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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 히잉~

그냥 노는데, 마냥 행복하기만 하다 (10)

by 철없는박영감
있었는데요


요즘 심심치 않게 날아오는 메일 중에 하나가, 무슨 법이 개정됐다면서 휴면계정이 다시 살아난다고 알리는 메일이다. '아이고 의미 없다. 가입한 사실조차 잊고 있었네요.' 대게가 멤버십 포인트 관련 사이트이고, 어차피 쓰지도 않고, 가지도 않아서, 굳이 사이트 찾아가서 아이디, 비번 찾고 회원탈퇴하는 수고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뒀다. 돈 나가는 것도 아니고, 대부분 큰 회사들이라서 보안도 철저하겠지라고 믿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각종 스팸 문자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도박, 주식, 대리 운전, 대출, 어떤 문자는 너무 밑도 끝도 없는 내용이 날아와서 도무지 뭘 광고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런 스팸은 지뢰밭을 피하는 심정으로 링크 안 누르고 번호를 차단하느라 한동안 두꺼운 손가락으로 고생 좀 했다. 그러다가 골프존이라는 스크린 골프회사에서 개인정보가 대량으로 유출됐고, 내 개인정보도 범죄에 악용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는 메일이 도착했다.


허걱~ 골프 끊은 지가 3년이 넘어가는데, 그동안 완전히 잊고 있었다. 그리고 범죄에 악용될 수 있다는 말에 그냥 둘 수 없었다. 그래서 오랜만에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아이디, 비번 찾기를 하고 로그인했는데, 하하하 옛날 스윙 동영상이 촤라락 나열되어 있었다. '어! 어! 어! 푸하하하!'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젊네...'였다. 고작 3년 전인데 동영상 속의 내 모습은 앳되었다. 그동안 관리해서 예전보다 지금이 더 어려 보인다고 자부했는데... 아니었다. 특히 머리숱이... 이건 세월을 이길 수 없었다.


없었습니다


의정부로 이사오기 전, 아직 회사를 다니던 시절, 단골 미용실 원장님이 어느 날 머리를 보면서 이런 말을 했다.


"회사에서 하이바 쓰고 다니신다고 했던가요?"


"네"


당시 중대재해처벌법이 강화되면서 개인 안전장구에 대한 관리감독이 철저해졌다. 관리자 입장에서 안 쓰고 다니는 분들을 지적해야 했기 때문에 솔선수범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요즘 고객님 같은 분들이 많아요..."


"네?"


"하이바 오래 쓰신 분들이 정수리가 많이 비어서 오세요."


"네~에?"


아~ 이런. 완전비상이었다. 초비상!


"원장님 어떻게 해야 돼요? 네? 네?"


"하이바를 안 쓰는 게 제일 좋은데... 그럴 수 없잖아요? 사람들 안보는 데서는 그냥 벗고 다니세요... 두피를 압박해서 탈모에 굉장히 안 좋아요. 안 쓰고 다니면, 다시 좋아지기도 해요."


"그래요?"


그 뒤로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코로나 사태가 벌어지면서 미용실을 안 가도 되는 좋은 핑계도 생겼다. 기른 머리로 드라이를 잘해서 빈 정수리를 커버하고 다녔다. 당연히 안전모는 손에 들고 다녔다. 그러다가 공장장한테 딱 걸렸다.


"박대리~! 네가 안전모를 안 쓰고 다니면 현장 사람들은 어떻겠냐?"


아~ 머리숱은 포기해야 하나 했는데, 백신 맞고 몸상태가 메롱이 되어 결국은 그만뒀다. 그동안 기른 머리는 내 인생에 마지막 장발이 될 것 같다면서 앞에서도 언급한 히피펌을 선물해 줬다. 그리고 다시 잘랐다.


히잉~


백수가 되고 미용실 갈 일이 없어졌다. 여름에는 자외선 차단한다고 모자를 썼고 (볼캡은 탈모에 안 좋다고 해서 벙거지 모자를 썼다.) 겨울에는 춥다고 털모자를 썼다. 자연스럽게 미용실은 설날과 추석 명절에만 가는 연례행사가 되었다. 그 사이 탈모샴푸도 쓰고, 에센스도 바르고, 열손상이 적다는 그 비싼 다이슨 에어랩도 샀다. 그렇게 어떻게 어떻게 잘잘 넘기고 있었는데... 그런데... 그런데에~~!! 어느 날 머리를 감고 말리는데... 손에 느껴지는 정수리 부분과 주변머리 부분의 머리카락 쿠션감이 확연히 차이 났다.


헉! 설마... 설마... 스마트폰 카메라를 이용해서 정수리 부분 사진을 찍었다. 히잉~ 정수리의 허연 부분이 적나라하게 찍혀있었다. 그 후로 머리를 감을 때마다 스트레스였고, 드라이를 할 때마다 스트레스였고, 사진을 찍을 때마다 스트레스였다. 길거리에서는 마주치는 사람들의 정수리 밖에 안보였다. 그리고 괜한 자격지심에 누가 좀 유심히 쳐다본다 싶으면 '오늘 정수리 감추는데 실패했구나' 자책하며 얼른 집으로 돌아왔다. 모자는 마스크와 함께 외출 필수품이 되었다.


추석이 되어 미용실에 가야 했다. 의정부로 이사를 와서 정수리를 드러내도 부끄럼 없던 단골 미용실과는 바이바이한 상태였다. 우선 검색창에 미용실을 검색하니... 요즘은 전부 예약 시스템이었다. 그중에 유일하게 남자 미용사가 있는 곳에 예약을 했다. 퍼스널 컬러 컨설팅에서 추천한 헤어스타일과 예전에 머리 자르고 찍어놨던 사진을 디자이너에게 보여주며 스타일을 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냥 있으면 되는데, 또 자격지심에...


"정수리가 많이 비었죠?"


"......"


디자이너가 많이 당황했다. 나도 한여름이 거의 다 지나 간 가을 무렵인데 온몸이 땀으로 젖기 시작했다. 사태는 점점 더 악화되었다. 멋쩍어서 가만히 있지 못하고 다시 말을 걸었다.


"원래는 정수리가 이렇게 안 비었었는데... 머리숱 많았는데요... 탈모 약 먹어야 될까요?"


"음... 그래도 옆에, 뒤에는 아직 숱이 엄청 많아요!"


"예?!?!"


이건 무슨 소리인가... 영락없는 '장미의 이름' 수도사 스타일이라는 말 아닌가? 2:8, 1:9를 넘어서는... 남들은 대머리인 거 다 아는데, 본인만 옆머리로 덮어놓고 천연덕스럽게 '나 머리숱 많아요'하고 앉아있는... 부장님 스타일이라는 말 아닌가. 망했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적어도 덮는 머리는 하지 말자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디자이너에게 말했다.


"짧게 잘라주세요. 위에 남기고, 옆머리는 남기지 말고 하얗게 다 드러나게 바리깡으로 싹 밀어주세요."


"네? 아... 네... 네...."


보통 머리 자르는데 1시간 정도 걸리는데, 30분 만에 싹 밀고 나왔다.


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


군대 갈 때보다 더 짧게 자른 머리는 영 어색했다. 주변머리가 없으니 너무 추워서 저절로 목도리를 찾게 되었다. 아... 이러고 가족들을 만나야 되는데... 그야말로 '쪽 팔렸다.' 친구들은 뭐라고 할까? 뭐 대충 '실연당했냐...', '어디 안 좋은 일 있냐...', '미쳤냐?', '아직도 어린 애인 줄 아냐?' 이런 말을 하겠지? 어쩔 수 없다. 각오해야 했다. 뭐 내 잘못인가? 세월 탓인 걸 어떡해!


이것보다 훨씬 더 짧게 잘랐다. (나도 이런 얼굴이었으면...)


그런데 인생 참 마음대로 안 흘러가지... 짧은 머리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잘 어울린다', '어려 보인다', '20대로 보인다', '잘 생겨 보인다(희망사항, 거짓말입니다)' 우려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상황이 연출되자,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입가가 실룩거렸다.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이며 탈모 때문에 정수리가 비어서 이렇게 잘랐다고 이실직고했는데...


"그랬어? 전혀 몰랐어. 절대 그렇게 안 보여... 마스크 끼고 눈만 꺼내놓고 있으면 진짜 학생인 줄 알겠어. 아니 군인? 학생이라고 하면 너 또 정신 못 차리지?"


여태까지 약점을 덮으려고 부단히 노력하며 살았는데, 어떻게든 가려보려고 굳건히 세워뒀던 은폐, 엄폐물을 치우고 단점을 드러내자 도리어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졌다. 이런 걸 황당한 시추에이션이라고 하나? 남보다 잘 나 보이려 하는 마음을 포기한 요즘... 짧아진 주변머리만큼 내 주변에는 가짜는 사라지고 알짜배기 진짜들만 남겨지는 중이다. 머리 길면 샴푸도 많이 쓰고, 드라이도 좋은 거 써야 된다. 그런데 짧으면 슥삭 감고 탈탈 털면 끝이다. 샴푸도 많이 안 쓰고 드라이는 아예 필요가 없다. 히히히


콤플렉스가 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 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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