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사는 문제 (5)
먹고 살만 해지니 갈 날이 얼마 안 남았더라~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흐른다. 처음 이 사실을 깨달은 것은 아마도 같은 동에 사는 아이들이 자라는 것을 지켜보면서부터였을 거다. 엘리베이터에서 어쩌다 한 번씩 마주치는 아이들은 어느새 무럭무럭 자라 있었다. 쪼그만 게 엄마 손 잡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서는 버튼 자기가 누르겠다고 떼쓰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 나보다 키가 더 큰 성인이 되었다. 말은 건네 본 적 없고, 얼굴만 아는 사이... 아파트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잡아놓고 부랴부랴 뒤따라오는 나를 기다려주면, 예전에 '고마워'라고 했는데... 이제는 '감사합니다.'라고 존댓말로 인사한다.
그런 모습에 '언제 이렇게 세월이 흘렀지?'라는 생각이 들면 금방 서글퍼진다. 그리고 문득 거울 속에 비친 나를 보고 깊은 한숨을 내쉬게 된다. 나의 모습은 어느새 변해있었다. 흰머리가 늘고, 주름이 생기고, 곳곳에 빈 곳이 보이고, 많이 허술해졌다. 젊은 시절의 빽빽함과 활기는 사라져 있었다. 노화는 어느 순간 갑자기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다가오는 손님과 같다. 그 손님은 불청객이다. 되도록 오지 못하게 저 먼발치서 막고 싶지만, 아무리 지키고 서있어도 우리가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조금씩 다가와 우리를 변화시킨다. 그리고 그 변화는 때로는 아프고, 때로는 서글프다.
노화가 주는 서글픔은 단지 외적인 변화에 그치지 않는다. 내가 아끼는 사람들, 나보다 먼저 이 세상을 떠날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을 보며 느끼는 마음의 아픔 또한 크다. 그들이 남긴 빈자리는 쉽게 채워지지 않는다. 오랜 시간 함께하며 쌓아온 추억과 사랑이 남긴 자국은 깊고, 그 깊은 자리는 쉽게 아물지 않는다. 아무리 철저히 준비하고 대비해도 소용없다. 노화는 노력해도 막을 수 없고, 피할 수 없는 현실이기에 우리는 그 앞에서 무력함을 느끼게 된다.
노세 노세 젊어서 놀아. 늙어지면 못 노나니~
이제 막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지난 나도 이럴진대... 부모님 세대는 어떨까? 거울에 비치는 모습이 문제가 아니다. 이제는 다리에 힘이 없다는 푸념을 늘어놓는다. 가끔씩 온천에 갈 때면 전보다 앙상해진 아버지의 다리에, '아~ 이별의 순간이 얼마 안 남았구나'를 실감한다. 그리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술담배 좀 끊으라는 나의 잔소리가 이어진다. 그러면 자신의 다리처럼 앙상해진 겨울나무를 바라보며 이렇게 혼잣말을 하곤 한다.
"아직 쌩쌩한 것 같은데 말이야. 이제 좀 살만해지니까... 이제야 좀 인생이 어떤 건지 알 것도 같아지니까... 좀 만만해졌다 싶으니까... 갈 날이 얼마 안 남았단다. 내가 살면 얼마나 더 살겠나 그런 생각이 든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이 노랫말은 단순히 젊음의 시간을 즐기라는 의미를 넘어, 인생의 순간순간을 소중히 여기라는 깊은 철학이 담겨 있다. 젊을 때는 미처 깨닫지 못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의미를 점점 더 실감, 아니 절감하게 된다. 그러니까 젊은이들이여 좀 귀엽게 봐주자. 꼰대질이네, 갑질이네, 노망 났네, 망령들의 탄식이네... 여러분이 극혐 하는 모습이, 어쩌면 그 세대 어르신들의 최후의 발악일지도 모른다. 정말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분들의, 젊어서 못 논, 단지 한풀이뿐 일지도 모른다.
분명히 왜 저러는지 이해는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날 세울 필요는 없다. 세대차이는 칼로 물 베기인 부부싸움 같은 그런 것이다. 죽음 앞의 인간은 모두 평등해서... 죽음이란 절대 평등 앞에서 인간은 나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반드시 나에게도 그런 서글픈 날이 찾아온다. 그러니 저물어가는 그들의 시간을 그냥 아름다운 노을처럼 감상하자. 그리고 이제 막 정수리 위에서 햇빛을 내리쬐기 시작한 자신의 시간을 낭비하지 말자. 너무 먹고사는 문제에만 치중하지 말고, 너무 앞만 보고 달리고 버티며 살지 말자. 잘살지 말고,
잘 살아보는 게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