폰에 달린 리모컨 기능도 있었다.


엄청 획기적이었던 기능은 오토리버스였다. 이때가 오토리버스 기능 초창기였는데... 아날로그 방식의 테이프는 되감기, 앞으로 감기, 그리고 한쪽 면이 끝나면 꺼내서 뒤집어 줘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테이프 A면이 끝나면 자동으로 역방향으로 돌아가며 B면이 재생되는 기술력에 우리 반 친구들은 세상 좋아졌다면 둘러 모여 탄식을 내뱉었었다. 꼬맹이들이 세상을 살면 얼마나 살았다고...


AUTO REVERSE


요즘의 생활은 마치 그때의 미니카세트 같다. A면을 전부 재생하고 오토리버스로 B면이 재생되는 삶 같다. A면 못지않은 아름다운 B면을 재생하고 싶지만... 뜻대로 될지는 모르겠다. 타이틀 곡과 히트 곡으로 채워져 있는 A면은 화려하고 현란하지만 힘이 많이 들어가 있는 느낌이었다면, B면은 좀 힘이 빠졌지만 편안하고 평화롭고 여백이 많은 느낌이다. 어쩌면 타이틀 곡의 Instrumental Track이 실려있을지도...


부모님은 '네가 행복하면 된다'라고 말씀하시지만, 점점 능력 없어지고 초라해지는 겉모습에 걱정을 많이 하신다. 아마 입신양명해서 세상을 호령하는 '내 자식'에 대한 판타지가 남아있는 것 같다. 그러데 걱정 마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걱정마세요. 지금이 인생에서 최고로 행복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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