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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관용적인 표현일지라도...

난 뭐가 그렇게 힘들었을까? (3)

by 철없는박영감
날마다 새로운 아침이 열린다


뭐 어디 90년대 브라운관 TV 속 CF에서나 나올 법한 표현이다. 어쩌면 내 감수성의 한계는 여기까지 인지도 모른다. 이런 식의 표현은 너무 많이 쓰여 식상하다 못해 곰삭아서 옛날 성우님들의 목소리로 더빙된 환청까지 들리는 듯하다. 하지만 이보다 더 좋은 표현이 없다. 한 김에 꼴값 좀 더 떨어볼까?


"수은주가 영하 15도까지 떨어지며 매서운 한파가 몰아친 아침. 두꺼운 파카로 중무장하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 품 안을 파고드는 것은 한기뿐만이 아니었다. 찬 공기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짜릿하게 전율을 일으키는 것처럼 온몸을 흔들어 깨우듯 맑고 청량하게 지저귀는 저 새소리. 인생은 역시 전화위복, 호사마다, 새옹지마다."



재미없음을 썰렁하다고 표현하거나, 'I'm fine. Thank you'에 'And you?'를 붙이거나, 엄마는 무남독녀인데 식당 가서 '이모~'를 찾는 관용적인 표현은, 하면 사족, 식상이요, 안 하면 섭섭, 찝찝이다. 관용(慣用)이라는 말뜻이 '습관적으로..., 오랫동안 써서 굳어진...'이니 그럴 만도 하다. 영어로 치면 숙어 정도 되겠지? 습관적으로 오랫동안 써서 굳어진 당연한 것들.


이렇게 될 줄 상상도 못 했던 순간


이런 당연한 것들이 당연해지지 않게 되는 순간, 갑자기 소중해지는 순간, 어떤 느낌이 들 것 같은가? 관용적인, 식상한, 당연한 것들이 낯설고, 새롭고, 색다르게 다가오는 그 순간. 눈(眼)이 그랬다. 나날이 건강이 나빠지면서 힘겹게 회사생활을 이어가던 중, 회의시간에 빔 프로젝터로 쏜 장표가 갑자기 찢어져 보였다. 까맣거나 초점이 흐려지는 것이 아니고 엄청난 눈 시림, 편두통과 함께 그야말로 화면이 위아래로 쩍 갈라졌다.


바로 병원으로 달려갔다. 혹시나 앞을 못 보게 될 거란 선고가 떨어질까 봐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모른다. 실명을 걱정하는 상황은 상상도 못 했던 순간이다. 귀가 먹어가는 베토벤의 심정이 이랬을까? 검진결과는 다행히 이상소견이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일단 증상이 발생했기 때문에 앞으로 추적관찰이 필요하다고 했다. 모르는 질병은 치료법도, 약도 없었다. 관용에 갇힌 표현의 한계는 대증요법도 불가능하게 했다.


안도했던 마음은 무거워졌다. 그 뒤로 피곤하면 눈부터 시리고 아팠다. 지금은 괜찮지만 결국엔 시간문제일 거라는 초조함, 괜찮아지리란 보장이 없는 막막함, 언제 어디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몸은 계속 여기저기 이상신호를 보내왔다. 양반다리를 할 수 없을 정도로 골반이 아픈 순간, 옆으로 누워 잘 수 없을 정도로 어깨가 아픈 순간. 노화인가? '당연한 것들'이 '당연했던 것들'로 바뀌는 순간들이 찾아왔다.


하나하나 어르고 달래는 시간


'당연, 관용, 습관'이라는 장막을 걷어냈다. 하나하나 천천히 들여다보고, 얌전히 어르고, 조심스럽게 달랬다. 그냥 노는데 뭐 바쁜 게 있나? 일어나면 침구정리, 세수, 면도, 양치질하고, 퇴고해서 글을 발행하면, 식사하고, 청소, 빨래, 운동을 했다. 규칙적으로 생활했다. 바르게 눕고, 자세를 고쳤다. 다리도 꼬지 않았다. 어깨를 펴고 가슴을 내밀었다. 그리고 천천히 걸었다. 발전이나 성장은 고려하지 않았다. 그냥 했다. 그러자 모든 것이 새롭고, 신선하고, 색달라졌다. 전부 소중해졌다. 똑같은 것은 없었다. 매일 새로운 아침이 열렸다.


어느 날 찬 공기와 함께 창문에서 밀려온 지저귐이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를 깨웠다. 옆에서 까마귀가 울어도, 저 멀리서 자동차 소리가 방해해도 그 소리에만 집중됐다. 소음 속에서 뭔가 탄생했다. 뭐든지 태어나려면 보이지 않는 엄청난 충격의 상호작용과 폭발하는 에너지의 연쇄반응이 필요하다. 관용구의 시작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그와 비슷한 새로운 탄생이 작은 지저귐으로 촉발됐다. 개운했다. 나른하기도 하고, 긴장도 풀렸다. 두통이 사라지고, 눈도 맑아졌다.


날마다 새롭게... 날마다 새로워지니... 날마다 새로운 에너지를 받는 기분이다. 내일은 또... 다음엔 또... 어떤 소중한 것이 장막을 걷고 모습을 드러낼까? 흔히 글쓰기를 '잃어버린 나를 찾는 작업'이라고 한다. 혹은 '몰랐던 나를 찾는...'이라고도 한다. 다 틀렸다. 두 관용적 표현 모두 재발견하는 느낌이다. 원래 그 자리에 그 모습 그대로 내재되어 있었던 듯 표현한다. 원래 그랬던 것은 없다. 날마다 다른 그리고 달라지는 '나'를, 또는 다른 무언가를 발견한다.


그래서 마냥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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