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골브레이커 연대기 (2008년)

금수저는 아니지만, 내 인생은 충분히 황금빛으로 채워져 있다. (9)

by 철없는박영감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종착역에 다 와 가고 있었다. 선로를 따라 정해진 코스를 달리는 기차처럼 흐르던 인생이, 앞으로는 스스로 갈 길을 개척해야 하는 인생으로 바뀌고 있었다. 철부지로 가볍게 살아왔던 인생에 갑자기 무게가 느껴졌다. 기찻길을 연장하고 싶어서 시작했던 공무원 시험은 결국 휴학기간을 다 채우고도 성공하지 못했다. 간절한 동기 없이 그저 편하게 살고 싶어서 선택한 길은 나를 밀어내고 받아들여 주지 않은 채 안갯속으로 사라졌다.


그렇게 대학 4년, 군대 3년, 휴학 3년을 꽉 채워 대학생 신분만 10년을 유지하고 나서, 경력 없이 갈 수 있는 직장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학교 타이틀 덕분에 지원한 회사마다 어떻게 어떻게 최종면접까지는 갈 수 있었지만, 도마 위에 올려진 고기처럼 나의 됨됨이는 면접장에서 금세 까발려졌다. 결국 늙은 사회 초년생은 제약회사영업사원이 되었다. 360도 열려있던 가능성을 스스로 닫아버린 나를 받아주는 회사는 그곳이 유일했다.


처음 6개월은 공시생 생활 같았다. 새벽 5시에 지하철로 출근해서, 버스와 택시를 타고 여기저기 열심히 얼굴을 내밀고 다녔다. 하지만 처음 보는 사람이, 영업사원이랍시고 '우리 회사 약 좀 처방해 주세요'라고 한다고 해서 '오냐 그러마'하고 바로 써주는 의사는 아무도 없었다. 내가 그 입장이어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문전박대당하는 것이 일이었다.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이었다. 어마어마한 제작비가 들어간 그 영화는 제대로 망했다. 나도 그랬다.


참! 이놈의 인기란...


그래도 전혀 성과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면접관에게 금세 까발려져, 별것 아닌 것으로 치부됐던 됨됨이는 장을 담그듯 오랜 시간 숙성시키야 빛을 발하는 됨됨이였나 보다. 점점 문전박대 횟수가 줄어들었고... '오늘은 네가 뭘 하나 보자'라는 속셈이 있는 듯, 진료실로 들여는 보내 주는 원장님들이(영업사원들은 원장님이라고 부른다) 하나 둘 늘어났다. 물론 특별한 대꾸는 없었다. 그리고 여전히 전국 꼴찌의 영업사원이었다.


1년 정도 지나고 전략을 바꿨다. 직접 보지 않고 돈 주고 사기는 아깝지만 있으면 좋은 아이템들을 마련해서 원장님께 전해달라고 간호사 선생님들에게 부탁했다. 다녀보니 원장님들은 생각보다 소박하고 작은 이벤트에 즐거워했다. 이때 즘엔 넉살도 좋아져서 간호사 선생님들이나 약사님들에 간식을 사다 나르며 친해지고 있었다. 그러자 평판이라는 것이 생겼다. 특별한 것은 없어도 매일 그렇게 다니니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영업사원의 삶은, 대부분의 삶이 그렇겠지만, 연예인의 삶 같았다. 인기가 있어야 했다. 전략은 잘 먹혔고, 슬슬 병원마다 한가한 시간이 눈에 들어왔다. 일부 간호사선생님들은 지금 오라며 전화를 주기도 했다. 그렇게 원장님들이 영업사원을 만나기 좋은 시간을 알아내서 전략적으로 다녔다. 요령이 생겼다고 할까... 몸은 점점 편해지고 대신 머리는 복잡해졌다. 그렇지만 싫지는 않았다. 다만 회사에서는 여전히 실적이 안 오른다고 엄청 깨졌다. 하지만 감수했다. 원장님들이 마음이 열릴 때가 오기를 기다리며...


업보


처음 영업 구역을 할당받은 바운더리는 거의 방치된 구역이었다. 담당자가 없었고 지점장 급들이 어쩔 수 없이 다니면서 지점 내에 실적이 부족한 영업사원들에게 실적을 채워주는 용도로 사용되고 있었다. 영업사원들은 근속연수가 매우 짧았다. 그래서 하루가 멀다 하고 사람도 자주 바뀌고, 별다른 영업활동이 없었기 때문인지 이 구역은 실적이 점점 나빠지는 악순환에 빠져있었다.


지금이야 시간이 지나서 이렇게 말할 수 있지만, 사회초년생 신입사원 때는 정말 너무나 막막했다. 다닌 지 일주일도 안 됐는데 뭐 하고 다니냐고 팀장들은 매일같이 호통치지, 월말 실적이 집계되어 나올 때면, 멱살만 안 잡혔지 이미 눈으로는 살인도 저질렀을 살벌한 눈빛을 쏘아댔다. 선배들은 자기들끼리 좋은 구역은 이미 다 나눠가지고, 이런 개똥 같은 구역을 떠안기 고서는 똑같이 실적을 내라고 하니 억울하고, 답답하고, 원망스러웠다. 탈출구도 없었고 그냥 버텨야 했다. 전부 등골브레이커로 살아온 업보 같았다.


그러다가 한 줄기 희망이 비치기 시작했다. 앞의 전략이 슬슬 효과를 발휘하며 찾는 원장님들이 생겼다. 물론 이런저런 잡일이나 심부름을 부탁하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기뻤다. 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오고 있음을 느끼 듯 희망이 생겼다. 점점 거의 집사가 되어가고 있었다. 원장님들의 생일은 물론, 가족들의 경조사에도 초대되었고, 나중에는 점심을 같이 먹자고 부르기도 하고, 저녁을 따로 사주시는 분들도 있었다. 그리고 한 가지 공통적인 지적을 받았다.


급(級)


'위트와 유머가 부족하고, 패션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지적이었다. 정확하게는 '나랑 대화하는데 옷을 이렇게 구리게 입고 다녀서야 쓰겠냐?'정도의 지적이었다. 위트야 원래 낯가림이 심한 극 내향성이다 보니 그런 것이고 조금 더 친해지면 될 일이었다. '패션'... 이게 문제였다. 자존심이 확 상했다. 어디 가서 옷 못 입다는 소리는 난생처음 들어봤다.


'진짜? 내가 패션 테러리스트라고? 물론 명품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베이식 검은색 정장에... 최신 유행이던 은갈치 정장까지... 넥타이도 품격 있게 아버지가 쓰시던 수제품들을 메고 다녔는데... 구리다고?'


다시 한번 등골브레이커의 기질이 되살아났다. 엄마에게 사실대로 말하고 백화점에 같이 가자고 했다. 그리고 그때까지 상상도 못 하던 세계에 발을 들였다. 태어나서 10만 원이 넘는 와이셔츠를 처음 사봤는데, 그것을 무려 10장 가까이 샀다. 정장도 STCO나 마트에서 싸게 사던 것을 백화점에서 백만 원을 호가하는 것으로 몇 벌 장만했다. 그때 매일 정장 입는 사람은, 바짓가랑이가 잘 헤어져서 두벌을 해야 한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꼴랑 쥐꼬리 만한 월급을 갖다주고 몇 배에 달하는 돈을 부모님 찬스로 백화점에서 하루아침에 썼다. 명품 시계도 샀다.


등골브레이커의 재림


누가 시키는 것이나, 지적하는 것은 고치고 해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다 보니... 귀가 얇은 것은 아닌데... 자존심이 너무 쌨던 것 같다. 하여튼 원장님들이 같이 대화하기 부끄러워하는 점이 있으면 바로바로 고쳤다. 늘 돼지고기, 닭고기만 먹던 입맛은 소고기의 맛을 알아버렸고, 호텔 뷔페, 교외의 가든 맛집, 그리고 룸살롱, 골프 등등 점점 배보다 배꼽이 커지고 있었다. 다행히 실적도 같이 좋아지고 있었다.


어느 날, 지점장이 점심을 같이 먹자며 찾아왔다. 식사를 마치고 같이 병원을 몇 군데 돌고 나서 나의 평판을 확인하자 슬쩍 자가용 얘기를 꺼냈다. 나중에 알았는데... 회사에서 직원들이 금방 그만두고 나갈까 봐 쓰는 계략 중에 하나가, 집이나 자가용 같이 뭔가 큰 것을 지르게 해서 발목을 잡는 것이었다. 아마 그때 덜컥 외제차나 대형차를 뽑았다면 못 헤어 나왔을 것이다.


그래도 점점 차의 필요성이 커지던 때라서 마지막 등골브레이커로 아버지 명의로 차를 한대 뽑았다. 물론 쥐꼬리만 한 월급을 갖다 바치면서... 부모님은 완전 적자였다. 그렇게 슴삼이(SM3)는 2008년 내 곁으로 와주었다. 마지막 등골브레이커로 16년을 동고동록하며 같이 달려주고 있다.


어느 날 엄마가 이모와 통화하는 것을 우연히 들었다.


"차 사달란다고...? 아들놈들은 클수록 해달라는 스케일이 달라지더라... 나중에는 진짜 집까지 해달라고 하겠어.... 네 아들도 그렇니? 내 아들도 그렇던데..."


그래도 해줄 수 있는 게 행복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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