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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걸 다 기억하는 남자

봄맞이 (2)

by 철없는박영감
콧노래


우와~ 한 주 차이인데 이렇게 다르다고요? 얼마 전까지와 전혀 다른 더 이상 매섭지 않은 바람이 살랑살랑 마음을 간지럽혀서 그런가요? 이제는 뭘 해도 콧노래가 절로 나옵니다. 설거지를 해도, 청소기를 돌려도, 빨래를 널어도, 책을 읽어도, 산책을 나가도... 마냥 기분이 좋습니다. 얼어붙었던 제 마음에 따뜻한 봄바람이 불어오려나 봅니다. 그동안 혼자서 심각하고 진지했던 관성(자존심)이 있어서, 엄근진을 장착하고 숨을 멈춰도, 피식피식 터지는 웃음을 숨기지 못합니다. 그래도 마지막 쫀심이 있어서 콧노래로 웃음을 포장해 봅니다만... 글쎄요. 시간이 가고 있음을, 세월이 흐르고 있음을, 나이가 들어감을 되뇌며 부화뇌동하지 않으려고 입술을 꽉 깨물어 봅니다.


예전에는 이럴 때, 오락실 코인 노래방에 가서 노래 실컷 부르고 싱숭생숭한 마음을 달랬던 것 같은데... 이제는 그마저도 사치처럼 느껴집니다. 절약이 더 중요한 백수, 낭만이 사라진 아재가 돼버렸습니다. 그러다가 '어! 유튜브에 다 있는데 노래방 반주 없겠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역시 검색어 'MR'로 찾아보니 노래방 반주 영상이 쫙 뜹니다. 그렇게 노래방 반주를 틀어놓고 작은 목소리로 흥얼거려 봅니다. 다른 집에 소음으로 고통 주면 안 되니 작게 흥얼거림으로 마음을 달래 봅니다.


그런데 고음, 발성, 바이브레이션 상관 안 하고 읊조리듯 노래를 부르다 보니... 노랫말이 훅 들어옵니다. 말랑말랑한 봄기운에 칙칙한 이별 노래를 부르고 있으니 대비돼서 그런 걸 수도 있고요. 그리고 하나 더, 저는 여태까지 제가 고음불가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여자 G Key 노래들이 저한테 어울렸습니다. 초등학생 때 피아노 학원 몇 개월 다녀보고, 동사무소 강습소에서 기타 몇 개월 배워본 게 다라서 음악은 잘 모르지만, 아마 음정이나 진짜 음역대가 다른 게 분명하겠죠? 그런데 여자키 반주에 맞춰서 불러본 노래가, 제 귀로 듣기엔 그다지 나쁘지 않았단 말이죠. 흐흐흐 혼자서 연습해 봤으니, 나중에 노래방 가서 한 번 불러봐야겠습니다.


별 걸 다 기억하는 남자


음... 의외로 내 목소리는 여자키에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예전 중학교 봄소풍이 생각나더라고요. 변성기라고 해도, 남자키 노래는 너무 높아서 후렴구 고음파트에 가까워질수록 긴장해서 도리어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목을 죄고... 지금이면 키를 낮추거나 했을 텐데, 친구들 사이에서 노래방에서 키를 낮추는 것은 자존심을 포기하는 것과 같은 말이었거든요. 그래서 일부러 담담하고 이야기하듯 불러야 하는 노래를 많이 했습니다. 제 마음 안에는 락스타와 헤비메탈리스트가 살고 있는데도 말이죠.


그리고 하필 그때 반장을 하고 있어서, 소풍 가면 꼭 노래를 한 곡 시킬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뭔가를 준비해야겠는데... '소양강 처녀'같은 국민송을 불러서 대충 넘길 수도 있었지만, 그러기 싫더라고요. '트렌디하고 새로우면서도 높지 않은 담담한 노래가 뭐가 있을까?'를 고민하다가 노영심의 '별 걸 다 기억하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엄마를 졸라 카세트테이프를 사 왔습니다. 그리고 가사집을 펼쳐 노래를 외우기 시작했지요.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트렌디하면서도 담담한 노래로 선택된 그 곡을 열심히 외웠습니다.


지금이면 노래 분위기와 화자의 상황을 상상해 가며 연기하듯이 읊조리듯 불렀을 텐데... 그때 잘하는 노래는 고음을 잘 올리고, 목소리 크고, 기교를 잘 부리면 장땡이었던 시절이었거든요. F가 아닌 T적인 노래와 가수들... 감수성이 아닌 기술이 요구되던 시절이었죠. 뭐 하여튼, 그걸 선택했고 가사도 어느 정도 외웠습니다. 그런데 마음에 들어 하는 남자가 사소한 감동을 주는 순간들을 나열한 노래였는데, 정말 많은 노랫말이 있더군요. 자칫하면 부르다가 가사를 까먹을 수 있겠다는 걱정이 앞섰습니다. 그리고 걱정은 현실이 되었지요.


드디어 소풍날 장기자랑 시간이 되었습니다. 사회를 맡은 선생님이 각 반 반장들이 먼저 나와서 노래를 한 곡씩 하라고 시켰습니다. 제가 6반으로, 끝 반이었는데, 하필 뒤에서부터 시키더라고요. 그렇게 노래를 시작했는데... 앗! 갑자기 선생님이 공지사항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순식간에 제 노래가 '브금(BGM)'이 되어버렸지요. 가뜩이나 긴장해서 가사 잊어버릴까 봐 덜덜 떨면서 노래하는데... 당구 용어로 선생님의 '겐세이'가 들어와 버렸으니, 더 말할 것도 없이 가사를 홀라당 까먹어버렸죠. 저는 노래를 멈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기침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크크크 마치 목이 아파서 노래를 부를 수 없다는 듯이... 물론 거짓말, 연기였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어느 정도 기침을 하다 멈추고 다시 부르면 됐을 텐데... 갑자기 옆에 있던 국어 선생님이, "왜 가사 까먹었어?" 이러는 겁니다. 갑자기 진실을 들켜버린 남자 중학생의 선택은... 네 그렇습니다. 우기기였죠. "아닌데요... 그런 거 아닌데요... 까먹은 거 아닌데요... 진짜 목이 아파서 못 부르겠는 건데요?" 정색을 하면서 목에 핏대를 세웠더랬죠. 크크크 '중간중간 기침을 한다'는 지문도 잊지 않고 철저하게 연기를 해냅니다. 그런데 이게 아직도 기억나는 것을 보니... 그때 제가 비겁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도망치는 것에 대하여...


아마 그때부터였을 거예요. 저에게 스스로 '비겁한 놈'이라는 굴레를 씌워버린 게... 그리고 '책임감 없는 남자'라는 프레임도 같이... 지금이면 '아이고 그놈의 남자 타령~!'이라고 받아쳤겠지만, 그때는 일관성 없는 지조 없는 겁쟁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윤동주 <자화상> 같은 마음이었다면 이해하시겠죠? 그리고 그런 마음이 들었다면 스스로를 바꾸면 될 텐데... 이미 흠집이 있는 불량품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는 기침을 하면서 노래 부르기를 포기했듯이 도망을 치기 시작했죠.


지금 보면 철이 들었다고... 어른의 시선으로 예쁘게 봐줄 수도 있지만... 아니 만약 제가 드러냈다면 분명히 그런 위로를 받고 치유받았겠지만, 도망을 선택했던 저는 안 그런 척 연기를 하며 살아왔죠. 그래서 누구도 그런 저를 몰랐습니다. 저 자신도 스스로를 대면하지 않았는데, 그 누가 알 수 있었겠어요... 헤헤헤 지금 보면 진짜 아무것도 아닌 일들인데. 그래서 저의 별명인 '철없는박영감'을 처음 들었을 때, 무척 마음에 들어 했는지도 모릅니다. 스스로에게 벌을 주는 것 같은... 넌 그런 놈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 같은... 재밌는 필명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있겠지만, 사실 저에게는 굉장히 자학적인 필명입니다. 크크크 갑자기 진실게임이 돼버렸네요.


그 뒤로도 저는 많은 것을 회피하고 살았던 것 같아요. 아니지 누구나 다 겪는 고난을 '도망'이라는 수단으로 헤쳐왔습니다...라고 얼마 전까지 생각했어요. 가족도, 결혼도, 직장도, 건강도... 이 글이 이제는 회피하지 않고 당당히 맞서며 살겠다는 다짐은 아닙니다. 전 그렇게 고귀하고 고결한 인간이 아닙니다. 사실 이 말이 하고 싶어요. 어떤 인간도 고귀하고 고결한 인간이 따로 있지 않다. 그 안에는 뭐가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다만 안에만 담아두는 것은 괜찮다. 악함, 비겁함, 나약함을 꺼내 보이지만 않는다면... 설사 꺼내 보였다 하더라도 그건 단지 그런 상황에 놓일 수밖에 없는 불운이었다고... 그렇게 얼어붙어있던 마음에 봄바람을 쐬어주려고 합니다. 그럼 언젠가는 녹겠죠? 아마 저는 앞으로도 별 걸 다 기억하며, 도망치듯 살아가는, 읊조리는 삶을 선택할 것 같습니다. 맞서기보다는... 그게 마음 편하더라고요.


아아...! 안내 방송 드립니다.


그런데 아파트 안내 방송이 나오네요. "요즘 층간소음으로 민원이 많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우리 집 바닥은 다른 집의 천장임을 잊지 말고 주의를 당부드립니다. 특히 발소리, 개 짖는 소리, 피아노 소리, 노래 부르는 소리..." 헉 이건 뭔가요? 그동안 없던 '노래 부르는 소리' 항목이 추가됐네요. 설마 저 때문에 그런 건 아니겠죠? 아아...! 저도 안내 방송 드립니다. "죄송합니다." 그런데 진자 읊조렸는데... TV소리보다 더 작게 개미만 한 목소리로 불렀는데... 그것도 안된다고요? ㅜㅠ 알겠습니다. 이런 게 인생이죠 머! 누군가 싫어하면 안 하는 게 맞지요. 이제는 마음속으로 작고 강력하게... 글로 쓰겠습니다. 흐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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