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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뭐가 그렇게 힘들었을까?

난 뭐가 그렇게 힘들었을까? (4)

by 철없는박영감
나는 내가 지난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


'당 떨어졌나? 위험한 거 먹으면 좀 나으려나?'


노화현상이라고 하기엔 이상하리만큼 잠만 심하게 쏟아졌다. 그래서 '뭘 좀 먹으면 괜찮아지려나?' 하는 생각에 마트에 가려다가도 5분 걷는 것은 물론이요, 씻고 옷 갈아입는 것조차 귀찮아서 그냥 포기해 버렸다. 심하게 표현하면 딱 이대로 죽었으면 좋겠는데 귀찮아서 그러기 싫었다. 운동도 하고, 식단조절도 하면서 규칙적으로 생활하며 건강하게 지냈는데... 갑자기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알 수 없었다.


당연히 먹고, 싸는 생리적인 것도 귀찮아졌고, 누워있는 데도 눕고 싶었다. 그런데 조카들이 할머니, 할아버지가 보고 싶다며 주말에 오겠단다. 엄마는 집 청소하기 싫다고 분명히 우리 집으로 오라고 할 것이 뻔한데, 내 몸이 힘드니 가족이지만 남보다 못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오지 말라고 했다. 잠시 뒤 동생에게 전화가 왔지만 안 받았다. 무슨 얘기할지 뻔하니까... 다 귀찮고, 제발 좀 나 혼자 내버려 뒀으면 하는 생각만 들었다.


그래도 남은 일말의 양심이 '나 때문에 괜히 다른 사람들 까지...'라는 죄책감에 빠지게 하려는 찰나, 때마침 문자가 왔다. 지난여름 건강검진을 받았던 병원에서 온 문자였다. 담낭용종 초음파 추적검사할 때가 됐으니 내원하라는 문자였다. 도대체 얼마나 쌓인 건지, 걷어내고 걷어내도 줄지 않는 피로감, 컨디션 난조, 또다시 찾아온 눈통증과 시야가림. 진짜 말 그대로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는 심정'으로 바로 예약을 했다.


나는 '아직도' 내가 지난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


초음파 검사 결과 용종크기 변화 없음. 피검사 결과 매우 신선함. 아침식사로 사과 한 개 먹기를 2년 정도하고 나서부터는 건강검진표의 숫자들이 모두 그린라이트로 반짝였다. 즉, 더할 나위 없이 건강함. 이상 없음!!! '그럼 도대체 이 힘듦은 뭐지?' 환자로 보이기 싫어서 되도록 힘든 티를 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조곤조곤 차분한 어조로 징징거리지 않고 증상을 설명했다. 다 듣고 의사는 조심스럽게 '스트레스...'를 말했다.


'아 놔! 또 그놈의 스트레스? 회사도 그만두고, 일도 안 하고, 놀고먹고 있는데 무슨 놈의 스트레스?'


"저 선생님... 그럴 리가 없는데요. 회사도 안 다니고, 돈도 안 벌어도 되고, 요즘 머릿속이 완전히 꽃밭인데요... 스트레스받을 '일'이 없는데요..."


"혹시 너무 아무 일도 없어서 '스트레스'를..."


의사도 말을 하면서 이상했는지 끝을 흐린다. 그리고 내 표정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그러면 지난번 내시경에서 식도염이 발견됐는데, 지금은 어떤지 한번 보죠... 그냥 치료 안 하고 뒀는데 그게 심해진 건지... 심해졌어도 이런 건 한 달만 약 먹으면 금방 나으니까요... 당장 내일이라도 검사가 가능하니까 바로 예약 도와드릴게요... 어떠신가요?"


"네 알겠습니다. 해야 하는 거면 해야죠..."


그러고 진찰실을 떠나려는데 의사가 붙잡으며 한마디 보탰다.


"저 많이 힘드시면 소화제라도..."


"혹시나 간이 또 이상해질까 봐... 집에서도 아무리 소화 안 돼도 절대 약 안 먹고 있는데요..."


"......"


의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일 보자고 했다. 그렇게 다음날로 내시경 예약을 잡고 나오는데, 같은 건물에 망막전문 안과가 보였다.


'아! 맞아. 나 눈도 아프지... 내일 내시경 받고 예약하고 가야겠다.'


하루에 10만 원까지만 보상이 되는 실비보험. 예전에 몸이 아파서 휴가를 내고 병원을 찾았는데 이런저런 검사가 필요하다고 했다. 또 휴가 내기 눈치 보여서 실비보험 믿고 몇 시간씩 기다리면서 겨우겨우 하루 안에 전부 검사를 마치고 나왔는데... 실비보험은 10만 원만 주고 끝났다. 며칠 나눠서 했으면 전부 보상받을 수 있는 것들이었는데, 약관도 제대로 읽지 않고, 보험에 가입했다는 사실만 믿고 있었던 나의 불찰이었다.


나는 '언제나' 내가 지난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


내시경 검사결과는 역시 이상 없음. 식도염은 좋아지지도 나빠지지도 않았다. 그래서 약을 탔다. 의사는 의뢰서를 써줄 테니 종합병원 '류머티즘 내과'에 가보라고 했다. 음... 이 레퍼토리 어디서 많이 들어본 건데, 민원 넣으면 담당부서 연결해 주겠다며 전화뺑뺑이 돌리다 처음 받았던 공무원이 다시 받는 이 싸한 느낌! 어쨌든 시키는 것은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서 종합병원에 예약을 했다. 한파는 피하고 싶어서 다음 주로...


그리고 안과에 들러 예약을 잡았다. 역시나 내시경 검사 하나로만 병원비가 10만 원이 넘었다. 만약 안과까지 하루에 다 해치우려고 했으면 또 제대로 보상받지 못했을 것이다. 다음날 찾은 안과는 기본 검사비만 4만 원이 나왔다. 그리고 검사 결과는 역시나 이상 없음. 시신경 이상 없음. 혈관 이상 없음. 망막에 변성 발견되지 않음. 예전에 망막박리증으로 레이저 시술받은 자리도 잘 붙어있음.


문진을 마친 안과의사도 결국 '스트레스...'를 언급했다. 검사 소견상으로는 이상이 없고 증상이 계속되면 신경과에 가봐야 할 것 같다고... '말씀하시는 증상이 편두통 증상으로도 보이고...'라면서... 어! 여기도 느낌이 싸하다. 뺑뺑이의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그리고 경과를 지켜보자며 안구건조증 치료 안약을 처방해 주고 3개월 뒤로 검사예약을 잡았다. '아! 확실해졌다. 나 이 레퍼토리 안다.'


갑자기 어지러움증이 찾아온 적이 있었다. 기립성 저혈압처럼 앉았다 일어설 때, 핑 돌며 눈앞이 깜깜해지는 것이 아니고 가만히 앉아있어도 멀미하듯이 하늘이 뱅글뱅글 돌았다. 처음엔 어제 마신 술이 덜 깼나 싶어서 참았는데, 며칠이 지나도록 증세가 나아지지 않았다. 역시나 눈에서 가장 먼저 증상이 나타났다. 운전을 하는데 갑자기 눈알이 뒤집히는가 싶더니 앞이 보이지 않았다. 갓길에서 한참을 쉬고 겨우 진정이 됐다.


나는 내가 제자리걸음 중인 것을 알고 있다. '아직도', '언제나'


처음 찾은 진료과목은 안과였다. 갑자기 눈이 헤까닥 뒤집히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 안 보이고 어지럽다고 했더니... 그런 증상은 처음 들어본다고 했다. 그리고 검사상 이상이 없으니 계속 어지러우면 이비인후과를 한번 가보라고 했다. 이비인후과로 바로 갔다. 대기자가 많았다. 회사에 잠시 병원 좀 다녀오겠다며 외출을 한 상태라서 온종일 나와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휴가를 썼다. 10시 정도여서 반차도 낼 수 없었다.


이비인후과에서는 VR기기 같은 것을 씌우더니 앉혔다 눕혔다를 반복시켰다.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기도 하고 하여튼 더 어지럽게 만들었다. 한참을 검사하고 나서 의사는 전정기관 이상으로 생긴 어지럼증이 아닌 것 같다고 했다. 검사결과 이상은 없는데 증상이 계속되면 신경외과에 가보라고 했다. 어차피 하루 버린 거... 신경외과로 갔다. 그런데 의사는 히포크라테스 같은 분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신경외과는 한산했다. 접수하자 바로 간호사가 진찰실로 들어가라고 했다. 빈방이었다. 안에서 5분 정도 기다리니 의사가 들어왔다. 얼굴에 '사기꾼'이라고 쓰여있었다. 그래도 '관상가 양반'도 아닌데 섣불리 판단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증상을 얘기하고, 앞서 다른 진료과목을 다녀온 얘기까지 했다. 의사는 거만한 표정과 자세가 되어 다른 의사들을 돌팔이 취급했다. 그리고 실비보험을 묻더니 검사를 하자고 했다.


'아! 사기꾼 맞는구나!'


검사는 나중에 하자고 했다. 회사에 빨리 들어가 봐야 된다는 핑계를 댔다. 다행히 집에 안 들르고 작업복을 입은 그대로 와서 핑계 대기 좋았다. 의사는 약을 한 달 치를 지어주었다. 물론 처방전만 받고 약국엔 가지 않았다. 제약회사 영업사원을 했던 게 이런데 도움이 될 줄이야... 처방전에는 신경과 약 조금에, 영양제와 소화제만 가득했다. '이런 처방은 심평원에 걸려서 바로 삭감될 텐데...' 뭐 어차피 안 지었으니 상관은 없겠지만... 그 뒤로는 날마다 조직관리를 핑계로 술을 마셨기 때문에 곧 어지럼증은 알코올에 휘발되어 버렸다.


제자리에서 걸었겠지만, 제자리는 아닐 것이다


그래서 류머티즘 내과를 다녀왔다. 처음부터 간호사가 신경질적으로 여기로 보낸 것 맞냐며 몇 번을 확인했다. 맞다고 했더니... 그러면 일단 접수는 해주겠는데, 진찰받고 소화기 내과로 가라고 할 수도 있다고 했다. 일단 전 병원 의사가 분명히 '류머티즘 내과'라고 했다. 기존의 뺑뺑이와 다른 진료과목의 출현이었기 때문에 몇 번을 확인했다. 그래서 틀릴 리가 없었다.


예약을 하고 갔지만 종합병원은 역시 대기시간이 길었다. 1시간을 넘게 기다려 진찰실에 들어갔지만 의사는 증상을 듣더니 진료과가 아니라는 한마디만 했다. 류머티즘 내과는 통증 관련 과목이었다. 어쩐지 주변에 노인들만 가득해서 이상하게 여겼는데, 종합병원이라서 그런가 보다 하고 넘기고 있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신경정신과를 가야 할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또 의뢰서를 써주겠다고 했다. 진찰료 당연히 냈다.


음... 그냥 혼자 추리해 보건대, 전 병원 의사가 바로 정신과로 가라고 하면 미친놈 취급한다고 내가 싫어할까 봐 한 다리 건너게 만든 것이 아닌가라고 추리해 본다. 어쨌든, 정신과는 이미 많이 다녀봐서... 그리고 대부분 원인을 못 찾으면 스트레스를 원인으로 지목하며 최종적으로 신경정신과로 보내는 경험을 많이 해봤기 때문에... 진료여부는 선택이라는 간호사의 말에 그냥 돌아왔다. 난 뭐가 그렇게 힘들었을까? 결국 제자리였다.


헬스클럽에 등록하면 대게 맨 처음 눈감고 크게 제자리걸음을 하라고 시킨다. 본인은 제자리에서 걷는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눈을 떠보면 몸의 균형이 맞지 않는 방향으로 자리가 옮겨져 있다. 그동안 눈감고 열심히 제자리걸음을 하고 나서 눈을 떠보니, 전주에서 의정부로 집이 옮겨져 있고, '브런치스토리'에서 이렇게 글도 쓰고 있고, 정신과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그렇다 분명히 제자리는 아니었다. 만약 스스로의 삶을 제대로 통제할 수 있고, 통제가 된다면, 아마 나의 제자리걸음은 제자리에서 힘차게 행해졌을 것이다. 아직은 힘차게는 걸었지만 제자리를 찾아가지는 못한 것 같다. 제자리가 제자리에 찾아 들어갈 수 있도록...


균형 잘 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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