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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펜 입에 무는 거 아무 소용없어요

그냥 쭉쭉 펴서 읽으세요

by 철없는박영감

다소 충격적이었던 연기수업을 마치고 두 번째 시간, 녹음수업시간이 되었다. 강의실을 옮겨 스튜디오로 향했다. 왜 문이 자동으로 잠기는 시스템인지 이해가 됐다. 딱 봐도 비싸 보이는 복잡한 장비들이 있었고 여러 대의 애플 컴퓨터들이 있었다. 역시 방송예술계는 애플을 많이 쓰는 것 같다. 여기를 조정실? 디렉팅실?이라고 했던 것 같다. 정확하지 않으니 그냥 스튜디오라고 하겠다. 녹음을 하는 마이크가 있는 곳은, 영화에 보면 마치 취조실 같은 데서 볼 수 있을 것 같은 유리창 너머로, 방음시설이 완벽하게 되어있는 곳으로 따로 마련돼 있었다. 녹음실이라고 했는데 꽤 넓었다. 성우님들 약 10명이 저 안에서 화면으로 장면을 모니터 하며 더빙 작업을 한다고 한다. 10명까지 모여야 하는 대작(大作)은 거의 없지만, 대작을 작업할 수 있는 충분한 넓이였다.


어쨌든 두 번째 시간 녹음수업시간에도 실장님이 들어오셨다. 연기수업시간과 다르게 혼자였는데 실장님이 바로 강사님이었다. 실장님의 본업은 이 스튜디오의 PD였다. 원장님이 메인 PD, 실장님이 보조는 아니고 용어가 있는지 모르겠다. 하여튼 PD 님이었다. 애니메이션 연출을 꽤 하신 경력이 있는 PD 님이었다. 오늘은 내레이션을 해볼 거라고 하셨다.

"우리는 '내레이션'이라고 쓰고, '나레이션'이라고 읽죠!"

내가 기억하는 첫 수업 멘트다. 연기수업시간에 급속도로 친해진 우리 6명은 스튜디오에 대기하면서 충격에서 못 벗어난 듯 흥분한 상태로 수다 삼매경에 빠져있었는데, 실장님이 프린트물을 나눠주시면서 우리를 주목시킨 첫 멘트였다. 그 프린트물이 지금은 어디 있는지 모르겠는데 대충 기억나는 것이 분위기(톤), 속도(템포), 음의 고저. 이 세 가지 기본 개념에 대한 설명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내레이션 대사가 있었다. 이것을 녹음실에 들어가서 마이크로 직접 녹음한 다음 스튜디오에서 다 같이 들으며 피드백을 듣는 식으로 수업이 진행되었다. 이론 설명을 듣고 우리 6명은 녹음실로 장소를 옮겼다. 취조실 같은 창문이어서 안에서는 거울일까 궁금했는데 창문을 통해 스튜디오가 보였고 이어폰을 끼고 마이크 앞에 서서 높이를 맞췄다. 이어폰을 통해 스튜디오에서 하는 말이 들렸다. 예능에서 노래 녹음하는 장면을 많이 봤다면 충분히 상상이 갈거라 믿는다. 더빙을 할 때는 이어폰으로 원어가 들리고 녹음실안에 설치된 모니터로 장면이 보여서 마이크로 성우님들이 더빙을 하는 시스템이었다. 먼저 마이크 사용법을 배웠다. 입은 항상 마이크를 향해 있어야 하고 약 45도 각도로 한 손에 대본을 들고 눈은 반대로 대본을 향해야 하기 때문에 곁눈질하는 형상이다. 그리고 대본을 넘길 때는 마이크에 절대 소리가 안 들어가게 조심히 넘겨야 하기 때문에 대본을 스테이플러로 찍는 것은 절대금지라고 한다. 낱장으로 한 장씩 들고 다녀야 하고 그래서 반드시 대본 위쪽에 페이지 표시가 필수라고 한다.


대본 내용은 일본 료칸에 대한 다큐멘터리 내용이었는데, 4~5줄 정도 되는 짧은 글이었다. 실장님의 큐사인에 맞춰 6명이 돌아가며 내레이션을 했는데 다들 처음이라서 시간이 꽤 걸렸다. 6명이 녹음을 다 마치고 다시 스튜디오로 모였을 때는 시간이 꽤 흐른 것 같았다. 대략 5시 30분은 넘은 것 같았다. 어떻게 알았냐면 슬슬 배가 고파졌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항상 6시에 저녁식사를 했기 때문에 내 배꼽시계는 정확했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멤버들도 상황은 마찬가지여서 첫 녹음을 끝내고 스튜디오에 모였을 때, 여기저기서 꼬르륵 소리가 서라운드로 들렸다. 안 친한 상태라면 그냥 못 들은 척하고 지나갔겠지만 이미 친할 대로 다 친해진 우리는 소리가 날 때마다 여고생이라도 된 듯이 까르르 웃었다. 실장님도 도저히 안 되겠는지 초콜릿을 주셨는데... 사실은 초콜릿은 녹음 전에는 절대 금지라고 한다. 커피, 콜라도 마찬가지다. 카페인이 들어 있는 음료는 목을 건조하게 해서 절대금지, 특히 콜라는 카페인뿐만 아니라 탄산 때문에 가스가 발생해서 더더욱 금지라고 했다. 일찍 도착해서 대기할 때 햄버거 먹으려고 했는데 안 먹길 잘했다. 앞으로도 건강한 목관리를 위해서 카페인이 든 음식은 자제하는 것이 좋다고 했다. 물도 자주 마시고 특히 따뜻한 물로... 추울 때는 반드시 목을 감싸고 다니는 것도 잊지 말라고 하셨다. 성우지망생들은 컨디션 관리를 잘해야 한다. 목소리 보호 때문이기도 하고, 우리 몸에서는 생각보다 다양한 곳에서 소리가 난다고 한다. 지금 난리난 꼬르륵 소리가 그렇고 입안에 분비물로 듣기 거북한 소리가 난다고 했다. 외투도 패딩같이 마찰소리가 많이 나는 것은 금지고 전부 코트 같은 모직류를 입고 다닌다고 했다. 나중에 녹음파일을 듣는데 진짜 꼬르륵 소리, 입에서 나는 쩝쩝 소리, 침 삼키는 소리, 뒤에서 기침하는 소리, 심지어 자세를 고치며 발을 디딜 때 발소리까지 모두 녹음되어 있었다. 녹음실 안에서는 잡담은 당연히 금지고, 행동도 최대한 작게 천천히 해야 했다. 특히 입소리라고 하는 쩝쩝 소리는 정말 듣기 싫었다. 지금도 집에서 혼자 녹음할 때 가장 주의하는 것이 입소리다. 나는 구강구조가 입안 공간이 좁아서 입소리가 많이 난다. 결과적으로 첫 번째 녹음은 피드백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잡음 천국이었다. 실장님이 얼마나 참혹했는지 느껴봤으니 두 번째는 주의사항 잘 생각해서 다시 녹음을 하겠다고 했다. 시간은 이미 6시 가까이 되어 끝날 시간이 다가왔다. 실장님은 수업 더해도 괜찮냐고 물었다. 고등학생 남동생과 둘째 누나가 일이 있어서 가야 한다고 해서 두 사람만 먼저 녹음하고 피드백은 다음 주에 하기로 하고 갔다. 그 뒤에 나머지 우리 4명이 두 번째 녹음을 마치고 다시 스튜디오에 모였다.


4명의 녹음파일을 재생했다. 우선 국어책 읽는 것 같은 어색함은 당연했고 버벅대느라 발음이 참혹했다. 그거 아는가? 일반사람은 '일본, 일기, 일등' 같은 단어를 발음할 때, '일'에 엄청나게 강세를 넣는다. 글자로 어떻게 표기할 방법이 없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렇다. '일'자에 강세를 넣으면 사투리고 아마추어다. 나중에 발표할 일 있으면 강세 빼기를 한 번 시도해 보시길 바란다. 우리가 너무 버벅대고 발음이 엉망이었는지 실장님이 극단의 조치로 볼펜을 입에 물게 했다. 그런데 또 그거 아는가? 볼펜을 입에 물고 발음연습을 하는 것은 잠깐 입을 벌어지게 해서 발음이 교정되는 것 같지만 약 10초 정도 지나면 원상태로 돌아온다. 그래서 진짜 급할 때, 발음이 너무 안될 때, 볼펜을 물고 연습해서 바로 녹음하면 조금 효과가 있지만 기본적인 발음실력 향상에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단다. 그러면 우리가 할 일은 뭐냐... 그냥 쭉쭉 펴서 읽는 것이라고 했다. 무슨 말이냐면 서울말 그러니까 표준말의 특징은 억양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사투리와 표준어의 차이가 바로 억양차이다. 이상한 곳에서 억양이 들어가면 그게 바로 사투리다. 억양이 들어가는 부분은 지방마다 다르다. 나중에 만약에 사투리 연기를 할 일이 있다면 억양만 연구해도 사투리라고 들어줄 만할 거다. 어쨌든 우리가 추구하는 표준서울말은 억양 없이 일정한 높이로 쭉 펴서 읽는 것이다. 여기는 성우학원이 아니니 설명은 여기까지 하고... 어쨌든 TV에서 아나운서들이 하는 볼펜물기가 아무 효과가 없다니... 피드백을 하면서 실장님이 직접 시범을 보였는데... 우와 4명 모두 일제히 왜 성우 안 하세요?라고 물어봤다. 아나운서 뺨칠 정도로 잘했다. 실장님은 연기는 자기 일이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성우는 못한다고 겸손해하셨지만 급할 때는 본인이 직접 할 수 있겠다는 합리적인 의심을 할 정도였다. PD 님이 저 정도면 성우 되려면 얼마나 잘해야 하지?라고 아마 4명 모두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성우가 되려면 PD 님은 뛰어넘어야 하지 않겠는가… 첫 번째 판 보스의 등장이었다. 일단 오늘 피드백받은 내용을 잘 생각해서 다음 주까지 연습해 오는 것을 숙제로 받고 수업을 마쳤다. 시간은 이미 7시 가까이 되었다. 만약 지방 지망생들 중에 서울로 학원을 다닐 계획이 있다면 반드시 교통이 편한 곳으로 학원을 고르라고 하는 이유가 이것 때문이다. 그리고 돌아갈 차편은 시간을 넉넉히 남겨두고 예매하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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