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아, 한 발 다가가도 되겠니? (4)
각질
세상이 사랑해 주지 않는다는 생각에 혼자 꿍해서 토라져 있다가, 점점 길어지는 무관심 때문에, 결국 제 풀에 지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은근슬쩍 돌아가려고 했는데... 역시 세상은 호락호락하지가 않다. 나 혼자 풀고 다가간다고 전부 받아주지는 않으려나 보다. '그만큼 봐줬으면 됐지... 얼마나 더?'라고 말하듯 세상은 내 심경의 변화를 비웃었다. 정확히는 그동안 묻어두었던 서운한 것들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토로했다.
세상으로 돌아가기 위한 계획을 하나 둘 다시 짜기 위해 작은 것부터 깨작깨작 움직여보고 있는데, 음... 뭐라고 할까? 어설프고 어리숙해 보였나? 세상은 먼저 부모님의 입을 빌려 서운함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식사하는 동안 말벗이나 해드릴까'라는 생각에 옆에 앉아있는데, 갑자기 계획을 물어왔다. 이전에도 '카페를 차리는 건 어떻냐? 바리스타 자격증을 따보면 어떻겠냐? 요리 배워라?'등등 이런저런 제안을 했었다.
그때마다 괜히 섣불리 건드렸다가 돈만 까먹는다고 버텼는데, 이번엔 질문을 던지라고 세상이 시켰나 보다. 잘됐다 싶어서 '글을 쓰고, 소설을 쓰고, 책을 내고, 작가가 되려고요'라고 말할까 하다가 꿀꺽 삼켰다. '아직 조그만 것 하나도 이룬 게 없는데... 뭐 하나 작은 성과도 없는데...'라며 자체검열을 해버렸다. 내세우면 안 되는, 최대한 감추고 몰래 스크럽제로 문질러 제거해야 할 각질 같은 계획이라며 스스로 평가절하해 버렸다.
쉽지 않네
부모님 앞에만 서면 '입신양명'이라는 큰 벽에 가로막힌다. 세상은 이점을 간사하게 잘 이용했다. 너무 만만하게 봤다. 부모의 마음으로 천천히 시간을 갖고 지켜봐 줄 줄 알았는데, 가차 없었다. 정신 차리라는 소리도 아니고, 내 안의 원죄(原罪)를 건드려버렸다. '나도 상처 줄 줄 안다'라고 하는 것처럼... 집밥을 거부하는 몸뚱이 때문에 뭘 먹고 있지는 않았지만, 만약 밥 한 숟가락이라도 뜨고 있었다면 많이 서러울 뻔했다.
세상은 부모님에게 막걸리를 더 권하며, 점점 노골적으로 서운함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나도 질 수 없어서, '음... 글을 발행하며 다행히 애정 어린 눈으로 봐주시는 몇몇 분들이 너무나도 감사하게 응원을 보내주셨다.' 이 점을 부각해서 '글을 쓰고 있는 게, 영 헛짓거리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어필하고 싶었다. 처음에는 같이 기뻐해주었다. 너무나 감사한 일이라고... 어떤 분들인지는 몰라도 진짜 고맙다고... 같이 기뻐해줬다.
하지만 세상은 지지 않았다. 한 병으로 끝내겠다던 막걸리에... 추가로 소주를 권하기 시작했다. 이번 술수는 앞으로 혼자 살아갈 나에 대한 걱정으로 포장돼 있었다. '이미 포화상태로 공멸의 길을 가고 있는 카페를 차리라고 했던 것은, 꼭 결혼은 안 해도 가게라도 꾸려가면서 사람들과 같이 어울려서 살아가야 하지 않겠냐'는... 자식으로서의 원죄에서 급선회하여, 진짜 세상이 서운해하는 인간으로서의 원죄를 건드려 버렸다.
유구무언, 그야말로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