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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왔던 나의 수줍은 커밍아웃

그냥 노는데, 마냥 행복하기만 하다 (5)

by 철없는박영감
솔직히 고백하자면, 사실 나는 남자가...


드라마를 좋아한다고 하면 큰일 나는 줄 알았다, 아! 과거형이 아니지... 여전히 지금도 어느 정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드라마 뭐 보냐는 질문을 심심치 않게 받는다. 회사 다닐 땐 나름 직책도 있었고,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그리고 나이도 좀 들다 보니, 권위라는 게 약간 생겼는지 '나'를 궁금해하는 사람이 생겼다. 아마 좀 친해져 보려고... 그저 내 취향이 궁금해서... 물어본 것뿐일 텐데, 내가 주목하는 포인트는 달랐다.


'혼자 좋아서 떠벌리다 자칫 들통나면 돌이킬 수 없으니 조심하자.'


그래서 이런 질문을 받으면, 항상 '드라마 잘 안 보는데...'로 밑밥을 깔고, 아주 치밀하고 철저한 계획하에 <모래시계>, <내 이름은 김삼순>, <대장금>, <도깨비> 같은 오래된 국민드라마를 미끼로 던졌다. 이 드라마들의 공통점은 누구나 한 번은 봤을 법한, 아니면 들어라도 봤을 법한 유명한 드라마라는 점이다. 그래서 내용을 꿰고 있는 것이 전혀 이상해 보지 않는다. 그렇게 미리 준비한 대답으로 숨겨왔던 나의 수줍은 마니악한 취향을 철저히 감췄다.


그러면 지금에 와서 왜 커밍아웃을 하느냐... 방학이면 아침드라마, 일일드라마, 시트콤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행복했다. 요즘말로 치면 덕질이려나? 그래서 어딘가에서 어제 본 드라마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안 그런 척하면서 은근히 귀를 기울였다. 같은 드라마를 보는 사람이면 처음 본 사람이지만 그 안에 섞여 같이 수다를 떠는 미친 상상도 해봤다. 안 그런 척하면서... 매일 드라마를 볼 수 있는 요즘, 진~짜 행복하다.


그리고 이런 생각도 들었다. '이게 숨긴다고 숨겨지나? 감춘다고 감춰지나? 애초에 숨기고, 감출 수는 있는 건가? 진실이 뭐고, 의도가 뭐였든 간에 결국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를 텐데... 헛수고로 에너지만 낭비한 건 아닌가? 단지 예의상 아니면 무례하지 않아 보이려고 믿어주는 척 맞춰준 건 아닐까? 나는 대화에서 화자의 텍스트만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던 적이 얼마나 있던가?' 생각해 보니... 와우! 이불킥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정체성을 의심받다.


외환위기 때였나... 회사에 계열사 정리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나이는 한참 어린데, 입사는 한참 선배이고, 공장생활은 또 내가 한참 선배인 애매모호한 관계의 동료가 발령을 받아왔다. 서로 존댓말은 쓰는데, 그렇다고 격식을 막 차리는 건 아니고, 그렇다고 친구처럼 다 내려놓고 만나는 사이도 아니었다. 나는 나이로 대접받고 싶었고, 그쪽은 입사기수로 대접받고 싶었을 거다. 그 이가 뜬금없이 내게 손바닥을 보여달라고 했다.

나도 몰랐던 사실을 회사 동료를 통해 알게 되었다.


"어! 검지랑 약지길이가 같으면 게이라던데..."


'에? 뭐야? 나 언제부터 게이였어? 뭔가 나한테 느껴지는 분위기가 그런 느낌이 들었나? 도대체 어디서 그런 느낌을 받은 거야?'


누군가를 보는 시선은 대게 이렇다. 앞뒤맥락 전혀 없이 '카더라'로 규정지어 버린다. 그런데 한번 그렇게 평가를 받고 나면, 웃어넘기면 그만인 일도 이상하게 의식하게 된다. 나는 그 뒤로 드라마 좋아한다는 말은 못 하는 사람이 됐다. 그리고 남자다워 보여야 한다는 고민에 빠졌다. 혼란스러웠다. 이정섭, 홍석천이 자꾸 눈에 띄었다. 나조차도 내 정체성이 혼란스러웠다.


'나 남자 맞는데... 나한테 여성스러운 면이 뭐지? 말투가 그런가? 몸짓이 이상한가? 그런데 도대체 남자답다는 건 뭐지?'


그 뒤로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이전에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동성애에 눈을 떴다. 처음엔 '저렇게 보이면 안 돼'라는 생각에 자꾸 눈길이 갔는데, 계속 보니 지금은 적극 동조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포비아는 아니게 됐다. 중학생 때, 'SBS 그것이 알고 싶다' 였던 것 같다, 학교에서 친구들 사이에서 난리가 났다. 어제 그거 봤냐며... 아마 트랜스젠더에 관한 내용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때 내 머릿속에서 게이는 트랜스젠더였다. 이제는 뭐 다르다는 정도는 당연히 안다. 그리고 19금만 아니면 'BL드라마'라고 하던가? 그것도 잘 본다.


진정한 자유, 진정한 행복, 진정한 정체성, 진정한 커밍아웃


왜 그렇게 철저하게 숨겼는지 생각해 봤다. '정체성을 들키는 게 그렇게 두려웠나?'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렇다 드라마를 좋아하는 남자라는 사실을 들키는 게 두려웠다. 그래서 숨기고 감췄다. 그다음으로 '무엇이 두려운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손바닥을 보고 게이라고 했던 것처럼, 드라마를 좋아한다고 남자답지 못하다는 낙인이 찍힐까 봐 두려웠다. 마지막으로 '왜 두려운가?' 나를 '철없는박영감'으로 보지 않고, 드라마를 좋아하는, 정체성이 혼란스러운 사람으로 보는 것이 기분 나쁘고, 억울했다.


그런데 지금 '나'를 '나'로 봐주지는 않는 사람이 바로 '나'였다. 허걱! 헉! 각종 감탄사와 탄식이 섞여 나왔다. '어! 이건 뭐지! 그런 거였나?' 여러 사람과 같이 살려면 타인의 평가와 시선에서 절대 자유로울 수 없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 진정한 행복은 그것들에서 자유로워질 때 느낄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평생 남에게 휘둘리고, 두려워하고, 겁내며 살아야 한다. 이젠 두렵고 겁나지 않게 되었다고 할까?


나는 드라마 볼 때가 제일 행복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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