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야 방귀야 (에필로그)
트라우마 경쟁
읽다 보면 쓰게 되고, 쓰다 보면 부끄러워진다. 에세이 범람의 시대가 절정에 달하며 '누가 누가 더 아픈 기억을 갖고 있나, 누가 누가 더 힘들게 살았나...'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주변엔 힘들었던 이야기 천지다. 여기서 조금 벗어나면 '누가 누가 더 들이댔나, 누가 누가 더 실수했나' 같은 웃픈 에피소드를 쏟아낸다. 거기에 일조를 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이제는 좀 판타지스럽더라도 희망적인 이야기들이 필요하지 않나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보면 참 귀도 얇고, 줏대도 없는 이기적인 삶이었다. 요즘 이런 사상이 유행이라고 하면 우르르 휩쓸려가 책을 읽고, 강연도 들으며... 뒤돌아보고, 반성하고, 앞으로의 계획도 세우고, 생활에 적용해 실천도 하면서 정말 '노오력'하며 살았다. 하지만 결국엔 다 헛 될 뿐이었다. 힘든 원인을 밝히는데, '나'를 우선 제외하는 것은 그저 상황에 맞는 '트라우마'라는 지니의 램프를 여러 개 만들 뿐이었다. 그렇게 자위했고, 거기에 갇혔다.
헛됨의 핵심은 '위로'였다. 힘든 원인을 '트라우마'에서 찾으려 하면 할수록, 해결책 또한 그랬다. 그래서 '위로'를 찾아다녔다. 누군가 위로받는 모습에 대리만족을 느끼기도 하고, 그런 영화, 드라마, 책을 찾아 읽었다. 위로받고, 위로하기를 즐겼다. 그러면서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을 배척하고, 억압하고, 욕하면서 소위 '마녀사냥'을 하듯이 척살하라며 목소리를... 아니 손가락을 놀렸다.
위로 사냥꾼
그 '위로'의 실체는 '오지랖'이었다. 간섭이었다. 남의 삶에 영향을 끼치고 싶은 '오만'이었다. '위로'를 찾아다니던 사냥꾼은 '위로'를 멸종시킬 뻔했다. 회사에서 억울한 일을 당해 힘들어하는 후배들을 위해, 대신 가서 쌈닭 기질을 발휘했다. 대상은 상사나 연장자를 가리지 않았다. 싸우고 난 다음엔 당사자들을 불러 술잔을 기울이며 위로했다... 고 생각했다. 순수하지 않은 것은 금방 변질되었다. 아마도 프로 오지라퍼 혹은 꼰대로...!
그때 후배들에게 많이 선물했던 책이 '미움받을 용기'였다. 그런데 부작용이 생겼다. 아들러 심리학을 대화형식으로 풀어냈다는 책은 '스스로를 더 아껴라'라는 말을 하고 있는데, 선물 받은 책을 읽지도 않고, 책장에 끼워놓고 제목만 봤는지... 후배들이 변했다. 선물한 의도가 순수하지 않아서 인지, 사이로 불순물이 많이 끼었다. 아니 다른 책을 선물한 줄 알았다. '미움받을 짓만 골라하는 용기'라는 책을...
아마 이 책이 비난받는 이유 중에 하나가 이런 것 때문일 것이다. 대부분 책이 욕먹는 이유는 제목을 너무 자극적으로, 상업적으로 지어서 그런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한다. 책 제목만 봐서는 뭔가 속 시원하고 통쾌한 이야기를 해 줄 것 같은데... 내용은 그렇지 않다. 표지만 감상한 이들에게는 딱 사기라고 느낄만한 내용이다. 음... 책은 읽으라고 선물하는 건데... 내용은 딱 나쁘지 않은 오지라퍼, 꼰대의 조언이다. 역시나 자기 계발서이다.
로빈 윌리엄스...!
그가 되고 싶었다. 후배들에게, 아니 누구에게든 '굿모닝 베트남'처럼 '구우우우웃 모~닝'을 외치고 싶었고, 키팅 선생님처럼 '카르페디엠'을 설파하고 싶었다. '미세스 다웃파이어'처럼 철없는 어른이 되고 싶었고, '후크'의 피터팬처럼 잘못된 길에 빠졌어도 다시 순수함을 되찾고 싶었다. 그리고 '굿 윌 헌팅'에서 처럼 멘토가 되고 싶었다. 전부 합치면 전지전능한 램프의 요정? 나는 지니가 되고 싶었나 보다.
2014년에 고인이 되었으니, 올해로 추모 10 주기가 되었다. 지금도 그의 모습을 떠올리면 미소가 지어진다. 영화로 애니메이션으로 큰 영향을 주었던 인물인데, 그도 우울증으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비친 모습과 비추는 모습이 달라서였을까? 그의 사망소식은 너무나 안타까웠다. 어쩌면... 음 아마도 비친 그처럼 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행동하는 진짜 어른은 판타지인 건가? 이젠 이런 말밖에 할 수 없는 어른이 되었다.
지니, 넌 이제 자유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