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사는 문제 (3)
Lag Phase
'먹고사는 문제'를 주제로 고민하다 보니 갑자기 미생물생장곡선(Growth Curve)이 생각났다. 보통 세균이나 미생물을 확인할 때, 영양배지(nutrient medium)라는 곳에 샘플을 접종하고 배양시켜 확인하는데... 가장 기본적인 것이, 영양분이 포함된 한천을 납작하고 동그란 유리그릇(페트리디쉬)에 굳힌 것이다. 요즘은 기성품을 구입해서 사용하는 것 같다. '라떼는' 만드는 실습까지 따로 했는데... 참 격세지감이다.
뉴스에서 페트리디쉬에 곰팡이나 세균이 피어있는 것을 많이 봤을 것이다. 이렇게 미생물을 배양하면 시간에 따른 개체수를 그래프로 그릴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생장곡선이다. '시그모이드'라고 하는 S자형 곡선모양이고, Lag Phase (유도기) → Log Phase (대수기) → Stationary Phase (정체기) → Death Phase (사멸기)의 순서로 변한다. 시그모이드라고 했지만 4단계로 나누는 이유는 영양분공급의 한계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영양분을 계속 공급해도 정체기에서 개체수 최고점을 찍고 나면 서서히 줄어드는 양상을 보인다. 양분공급여부는 사멸기의 기간, 즉 얼마나 완만히 개체수가 줄어드느냐에 영향을 줄 뿐인 것 같다. 시간이 지나면, 아무리 양분을 공급해도 모든 미생물이 결국 사멸하고 만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고 할까... 뭐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설명하기로 하고, 먹고사는 문제해결이 만사형통이 아니라는 말이다.
Log Phase
첫 번째 유도기(lag phase)는 간단히 말하면 적응기이다. 스타크래프트 같은 전략시뮬레이션 게임을 시작하면 기지 한 곳과 일꾼 몇 마리가 주어지고, 처음 몇 분간 어떤 전략을 세우든 상관없이 자원을 모아야 하는 것과 같다. 그 뒤로 모아진 자원으로 전략에 따라 테크트리를 타며 유닛을 뽑고, 업그레이드하는 시기가 바로 Log Phase, 대수기다. 이 시기 미생물은 영양배지의 충분한 자원을 활용해 개체수를 폭발적으로 증가시킨다.
영양배지에 접종된 세균이 방사형으로 자라며 동그란 집락을 형성하는 것을 콜로니(colony)라고 하는데, 이 시기에는 접종되지 않은 곳, 이해하기 쉽게 말하자면 미개척지에도 콜로니들이 난립하게 된다. 영양배지라는 세계에, 인간의 역사로 치면, '대항해시대'가 펼쳐진다. 또한 개체수 증가에 초점이 맞춰지다 보니 각 개체의 저항력? 면역력?이 약하다. 그래서 인간의 역사로 치면, 흑사병이나 스페인 독감 같은 팬데믹에 취약하다. 미생물 배양이 무균실에서 이뤄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렇게 미생물생장곡선을 인간의 역사에 빗대어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이미 이런 시기를 지나왔음을 뜻하기도 한다. 즉, 지구라는 영양배지에 인간이라는 샘플이 접종된 후, 이미 오래전에 대수기가 지났갔다는 말도 된다. 초반의 영양배지배양의 밝고 희망적인 분위기에 어둠의 그림자가 드리우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대수기가 지나면 콜로니의 색이 점점 검게 변하며 정체기의 시작을 알린다.
Stationary Phase
대수기가 지나고, 정체기가 되면 여기저기 난립했던 콜로니들이 거대한 콜로니에 흡수통합된다. 그도 그럴 것이 넓고 넓었던 세계가, 개체수가 계속 증가함에 따라, 점점 좁아진다. 게다가 이제는 영양분도 점점 고갈되어 무궁무진할 줄 알았던 자원이 점점 한정된다. 군소 콜로니들은 점점 사라지고, 하나로 통합된 군락은 드디어 영양배지의 끝, 페트리디쉬의 벽에 다다른다. 더 이상 확장할 공간이 없어진다.
인간의 역사는 이 시기에 세계대전도 겪고, 대공황도 겪으며 개체수가 조절되었다. 개체수 증감이 없는 정체기에 들어선 영양배지의 세상에도 분명히 같은 일들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리고 그 뒤로 인간처럼 세계화도 추진하고, 자유무역체제도 구축하며 한동안 평화의 시대를 보냈을 것이다. 정체기는 그렇게 평화롭고 균형 잡힌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때부터 세상의 아이러니? 모순?이 시작된다.
지금까지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관점, 즉 미생물 중심의 관점이었다. 영양배지 전체의 관점으로 보면 자원은 점점 고갈되어 가고, 그 안은 미생물의 대사물질과 그로 인한 독성 물질이 쌓여가며, 영양배지 속 환경은 점점 악화되어 간다. 그 덕분에, '덕분'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이 시기의 개체들은 저항력? 면역력?이 꽤 강하다. 앞서 말했듯이 처음에 하얗고 무해하게 보였던 콜로니들은 점점 검고 독한 모습으로 변한다.
Death Phase
나중에 설명하겠다고 했던, 양분이 계속 공급돼도 결국 미생물이 전부 사멸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이제 설명하겠다. 영양배지 속 미생물은 처음엔 한정된 공간이 점점 좁아지고, 무한할 것 같던 자원이 고갈되는 문제에 직면한다. 그래서 여기까지 살펴보고는 먹고사는 문제만 해결되면 만사형통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효율성, 수율, 낭비요소 제거, 대체제 개발 같은 근시안적인 해결책에 집중한다.
하지만, 물론 자원이 무한정 공급될 리도 없지만, 만약 그런 일이 실현된다고 해도 전부 사멸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미생물 스스로 만들어낸 대사산물과 그것에서 기인한 독성물질 축적으로 인해 파괴되는 환경 문제다. 환경문제는 꼭 산업화로 인한 각종 공해, 오염, 플라스틱 쓰레기, 온실가스 배출, 이상기후... 이런 전 지구적인 문제만을 말하지 않는다.
각자도생이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현재 우리들의 시각은 종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요즘 불어닥치는 혼자 살기 열풍... 이것은 역사적 사건이 아닌 개인적 차원에서의 개체수 조절 작용이라고도 생각된다. 그리고 어쩌면 한정된 영역 내에서 그나마 살기 좋은 환경을 확보하려는 개인적인 노력으로도 보인다. 영양배지 속의 미생물들이 스트레스로 전부 사멸하는 것처럼 우리도 곧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 먹고사는 문제해결이 만사형통은 아니다.
지구라는 영양배지는 생장곡선 어느 단계쯤에 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