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뭐가 그렇게 힘들었을까? (1)
비밀 유지라며? 이런 말 해도 돼?
전화 올 데가 없는데... 스팸이거나, 또 여론조사인가? 아니며 보이스 피싱? 010으로 시작하는 전화에 누굴까 한참 궁금해하다가 받았다.
"오랜만이지? 잘 살아있어?"
"어! 누구시죠?"
"나야, 나! 목소리 벌써 까먹었어?"
목소리가 낯익어서 유심히 들어보니, 전 회사 동기였던 형이었다. 내가 떠나기 직전에 팀장이 되었던... 분명히 회사 사람들 번호는 전부 차단했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몹시 궁금했다.
"아! 형님! 오랜만이에요... 번호 바꿨어요?"
"아~ 그런가? 어때 나가서 살만해?"
"그냥 그렇죠... 어쩐 일이에요? 떠난 사람한테 전화를 다 주고...? 혹시 나쁜 일이에요?"
다행히 차단했던 사실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다. 그리고 '혹시나...' 하고 조심히 물었다. 누가 돌아가신 줄 알고... 만약 그렇다고 해도 별로 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전화 너머로 들려온 이야기는 뜻 밖이었다.
"아니. 그런 게 아니고. 아! 보험 장사도 아니야. 흐흐흐. 다른 게 아니고, 너 OOO 사원이라고... 너희 팀원이었던 애 맞지?"
"아! 네 그렇죠. 퇴사하기 전에 우리 팀 막내였죠."
"걔 어때?"
"예? 뭐가 어때요?"
"성격이나, 뭐... 일하는 거나, 대인관계 뭐 그런 거?"
"왜요? 무슨 일인데요? 왜 그런 걸 물어요?"
"아~ 이거 너한테만 말하는 거니까 비밀 지켜야 돼! 다른 게 아니고 인사팀에서 연락이 왔네? 팀원으로 받아주면 어떠냐고? 걔가 우리 팀으로 부서이동신청을 했나 보더라고..."
"아~ 그래요?"
너 참 성격 이상하다
이래서 나갈 때 잘해야 된다고 하는가 보다. 인사팀에서 내는 모든 공문마다 대문짝만 하게 비밀유지보장이라는 문구가 붙어 나가지만 거의 99% 지켜지지 않는다. 그것도 그렇고 통화의 주인공도 그렇고... 힘들어하고, 적응 못하더니 '결국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음~ 좋게 말해줬을까? 아니~ 난 그런 성격이 아니다. 그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성격 이상한 녀석이다. 그렇게 떠난 후에도 입바른 소리만 하는 성격파탄자이다. 크크크
"어~! 난 이제 떠난 사람이라서~ 이런 말 해도 되는지 모르겠네... 아마 데리고 있으면 좀 힘들 거예요. 음... 회사를 알바처럼 다녀요. 아! 예전 형님 생각하면 돼요... 똑같네!"
일타쌍피! 한마디로 두 사람을 동시에 보내버렸다. 소위 말해 '맥였다'. 유쾌! 상쾌! 통쾌! 묘한 카타르시스까지 느껴졌다. 잘못 개발된 제품을 끝까지 생산 잘못이라며 책임 전가하던 고집이 쇠심줄 같던 동기였다. 결국 실험데이터에서 오류가 발견되어 신제품은 출시 당해연도에 전량 회수조치 되었다. 책임공방으로 몇 년 간 창고에서 악성재고로 썩다가 수년이 지나 덤핑 처리됐다. 그래도 성과급 다 잘 받고, 팀장도 잘 달더라...
Z세대라고 치부하더라도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의 사회 초년생이었다. 순진한 표정으로 퇴근시간은 5시 30분이고, 30분간 퇴근준비해야 한다며 5시부터 일 접고 집에 갈 준비를 하던 어린 친구였다. 담당 라인에서 사고가 터졌는데, 이미 공장문을 나섰으니 내일 와서 처리하겠다며 가버린 신입사원이었다. 8시 30분부터 가동돼야 하는 공장에 출근시간 딱 맞춰 와서는 30분간 업무 준비한다고 9시부터 움직이는 건 기본이었다.
이런 말 진짜 태어나서 처음 들어봐! 처음이야!
11년 말, 12년 초. 자기 밑에서 그만두는 꼴은 못 보겠으니 다시 공장으로 가서 거기서 그만두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라며 부장은 전근을 명했다. 원래 생산팀에서 일했기 때문에 그쪽으로 갈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품질팀으로 발령이 났다. 이젠 촉망받는 신입사원도 아니고, 돌아가며 일 배우라고 배려해 주는 것도 아닐 텐데... 분명히 상무님이 받아주라고 해서 받기는 했는데, 팀장끼리 떠넘기며 가위바위보에서 진 것이 분명했다.
뭐 객기로 사표를 던지기는 했지만, 나도 잘한 거 하나 없기에 꼬리를 내리고 열심히 다녀보기로 했다. 그렇게 '나 죽었소'하고 다니겠다고 마음먹었데..., 전근 첫날! 후배라는 녀석이 팀장도 가만히 있는데 자기가 내 업무분장을 해주겠다고 와서는 본인 업무를 떠넘기고 갔다. 마치 계모가 신데렐라에게 일거리를 던져주듯이... 인수인계도 없고 혼자서 어떻게 해야 하나 몇 시간을 헤매고 있는데 사고가 터졌다.
팀 전원이 소집되고, 그 후배는 대리님이 자기 업무를 안 해서 그랬다며 옆에 멀쩡히 같이 있는데 팀장 앞에서 내 탓을 했다. 속으로 '얘는 뭐지? 진짜 이런 애가 있네...'라고 생각하고, '내 탓이오'하고 덮으려고 했다. 그제야 팀장은 몇 시간째 방치되어 있던 나와 단독 면담을 하자고 했다. 참 순진했지... 따뜻하게 건네는 첫마디에 믿을만한 사람이겠구나라고 섣불리 판단하고 그동안 있었던 일과 퇴사하려고 했던 사실까지 고백했다.
사람이 돌변하는 건 시간문제라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30년 넘게 살면서 애니메이션에서나 볼 법한 일들이 앞에서 막 벌어졌다. 면담한다며 다가와 앉아 경청하던 팀장은, 내 말이 끝나자마자 의자에 한 껏 기대앉아 쩍벌남이 되는가 싶더니, 이내 존댓말은 어느새 반말을 넘어 비아냥 조가 되어 있었다.
"박대리!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성격 참 이상하구먼...? 당신 같은 사람 데리고 어떻게 일을 하지? 난 대리급이 온다고 해서 알아서 착착 다 잘할 줄 알았는데... 난 당신 같은 사람하고 같이 일 못하겠는데...!"
지는 뭐 얼마나 잘나서?
일주일 만에 생산팀으로 다시 발령이 났다. 업보...! 그래 그때는 딱 업보 같았다. 상무에게 대들며 바른 소리 해댄 업보! 속된 말로 돌림빵(?) 같은 인사발령으로 레프트 훅, 라이트 훅, 어퍼 컷까지 코너로 몰려 KO 직전이었다. 새로 간 생산팀에서 책상정리가 끝나자마자 팀장은 본인 옆으로 나를 불렀다. 회의실도, 탕비실도, 그렇다고 밖도 아니었다. 사람들이 다 들을 수 있는 오픈된 장소에서 면담을 하자고 했다. 그리고 첫마디가
"너! 성격파탄자라며? 소문 다 났어... 아니라고? 너 OOO차장이라고 알지? 너랑 본사에서 같은 팀이었다며... 걔가 내 동기야... 너 오기 전에 나도 다 알아봤어... 본사에서 깽판 치고 내려왔다며?"
'크크크'. 지금 돌이켜 보면 웃음밖에 안 나온다. 저게 뭐야! 각색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내 기억 속 100% 리얼 상황이다. 그렇게 낙인이 찍힌 채로, 이제는 뭐 평판이라고는 기대할 수도 없게 되어 그대로 10년을 다녔다. 물론 그 뒤로는 더 떨어질 것도 없어서 그냥 대놓고 쌈닭으로 다녔다. 그랬더니 후배들 사이에서 영웅대접을 받기도 했고, 결국에는 꼰대 소리도 들었다. 위에서만 내리찍을 때는 참을만했는데, 위아래에서 내리찍고 치받으니까 진짜 답이 없더라.
아휴 이제는 이 꼴, 저 꼴 안 봐도 돼서 속 시원하다. 스트레스 없는 세상이 천국이다. 일도 하기 싫다. 월급쟁이는 사절이다. 뭐 해 먹고살려고 그러냐고 걱정하는 사람에게는 먹고살만해지면 어떻게 살지 고민해도 되냐는 의미로 '행복하세요?'라고 묻는다. 그럼 십중팔구 자기가 가진 것을 나열하며 행복하다고 대답한다. 가족, 자녀, 집, 차, 명품... 그러면 또 묻는다. '진짜 행복하세요?' 그럼 또 십중팔구 이렇게 대답한다. 그러면 안 행복하겠냐고... 안 행복하길 바라냐고... 그러면 막 타를 날린다. '아~ 행복하시구나~' 그러면 날아오는 대답!
너 참 성격 이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