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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저는 아니지만, 내 인생은 충분히 황금빛으로 채워져 있다. (마지막)

by 철없는박영감
Brrrrr!


"어우! 아들! 우짠 일이고...!"


언제인지 기억도 잘 안나는 오래전, 조금 힘든 일로 괴로워하고 있을 때, 아버지와 통화를 할 일이 생겼다. 그런데 연세가 들어 호르몬이 장난을 친 건지, 이제는 고향에서 산 날보다 타향에서 산 날이 두 배를 넘어가는 무뚝뚝한 경상도 사나이를 자처하는 아버지가 전화를 받자마자 '아들~'하면서 살갑게 받았다. 힘든 것과 상관없이 다른 용무로 전화를 한 건데... '아들~' 소리에... 순간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꾹 참고 통화를 마치면서,


"아부지~ 전화 '아들~'하고 받아주니까 좋네? 기분 좋아졌어요..."


그 뒤로 아버지는 매번 '아들~'하고 전화를 받는다. 이제는 창피해하지도, 어색해하지도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모습이다. 뭐~ 아직 본인 할 말만 하고 '뚝' 끊는 건 여전하지만... 이것 때문에 가끔 잔소리를 하면 보청기를 껴서 귀가 잘 안 들린다는 핑계를 댄다. 하지만 아버지 흉 좀 본다고 엄마랑 소곤대는 것은 귀신같이 잘 듣는다. 선택적 난청이라는 게 있는 건가?


소원을 말해봐!


몇 년 전 아버지 팔순 때였다. 코로나 시국이라서 잔치도 못하고, 집합 자체가 금지되어서 가족끼리 저녁식사도 할 수 없었다. 전화를 걸었다.


"어우! 아들! 우짠 일이고...!"


"아부지, 팔순이네요... 잔치도 못하고, 얼굴도 못 보고... 죄송해서 전화드렸어요. 대신 소원 한 가지 들어드릴게요... 제가 할 수 있는 걸로... '결혼해라, 손주 안겨달라' 이런 건 안 돼요!"


"알았다. 그럼 난 '아버지'말고 '아빠'라고 불러줬으면 좋겠는데..."


"예...? 예...!"


사실 지금까지도 '아버지', 이 세 글자로 정확히 또박또박 부르는 게 영 어색해서, '아부지'라고 살짝 변형해서 부르고 있었다.


"난 '아버지'보다 '아빠'가 더 듣기 좋더라..."


"아부지, 그거야 변성기 지나기 전에 아기들이 귀엽게 '아빠, 아빠' 하면 좋은 거지 늙수그레한 아들이... 이제 수염도 흰 수염이 나는 아저씨가 '아빠, 아빠'하면 징그럽다 못해 우웩이에요... 다른 건 안될까요?"


"싫어! 난 '아빠'가 좋아!"


'아버지'도 어색하고, '아빠'는 징그럽고... 가끔 사촌 형들이, 자기 아들이 고등학생이 다 됐는데도, 큰아버지한테 '아빠, 아빠'하는 것을 보고 속으로 욕했는데... '이게 이런 사정이 있었구나~!'


아... 아... 아... 아부지!


아직까지 소원을 못 들어드리고 있다. 영 어색해서... 닭살 돋다가 닭 될 것 같아서... 도저히 입에서 안 떨어진다. 어제는 크리스마스에 눈까지 내려서 옛날 기분 내자고 동네 돈가스 집에 가서 외식을 했다. 아기 때 양쪽으로 부모님 손 꼭 붙잡고 눈길을 걸었던 추억을 떠올리자며 그렇게 대형을 맞춰 섰는데... 이제는 두 분 미끄러질까 봐 부축해 주는 기둥 형세가 되었다.


레스토랑에 오랜만에 셋이 앉아있으니, 마치 영화 속 과거 회상씬처럼, 나는 어려지고 부모님은 젊어진 느낌이 들었다. '돈까스 잘라 주세요'라며 포크로 접시를 땅땅 치기도 하고(물론 욕먹었다), 옆 접시에서 훔쳐 먹기도 했다(니 거 먹으라며 아버지는 살짝 삐졌다). 그렇게 잠깐 즐겁다가, 예전이면 왕돈가스 2개는 거뜬히 먹었을 식성이 이제는 1/3도 못 먹고 배부르다며 포크를 내려놓는 모습에 다시 현실로 돌아오게 됐다.


식사를 하면서 전화통화 생각이 나서, 왜 '아빠'가 좋으냐고 물어봤다. 그냥 '아빠'소리가 다시 듣고 싶다고 했다. 이제 누가 나한테 '아빠'라고 해주겠냐고 아련한 눈빛이 되었다. 그래서 요즘 댓글로 응원도 많이 받았겠다. 불쑥 '아빠!'라고 해봤다. 일단 엄마가 깜짝 놀라며 눈총을 줬다. 다 키워놨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돌아간다면 끔찍하단다. 아버지도 막상 아저씨 목소리로 '아빠'하니까 듣기 싫었는지 한마디 했다.


마! 치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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