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어른거리다

난 뭐가 그렇게 힘들었을까? (5)

by 철없는박영감
미성년자(未聖年者)의 성인식


마흔이 넘어가면서 어른이 다 된 줄 알았다. 결혼은 안 했지만 번듯한 직장도 있었고, 지방의 작은 아파트지만 내 명의로 된 아방궁도 장만했었다. 상위 몇% 까지는 아니어도 연봉도 나쁘지 않았고, 연식은 오래됐어도 잘만 굴러가는 차도 있었다. 주말이면 직장 동호회 사람들과 골프도 치러 다녔고, 혼자 살아서 따로 돈 들어갈 곳이 없으니 마음만 먹으면 백화점도 다니고, 비싼 가전제품도 할부도 착착 긁을 수 있었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인생이었다. 이제는 그동안 고생한 보상이 돌아오는 일만 남은 줄 알았다.


회사에서도 팀장은 아니었지만 주도적으로 업무를 처리하며 자칭 에이스, 오피니언 리더가 되어가고 있었다. 직급이나 연차가 아무리 높아도 내 앞에서 허튼소리 잘못했다가는 큰코다치기 일쑤였고, 그래서 그만두는 이도 적지 않았다. 임원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바른 소리 딱딱해가며 수틀리면 인사도 안 하고 눈을 부라리며 당돌하게 안하무인으로 다녔다. 집에서도 이제는 어른인데 일일이 참견 좀 하지 말라는 식으로 포지셔닝을 했다. 손바닥 안에서 손오공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것처럼, 인생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부처님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손오공이었다. 서유기에서 손오공은 자신의 재주와 혈기왕성함만 믿고 옥황상제에게서 제천대성(齊天大聖)이란 봉호를 내놓으라고 협박 아닌 협박을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난장을 피울 것처럼 굴면서 강제로 얻어낸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던 그때, 딱 제천대성의 모습이지 않았을까? 능력 없는 월급 충이라며 선배들을 깔아뭉갰고, 제 앞가림도 못하는 철부지라며 후배들을 채근했다. 그렇게 부처님 손바닥 안인 줄도 모르고 활개를 치고 다녔다.


결국 시간이 흘러 나이를 먹고, '여기 왔다감'이라는 흔적도 못 남기고 추락했다. 제천대성은 부처님 손바닥이라도 가봤지... 거기에 가서 낙서도 하고 무단방뇨라도 하고 왔지... 나는 근두운도 없었고, 부처님 손가락은 저 멀리 어른거리기만 했었다. 결국 제 풀에 지쳐 쓰러졌다. 다른 탓할 것도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다. 뭐 괴롭히는 상사가 있어서? 아니다. 무능력한 동료들이 따라오지 못해서? 결코 아니다. 말 안 듣는 후배들의 하극상 때문에? 아니다. 절대 아니다. 나는 그저 成人의 햇수를 만족한 미성년자(未聖年者) 일뿐이었다.


어른, -거리다


어른
1. (명사) 다 자란 사람. 또는 다 자라서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
2. (명사) 나이나 지위나 항렬이 높은 윗사람.
3. (명사) 결혼을 한 사람.
[출처 : 네이버표준국어대사전 "어른"]


-거리다
1. (접사) ‘그런 상태가 잇따라 계속됨’의 뜻을 더하고 동사를 만드는 접미사.
[출처 : 네이버표준국어대사전 "-거리다"]


어른거리다
1. (동사) 무엇이 보이다 말다 하다.
2. (동사) 큰 무늬나 희미한 그림자 따위가 물결 지어 자꾸 움직이다.
3. (동사) 물이나 거울에 비친 그림자가 자꾸 크게 흔들리다.
[출처 : 네이버표준국어대사전 "어른거리다"]


뭐 이제는 익숙하리라 생각된다. 내가 흔히 글을 전개하는 방식인 낱말놀이... 많은 이들이 '이 시대는 어른이 사라졌다'라고 하는데, 그러면 어른이 대체 뭘까를 생각하면서 '어른, 성인, 성년'을 사전에서 찾아봤다. 그러다가 '어른거리다'가 눈에 띄었다. 그리고 '-거리다'라는 접미사가 무슨 뜻인가 찾아봤더니... 이런 근사한 뜻이 있었다. '어른'과 '-거리다'가 만나서 오늘 하고 싶은 주제에 딱 맞는 낱말이 되었다.


'어른' + '-거리다'. 억지로 풀이하자면, '다 자라서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의 상태가 잇따라 계속됨' 정도로 풀이할 수 있겠다. 아! 나는 어른이 된 게 아니고 어른 거리고 살았구나... '어른거리다'. 음... 갑자기 '어른'이란 낱말이 어른거린다. 어른이 어른거린다. 내가 힘들었던 이유는 어른거렸기 때문이지 않을까? 이게 바로 중2병들도 울고 간다는, 갱년기 + 사추기.


흔들리지는 않겠지만, 아직 방황 중인 것은 확실하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