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을 가장한 오디션, 오디션을 가장한 상담
상담해 준 분이 그렇게 유명한 PD님인 줄 몰랐어
* 알림 : 10년 전의 일을 기억에 의존해서 쓰다 보니 약간의 각색이 있을 수 있습니다. 등장하는 인물은 최대한 간단하고 객관적으로 묘사했습니다. 연락이 안 돼서 본인들에게 이 글을 쓴다는 얘기를 안 하고 쓰고 있거든요.
성우학원에 다닌 얘기를 시작하기 전에 성우교육기관의 종류에 대해서 먼저 얘기를 해야 할 것 같다. (나름대로 분석한 내용이라 틀린 점 있으면 댓글 달아주세요. 즉시 수정하겠습니다) 성우교육기관은 학점은행제로 운영되는 성우학과와 성우학원으로 나눌 수 있다. 성우학과는 한국예술원과 한국방송예술진흥원이 대표적이고, KBS라디오국 출신의 PD 님들과 경력 많은 성우님들이 교수진으로 있다. 4년제 학사학위를 받을 수 있고, 내가 성우공부를 시작했던 2013~14년도가 초창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같이 학원을 다녔던 당시 고등학생 동생이 이곳으로 진학했는데 선배가 없었다고 했으니 아마 맞을 것이다. 요즘은 이곳 재학생 중에서도 공채합격자가 배출된다. 성우공채는 기본적으로 고졸이면 응시할 수 있기 때문에 대학 재학 중에도 고졸로 지원이 가능하다. 단 남자는 군필자만 된다.
성우학원은 크게 방송아카데미와 사설학원으로 구분할 수 있다. 방송아카데미는 방송국에서 운영하는 학원으로 KBS방송아카데미가 TOP이다. 대학교로 따지면 SKY급으로 보면 된다. KBS방송아카데미를 다녔던 형에게 들었는데, 등록 전에 레벨테스트가 있고 실력미달이면 퇴짜를 놓는다고 한다. 어쨌든 성우지망생들 사이에서는 어느 정도 실력을 쌓고 가는 곳이다. 실제로 공채시험 심사위원이 될 KBS라디오 PD 님들과 이름을 대면 알만한 KBS출신 스타성우님들이 강사진으로 있어서 실력 있는 성우지망생들이 KBS성우공채시험 전에 눈도장 찍으러 가는 곳이기도 하다.
사설학원은 방송국 제휴 학원과 개인 운영 학원으로 나눌 수 있고, 그 외에 코로나19 때문에 비대면 활동이 주를 이루며 공무원입시학원처럼 화상녹화강의, CAM을 이용한 화상라이브강의도 있는 것 같다. 또 성우지망생들끼리 음성채팅을 통한 스터디 모임도 있고, 애니메이션 더빙만 전문으로 하는 애호가 모임도 있다. 방송국 제휴 학원은 방송국의 이름을 빌리는 것으로 사실상 성우반이 있기는 한데 실제 운영이 되는 것 같지는 않고 요즘은 개인 운영 학원이 대세다. 개인 운영 학원도 예전에는 방송국에서 프리랜서로 독립하신 PD 님들이 운영하는 곳과 경력이 많은 스타성우님들이 후진양성을 위해 운영하는 학원으로 나눌 수 있었는데 전자는 요즘 거의 없다. 진짜 드물게 개인레슨을 하는 수업도 있다. 학원을 통하거나, 성우님들이 직접 모집을 하는 경우도 있다.
위의 기관들은 대부분 서울에 모여있고, 일부 학원들이 지방 지망생을 위해 대전, 부산 같은 대도시에서 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지방에서는 꼭 성우 교육 기관이 아니더라도 스피치 학원이나 쇼핑호스트 양성 학원, 아나운서 학원 등이 있지만 방송용 말하기는 배울 수 있겠으나 성우 연기공부를 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요즘은 성우 학원 대신 연기 학원(학과), 뮤지컬 학원(학과)을 통하기도 한다. 이곳도 발성, 연기는 배울 수 있지만 무대연기가 주라서 마이크 쓰는 법을 배우기에는 한계가 있다. 10년 전만 해도 성우학원 강사진이 전부 성우님들이었는데, 요즘은 연극배우들도 강사진 목록에서 보인다. 실제로 과거에는 연극영화과에서 성우로 많이 전향을 했고 많이 배출됐다. 요즘은 꼭 그렇지도 않은 것이... 회사를 다니다가, 일반 대학을 다니다가, 레크리에이션 강사를 하다가, 등등 많은 분야에서 성우가 배출된다.
나는 처음 학원을 고를 때 여러 군데 상담을 받고 고른 게 아니고 직장과 거주지에서 가까운 곳을 골랐다. 그리고 그곳에서 5년을 다녔다. 주말 기초반부터 다녔는데, 멤버는 계속 바뀌었지만, 주요 멤버가 2~3년씩 같이 있었기 때문에 어쩌다 보니 내가 고인 물이 돼서 반장으로 클래스를 이끌게 되었다. 마지막에 학원운영체제가 바뀌고 사사해주시던 선생님이 그만두시면서 한번 학원을 바꿨는데 한 달 정도 다니다가 독학으로 바꿨다. 한 곳만 다녔어도 멤버들이 계속 바뀌면서 그들의 다른 학원 다닌 얘기를 많이 들을 수 있었다. 다른 학원도 거의 비슷한 시스템이었다. 왜냐하면 학원마다 제시하는 기본 커리큘럼이 있기는 하지만, 실력이 똑같이 발전하지 않기 때문에 진도는 개개인에 따라 다르다. 그리고 클래스를 담당하시는 강사님(성우님)에 따라 강의 스타일이 다르기 때문에 학원 커리큘럼은 참고사항일 뿐이고 실제 수업은 다르게 진행된다. 또한 강사님이 한 학원에 전속으로 강의하시는 게 아니고, 성우계 역사가 깊다 보니 강의 스타일은 거의 대동소이하다. 그래서 어느 학원을 다니느냐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내가 다닐 학원의 선생님이 누구시냐가 중요하다. 개인적으로 기초반은 경력이 많은 성우님이 강의하는 학원을 추천한다. 다양한 지망생을 많이 만나보셔서 설루션이 다양하다. 어느 정도 실력을 쌓고 나서는 이제 막 프리랜서가 된 성우님들이 지망생들의 마음도 잘 알아주고, 상대적으로 덜 바쁘시고, 열정도 있으셔서 강의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잘 가르쳐주신다. 가끔씩 무언가에 막막해져 술에 취해 카톡으로 푸념해도 잘 받아주신다. 물론 경력 많으신 성우님들이 안 받아주신다는 것은 아니고 왠지 예의에 어긋날 것 같은... 부모님이 아무리 사랑해 주셔도 학교 선배가 더 편할 때가 있는 것처럼...
처음 학원에 상담 신청을 할 때 실장님이 전화를 받으셨는데 약속한 날짜에 본인이 없어서 다른 분에게 상담받을 거라고 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학원에 도착해서 작은 강의실로 안내받았다. 지원동기 같은 자기소개서를 작성하면서 대기했다. 잠시 후, 중년의 남자분이 들어오셨는데 자기소개서를 보시고 이것저것 면접처럼 질문하셨다. 성심성의껏 답하고 마지막으로 왜 성우가 되고 싶은지 물어보셨다. '카페 차릴 때 멋진 목소리로 손님을 응대하려고요'라는 진짜 의도를 말할 순 없었다. 뭐라고 했었는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했던 것만은 확실하다. 마지막 대답을 들으시더니 사실은 자기가 이곳 원장이고 동시에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PD라고 하셨다. 그리고 내 목소리가 어떤지 알고 싶어서 계속 말을 건 거고, 이렇게 들어보니 평범하지만 PD들이 선호하는 성우 같지 않은 목소리라서 잘 훈련하면 좋을 것 같다고 말씀해 주셨다. 그리고 내레이션 대사를 하나 주시면서 읽어보라고 하셨다. 들어보시고는 말하는 목소리랑 읽는 목소리가 크게 다르지 않아서 좋다고 해주셨고, 학원 입학 안내를 해주셨다. 이것이 상담, 레벨테스트, 오디션을 겸한 것이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KBS방송아카데미는 레벨테스트 결과에 따라 퇴짜를 놓기도 하지만 사설학원의 경우는 수강생 한 명 한 명이 모두 수입이기 때문에 퇴짜를 놓지는 않는다. 다만 이 상담 같은 오디션 결과에 따라 반배정을 한다. 여기서 잘 통과하면 바로 심화반으로 가기도 한다. 어쨌든 오디션 같은 상담? 상담 같은 오디션을 마치고 학원등록을 하고 몇 월 며칠에 강의시작이라는 안내를 받고 나왔다. 나오자마자 너무 궁금해서 PD님 이름을 검색했다. 우와... 그런데 진짜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PD님이었다. 엄청 유명한 분이었다. 그 뒤로 자주 뵙지는 못했지만 가끔 학원에서 마주치면 잘해보라고 응원해 주시던 기억이 난다.
그 뒤로 성우학원답게 이름만 알거나 목소리만 알던 셀럽들을 자주 마주쳤다. '어! 어디서 많이 듣던 목소리인데...'라고 신기해하며 학원을 다녔던 것 같다. 개그맨 더빙영화가 붐이었을 때는 당시 '개콘'의 유명한 사람은 거의 다 본 것 같다. 나는 운 좋게도 지금은 찾기 힘든 PD님이 개인 운영하시는 학원을 다닐 수 있었다. 실제 더빙작업이 이뤄지는 스튜디오에서 엔지니어가 같이 참여하는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 요즘은 성우님들이 운영하시는 학원도 스튜디오 시설이 대부분 갖춰져 있으니 걱정할 필요 없다.
처음 성우공부를 시작할 때, 학원 어디로 갈까... 너무 고민하지 말고 가까운 곳으로 가는 것을 추천한다. 지방에서 서울로 학원을 다닐 각오를 한 지망생은 자기가 타는 교통편이 편한 곳으로 추천한다. 지방에서 오면 아마도 주말반을 다닐 가능성이 큰데, 주말반은 항상 강의시간이 오버되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다닐 반의 선생님이 누구이신지는 확인하고 등록하기를 추천한다. 혹시 내가 진짜 좋아하는 성우님을 직관할지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