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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상실

난 뭐가 그렇게 힘들었을까? (프롤로그)

by 철없는박영감
『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의 대표소설로 원제는 『Norwegian Wood』이다. 비틀스의 노래에서 제목을 따왔다고 하니, 그렇다면 '노르웨이산 가구'로 번역되는 것이 맞는데, 일본에서는 『노르웨이의 숲』이라고 출간됐고, 한국에서는 『상실의 시대』로 널리 알려졌다. 소설이 대성공을 거두며 제목으로 논란이 일자, 작가는 대답을 열린 결말 식으로 뭔가 어벌쩡하게 회피했는데, 결국은 지금의 제목이 더 마음에 든다는 눈치다. 한국에서는 일본제목 그대로 책이 나왔다가 망하고, 이후 '상실의 시대'라고 제목을 바꾼 뒤 대성공을 거뒀다. 사실 작가는 한국의 이 제목을 싫어한다고...


무라카미 하루키는 노벨 문학상 후보로 거론될 만큼 굉장히 높은 평가를 받는 작가이면서, 동시에 평론가들 사이에서 과대 평가된 작가 일 순위로 자주 지목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많은 블로그나 SNS에 그의 책에 대한 서평은 단골로 등장하고, 그가 집필한 책은 무조건 베스트셀러가 된다. 그가 전 세계에서 벌어들이는 인세가 일본 출판시장 전체보다 많다는 이야기도 들려온다. 팬들은 그의 문체와 작업방식을 동경하는 것을 뛰어넘어 사고방식이나, 달리기와 마라톤을 위시한 생활방식까지 추종한다. 심하게는 광신도 수준의 팬도 많다.


지방으로 발령을 받아 전주로 내려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읍에 있는 원자력 연구소에서 일한다는 대학동기에게서 연락이 왔다. 마지막으로 본 게... 입대 전이었으니까 거의 10년 만에 보는 동기였다. 처음 가 본 전주에는 스타벅스는 고사하고 에스프레소 기계가 있는 가게가 거의 없었다. 프림, 설탕 넣는 다방만 흔했다. 에스프레소 향이 얼마나 그리웠던지, 동기를 보자마자 커피전문점부터 물었다. '객사'라는 곳이 핫플레이스라고 해서 찾아갔더니 스타벅스가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찾던 영풍문고도 있었다.


이해해 달라고 한 적 없거든...


그렇게 지방에서 만난 동기 덕분에 오래간만에 문화생활을 즐기고 저녁이 되어 식사를 하면서 반주를 곁들였다. 전주는 다른 건 몰라도 식문화가 정말 잘 발달되어 있어서, 평범한 백반집도 서울의 웬만한 고급 한정식집 저리 가라의 솜씨를 보여준다. 그리고 기본으로 깔리는 반찬의 가짓수도 어마어마하다. 지금은 전부 하향평준화됐지만... 커피, 책이라는 공통분모가 생겨서 식사를 하면서 자연스레 책 얘기가 시작됐다. 동기 녀석은 말로만 듣던 무라카미 하루키, 아니 『상실의 시대』 광신도였다.


말년병장 때쯤 읽었나 보다 워낙 유명한 소설이었고, 자살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영내 반입 금지라는 사실이 반골기질이 있던 나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읽으면서 주인공의 친구는 뭐가 그렇게 힘들어서 자살을 했으며, 여주인공은 왜 그렇게 그의 죽음을 힘들어했고, 주인공은 또 왜 그렇게 쓰레기가 되어 여기저기 집적대고 다니는지... 대학 선배라는 녀석은 제비 수준이고, 여주인공과 정신병원에서 가까이 지냈던 중년여인은 왜 주인공을 찾아와 잠자리를 하는 건지... 전혀 이해가 안 됐다. 아마 이 글을 보는 많은 팬들은 대충 읽어서 그렇다고 벌써 눈에 쌍심지를 켜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솔직한 감상 후기를, 2차로 자리를 옮긴 호프집에서 풀었다. 그리고 동기의 폭주가 시작됐다. 나도 져줄 마음이 없었기에... 무엇보다 끝이 너무 허망하고, 허망한 결말 뒤에 따라오는 해설이 책의 1/3이나 돼서 사기당한 기분이다. 그리고 해설을 읽어도 등장인물들이 뭐가 그렇게 힘든 건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해설을 보니 원제가 노르웨이의 숲이던데, 제목에 '상실'이란 낱말 때문에 뭔가 굉장히 철학적인 해석이 따라붙으면서 사람들이 그 안에서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을 억지로 끼워 넣는 것 같아서 마음에 안 든다고 했다. 그리고 동기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상실의 시대


객관적으로 보면 나는 많은 것을 잃었다. 아니 버렸다. 직장, 사회생활, 친구, 인간관계, 가족, 연인, 건강... 그야말로 상실의 시대다. 우스갯소리로 많이 없어서 그렇지... 있는 것은 돈뿐이다. 힘들다고 생각했던 시기를 지날 때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속 등장인물처럼 나를 포기하고 살았다. 그리고 삶까지 포기하고 싶었다. 그런데 소설이 전혀 이해가 안 됐던 것처럼... '난 뭐가 그렇게 힘들었을까?'라는 물음을 던져보면 예전에 대학동기에게 남겼던 감상평이 그대로 돌아온다. '보고 싶은 것을 억지로 끼워 넣는 것'처럼 살았다.


그렇다 나는 힘든 사람처럼 보이고 싶었다. 솔직히 힘들 이유가 없었다. 힘든 이유를 찾았을 뿐이지... 찾아서 억지로 끼워 넣었을 뿐이지... 소설 속에서 '상실'은 포기하는 원인, 이유, 결과였다. 상실감으로 나를 포기하고, 상실했기 때문에 생활을 포기하고, 이겨내지 못해 삶을 포기했다. 그런데 그건 틀렸다. 진정한 '상실'은 손에 쥔 것을 놓기 싫어서 나머지를 포기하려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났다는 증거였다.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쥐었던 것을 놓고 나서는 일 안 하고 그냥 노는데, 마냥 행복하다.


어! 내가 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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