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순한 의도, 인생의 친구들을 만나다 그런데 사실 지금은 연락이 안돼
대망의 성우 학원 첫날이다. 수업은 2~4시까지 연기수업, 4~6시까지 녹음수업이다. 수업시작은 2시인데 12시부터 도착해서 주변을 배회했다. 늦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고, 이래저래 준비를 마치고 조금 일찍 나선 게 2시간을 일찍 도착해 버렸다. 토요일이라서 아점을 먹은 상태라 점심을 먹기도 애매하고, 주변 지리를 잘 몰라서 먹어봤자 햄버거일 게 뻔해서 별로 먹고 싶지 않았다. 콜라를 마시고 갔다가 트림이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학원 주변을 1시간 정도 배회하다가 1시 정도면 들어가서 기다려도 되겠거니 생각하고 학원에 올라갔는데 올라가는 계단부터 캄캄하다. 출입문은 셔터가 내려가 있고 인기척 하나 없다. 이게 말로만 듣던 수강료 떼먹고 야반도주? ‘에이 설마, PD 님인데...‘ 그러고 보니 검색했을 때 사진은 없었다. ’2시부터니까 아직 안 열었나 보지. 오늘은 주말이잖아’라고 생각하고 학원 건물을 나와 별 수 없이 주변에 제일 가까운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커피도 입냄새가 날 수 있을 것 같아서 페퍼민트 차를 주문했다. 첫 수업이라고 엄청 신경 쓰인다. MBTI를 이쯤에서 밝혀야 전개가 이해될 것 같다. INTJ-t. 설명 끝! 그런데 삼천포로 잠깐 빠지면 글쓰기에 빠져서인지, 철학공부를 해서인지, 독서를 해서인지, 아니면 전부다 때문인지 어제 다시 검사를 했을 때 INFJ-t가 나왔다. INTJ-t가 전체 인구의 2%밖에 안 되는 희귀 성격이라고 해서 ‘그래, 난 역시 특별한 사람이었어’라고 턱을 치켜들고 있었는데 INFJ-t는 1%란다. 턱을 어디까지 들고 다녀야 할지...
어쨌든 차를 시켰으니 30분 이상은 책을 읽으면서 기다릴 수 있다. 성우 공부를 하려면 녹음기가 필요하다고 해서 전날 근처 하이마트에서 녹음기를 샀다. 충전도 빵빵하게 하고 녹음이 잘되는지 다시 점검도 했다. 1시 40분 정도에 다시 학원건물로 향했다. 이번엔 계단에 불도 켜져 있고 셔터도 올라가 있다. 내부도 밝다. 학원 앞 유리문을 미는데 덜컹 소리가 난다. 문이 잠겨있다. ‘이런! 뭐지’ 당황해서 유리문 안을 이리저리 살펴본다. 복도밖에 안 보인다. 지난번 왔을 때 보니 사무실은 저 안쪽에 있는 것 같았다. 유리문을 똑똑똑 두들겨 보았지만 반응이 없다. ‘어쩌지? 어쩌지?’ 그때 유리문 옆에 다소곳하게 버튼이 하나 있다. ‘이걸 누르라는 건가? 혹시 아니면 어쩌지? 눌러봐? 말아?’ 앞에서 갈팡질팡 하고 있는데, 오디션을 봤던 강의실문이 천천히 열리더니 그 안에서 사람이 나온다. 우와 어찌나 반갑던지 유리문에 착 달라붙어 문 좀 열어달라는 제스처를 했다. 어려 보이는 남자였는데, 나랑 분명히 눈도 마주쳤고 문 열어달라는 제스처도 봤는데... 엄청 당황하더니 사무실 쪽으로 빠르게 사라진다. ‘어! 어! 이 무슨 황당한 시추에이션이지? 진짜 돈 떼먹고 오리발 내미는 건가?‘ 계단에서 막 소리를 지르기도 창피하고, 어이가 없어서 황당해하고 있는데 남자가 사무실 쪽에서 다시 나온다. 이번에는 한 사람 더 있다. 여자분이었는데 유리문 앞에서 내가 머뭇머뭇 대고 있자 미소를 지으며 문옆에 버튼을 누른다. 그러니 철컥하면서 문이 열린다. 여자분이 “OO님?”하고 내 이름을 말한다. “네!”하고 출석부에서 이름이라도 불린 듯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 전화통화로 목소리만 들었던 실장님이었다. 남자는 같은 반 친구였는데 본인도 오늘 처음 와서 어찌할 바를 몰랐단다. 스튜디오 안에 고가의 장비 때문에 문이 자동으로 닫히는 시스템이었다. 처음 오는 사람들이 당황할까 봐 일부러 실장님이 열어놨는데 남자분이 들어오면서 습관적으로 문을 닫았나 보다. 그렇게 문이 자동으로 잠겨버리고 실장님은 문을 열어놨으니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하고 있었고, 그 남자도 내가 학원 관계자인 줄 알고 어찌할 바를 몰라 사무실로 얼른 도움을 요청하러 간 거였다. 수업시작 하기도 전에 진이 다 빠질 지경이다.
실장님이 강의실에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하고 사무실로 가셨다. 나랑 그 남자는 같이 강의실에 들어가 앉았다. 도착한 사람은 나와 그 남자뿐이었다. 어색함이 강의실 안에 가득해졌다. 아~! 실장님이 통성명이라도 좀 시켜줬어야 하는데... 깜빡하시고 그냥 사무실로 가버리셨다. 아니면 통성명 정도는 알아서 하리라 생각했나 보다. 그냥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강의실에 자리를 잡고 각자 할 일을 했다. 뭐 나는 원래 이런 상황에 익숙해서 잠깐의 어색함을 뒤로하고 먼저 말을 걸.... 지 못 하고 귀에 이어폰을 꽂았다. 잠시 후 실장님이 여자 몇 분과 강의실로 들어왔다. 나이가 좀 있는 여자 한 분, 내 나이대로 보이는 여자 두 분, 조금 어려 보이는 여자 한 분, 그리고 실장님 이렇게 5명이었다. 나이가 제일 많아 보이는 분이 성우 선생님인가 보다 하고 자세히 봤다. 안경을 쓰시고 약간 지적으로 보이는 분이었다. 몸매도 날씬하시고 청바지에 목이 가려지는 검은색티를 입으셨는데 딱 교수님 스타일이었다. 나이대가 비슷해 보이는 두 분은 엄청 예뻤는데 화장도 진하고, 한분은 블라우스에 치마정장, 한분은 검은색 원피스였고 구두는 두 분 다 반짝거렸다. 둘 다 화려한 차림이었다. 어려 보이는 분은 후드티에 면바지 차림으로 대학생 정도로 보였다. 실장님은 꽃무늬 원피스였던 걸로 기억한다. 가을로 막 넘어가는 9월 중순이어서 모두 여름, 가을 차림이 섞여있었다. 그러고 보니 10년 전만 해도 9월이 이렇게 덥지 않았던 것 같다. 해가지면 쌀쌀해져서 코트를 가져온 분도 있었다. 남자는 위아래 검은색으로 청바지와 셔츠를 입고 있었고, 나도 청바지에 반팔 셔츠를 입고 있었다. 실장님이 아직 한 명이 안 왔는데 조금 늦는다고 전화가 왔으니 시간도 됐고 해서 수업을 시작하겠다고 했다.
강사님을 소개한다고 하시면서 말을 이어가시는데 성우님이라고 생각했던 나이 좀 있어 보이는 분이 내 쪽으로 와서 앉았다. 그리고 성우님으로 소개되신 분은 검은색 원피스를 입고 있던 화려한 분이었다. 어~! 어~! 진짜 당황했다. 예상이 빗나간 것도 그렇고 지금 옆에서 안경을 닦고 있는 나이 좀 있으신 분이 성우지망생이라고? 군대에서 신병이 처음 자대배치되어 왔을 때 병장이 계급장 떼고 신병 안심시킨 다음 뒤통수치는 그런 상황인가? 성우지망생에 입문하면 이런 통과의례가 있나? 의심했더랬다. 왜냐하면 다 같이 들어왔으니까. 충분히 작당모의를 하고 들어올 수 있었다. 하지만 그분은 성우지망생이 맞았고, 화려한 검정원피스분이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이 책상 앞에 앉아서 가방에서 책을 한 권 꺼내더니 낭독하셨다. 어! 목소리가... 목소리가... 대박이었다. 신기했다. 책이 서혜정 성우님의 ’속상해하지 마세요‘ 였던 것 같다. 그렇게 한 페이지 정도를 읽어주셨다. 약력소개가 필요 없었다. 한방에 끝났다. 의심의 여지가 없다. 성우님이다.
이번엔 같은 반 친구들의 자기소개 차례다. 나이 좀 있어 보이는 분은 역시나 40대 중반이고, 자녀들이 다 크고 나서 동네에서 동화구연봉사를 하다가 성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왔다고 했다. 앞으로 누님으로 칭하기로 했다. 나랑 연배가 비슷해 보이는 투피스 치마정장 여자분도 역시 나보다 2살이 많다. 회사를 다니다가 잠시 쉬고 있는데 예전부터 자기가 얘기할 때마다 친구들이 너무 재밌어해서 성우에 관심이 생겼다고 했다. 앞으로 누나라고 칭하기로 했다. (글에서는 셋째 누나로 칭하겠다.) 어려 보이는 여자분은 현재 직장을 다니고 있고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덕후여서 성우가 되고 싶어서 왔다고 했다. 앞으로 이름을 부르기로 했다. (글에서는 여동생으로 칭하겠다.) 남자는 고등학생이었다. 라디오에 자기 목소리가 나오는 상상을 하다가 성우가 되면 될 것 같아서 왔다고 했다. 성우학과로 진학도 하고 싶다고 했다. 앞으로 이름을 부르기로 했다. (글에서는 남동생으로 칭하겠다.) 나도 말도 안 되는 성우지망생 지원동기를 말하고 소개를 마쳤다. 실장님이 나가기 전에 반장을 뽑아야겠다고 했는데... 남자 2명 중에 내가 형이고, 나이도 딱 중간이라서 그냥 내가 뽑혔다. 초중학교 때도 늘 반장이었는데... 신입사원 연수원에서도 나이가 제일 많다는 이유로 반장이 되고, 여기에서는 나이가 딱 중간이라고 또 반장이다. 반장을 해야 하는 운명을 타고났나 보다. 아~ 이런 데서는 나서지 않는 게 좋은데, 첫인상이 중요할 것 같아서 거절도 못하고 그냥 그러겠다고 했다. 실장님이 자기 할 일을 다했다는 듯이 열심히 하라는 말을 남기고 강의실을 나갔다.
바통을 이어받은 선생님이 본격적인 수업을 하기 전에 원형으로 대열을 만들자고 하셨다. 너도나도 자기 의자를 들고 자리를 정리하고 있는데, 한 명이 헐레벌떡 들어온다. 화장이 짙어서 나이를 가늠할 수 없었지만 인형같이 예쁘장하니 약간 깍쟁이 같아 보였다. ’생긴대로 지각을 하는 구만‘이라고 생각해서 첫인상은 별로 안 좋았다. 어쨌든 갑자기 한 명이 추가되며 우리 반 6명이 다 모였다. 원형으로 모여 앉고 새로 온 분이 자기소개를 했다. 헉 나보다 3살 누나였다. (글에서는 둘째 누나로 칭하겠다.) 연기자가 되고 싶었는데 나이가 너무 많아서 성우라도 되러 왔다고 했다. 역시나 얼굴 믿고 왔구나 생각하며 첫인상이 더 안 좋아졌다. 이제 6명 모두 자기소개까지 끝내고 원형으로 둘러앉게 되었다. 선생님이 지금까지 한 자기소개는 다 잊으라고 하셨다. 그런 형식적인 것 말고 지금부터 눈을 감고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자기 자신을 찾아가 보자고 하셨다. 어렸을 때는 어땠는지, 부모님은 어땠고, 살던 동네는 어땠으며.... 학교는 어땠는지 하나하나 천천히 기억을 더듬어 보자고 하셨다. 갑자기 지각한 둘째 누나가 울기 시작했다.
선생님이 뭔가 생각이 났냐면서 잠시 진정시키시더니 무슨 생각이 났는지 괜찮으면 모두 앞에서 말할 수 있으면 말해달라고 했다. 둘째 누나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더니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린 시절 가정사부터 현재 살아온 인생까지 쭉 말했다. 드라마였다. 고생이란 고생은 다한 사람이었다. 처음 본 사람들 앞에서 저런 얘기를 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모조리 말했다. 파란만장 그 잡채였다. 중간중간 감정이 복받칠 때는 옆에 있는 누님과 셋째 누나가 휴지도 쥐어주고 등도 토닥여주었다. 둘째 누나의 얘기에 나빴던 첫인상이 좋은 쪽으로 바뀌어가면서 이야기 속에 빠져있다가 갑자기 내 차례 걱정이 되었다. 이건 뭐지 싶었다. 두 번째 순서로 고등학생 남동생이 말을 했다. 이 친구도 어린 친구가 사연이 만만치 않다. 힘들게 살았다. 거기다 성우 진로를 반대하는 부모님을 어렵게 설득해서 학원을 왔더랬다.
눈 깜짝할 사이에 1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나는 드라마 2편을 본 것 같았다. 어쩜 이렇게 하나같이 드라마 같은 삶을 살아왔는지... 둘째 누나가 선빵을 저렇게 날려놨으니 나머지 사람들 모두 드라마를 쓸 수밖에 없는 분위기였다. 내 차례가 되었고, 진짜 친한 친구들에게도 자존심 때문에 말하지 못했던 마음속 저 깊은 곳에 숨겨놨던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살아온 이야기를 하면서 잊고 지냈던 아니 잊으려 했던 어린 시절 이야기에서 몇 차례 울컥했다. 말을 못 잇고 울기도 했다. 얘기하다가 막 우는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TV속에서 정신과 상담에서 볼 법한 상황이었다. 한 편의 모노드라마 같은 이야기를 마치고 나자 나를 덮고 있던 껍질이 한 꺼풀 벗겨진 것 같았다. 홀가분했고 두려움이 덜해졌다. 우리 6명은 그렇게 2시간 만에 인생 베스트 프렌드가 되었다. 발가벗은 갓난쟁이들 같은 느낌이었다고 기억된다. 새로 태어난 것 같기도 했다. 앞에서 본인들의 살아온 얘기를 진짜 드라마틱하게 잘 풀어서 여동생 한 명은 시간이 부족하다는 핑계로 어영부영 끝났다. 나중에 여동생 얘기가 어영부영 끝난 게 안타까워서 술자리에서 얘기해 달라고 조르다가 제대로 얻어맞았던 기억이 있다. 본인은 숨기고 싶은 얘기라서 잘 됐다 싶었는데 내가 집요하게 파고드니까 할 수 없이 술기운에 얘기는 했는데 많이 속상했었나 보다. 술집에서 지하철 역까지 등짝 스매싱을 당하며 집으로 향했다.
프롤로그에 성우학원에 가게 된 사연을 주저리주저리 쓴 이유도 진실한 글을 쓰기 위해서 그때의 나를 찾아가 본 것이다. 아... 연기란 것이 이런 거구나...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안다. 진지하게 진실하게 진짜 나를 찾아가는 것이 연기라는 것을... 내가 지방 지망생들에게 스피치 학원이나 아나운서 학원을 추천하지 않는 이유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렇게 글로 기억을 더듬어가 보니 연기는 글쓰기랑 비슷한 것 같다. 다만 표현수단이 말이라서 생생하고 스피디하다는 것이 차이점인 것 같다. 내가 유명해졌으면 당당히 선생님 실명을 밝히고 감사합니다라고 쓰겠지만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다. 혹시 나를 기억 못 하실지도... 왜냐하면 이 선생님은 개인사정으로 딱 2주만 봐주시고 다른 선생님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연기 수업은 이렇게 시간이 모자를 정도로 2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고 우리 6명은 껍질을 한 꺼풀 벗고 갓난아기가 된 것 같이 홀가분한 마음으로 자기 자신을 조금 더 알게 되었다. 그리고 똘똘 뭉치게 되었다. 참 성우지망생에게 휴대용 녹음기는 필수다. 스마트폰 녹음기능이 있으나 배터리 문제도 있고, 용량 문제도 있다. 휴대용 녹음기를 내가 가지고 있어서 우리 반은 내가 수업을 전부 녹음해서 멤버 모두에게 메일로 녹음파일을 전송해 줬다. 반장이니까... 요즘 녹음기가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수업은 전부 녹음해서 다음 수업 때까지 반복해 들으면서 연습하는 것이 좋다. 수업에서 내 것 하느라 바빠서 다른 사람 하는 것을 못 듣게 되는데 그럼 손해다. 다른 사람 연기도 공부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녹음기는 필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