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맞이 (1)
컥컥, 콜록콜록, 에취
<미세먼지 저감조치 시행> 안전안내문자를 받아서인지, 집안에 가만히 앉아 있는데도 먼지냄새가 나는 것 같은 하루입니다. 괜스레 목도 따갑고, 재채기도 많이 납니다. 분명 청소를 안 한 탓인데, 키보드 위로 느껴지는 감촉이 유난히 버석버석한 게... 왠지 평소보다 먼지가 더 잘 쌓이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물티슈로 한번 싹 닦아냈는데요. 우와! 티슈에 묻어난 먼지가 마치 솜처럼 몽실몽실 뭉쳐있습니다. 거짓말 좀 보태서, 더 놔두면 솜도 틀 수 있는 수준입니다.
게다가 금방 닦고 돌아섰는데, 그 자리를 손으로 다시 쓸어보면 파우더를 뿌려놓은 듯합니다. '으휴~ 이 놈의 미세먼지...! 이러니 목이 안 아프고 배겨?' 후각, 시각, 촉각으로 직접 확인하고 나니 온 집안이 먼지구덩이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아이고 이 먼지를 다 마시고 살았으니, 안 아픈 게 이상하지?' 그래서 겸사겸사 계획에도 없던 봄맞이 대청소를 시작합니다. 하필 미세먼지 주의보로 창문도 열 수 없는 이런 날에 말이죠. 훗~!
먼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거실 테이블 위를 정리합니다. 겨우 내, 대충 손 닿는데 던져놓고 쓰던 핸드크림, 물티슈, 블루투스 스피커와 이어폰, 손톱깎이, 애플펜슬, 볼펜, 연습장... 허~참! 그동안 제 행동반경이 어땠는지 상상이 가시죠? 자~ 이제 겨울잠에서 깨어날 시간입니다.
오~ 웬일로 다 썼네...
테이블 위를 정리하는데 뭔가 동그란 물건이 데구루루 굴러 바닥에 떨어집니다. 겨울에 입술이 트면 바르려고 산 립밤입니다. '에휴~ 이번엔 또 얼마나 남기고 버리게 될까?'하고 뚜껑을 열어봤는데, 이게 웬일! 끝까지 돌려도 더 이상 나오지 않을 정도로 알뜰하게 다 썼네요. 오~ 40년을 넘게 살면서 처음입니다. 립밤을 끝까지 다 써본 게...
항상 야무지게 발라야지 다짐하면서 사놓고는, 끈적끈적한 것도 싫고, 꺼내서 뚜껑 열고 돌려서 바르는 것도 귀찮고, 대충 침이나 바르고, 너덜너덜 입술 끝에 매달려 딱딱하게 굳은 살갗은 그냥 뜯어서 먹고, 히히 입술에 침 바를 때마다 '앗! 따가워'하면서 그냥 립밤 바를 걸 후회하고... (이럴 거면 귀찮아서 밥은 왜 먹고 다닌데?) 그런데 웬일? 이번엔 정말 야무지게 끝까지 다 썼습니다.
그런데 나이 든 걸까요? 다 쓰면 버리는 게 맞는데, 갑자기 감정이입이 됩니다. '버리다'가 '버려지다'라는 피동으로 느껴지며, 다 쓰고 버리는 주인 역할에서 버려지는 사물로 갑자기 역할이 바뀝니다.
「나도 포장이 벗겨지기 전까지는 매대에서 반짝반짝 조명받으면서 멋지게 진열돼 있었는데. 어쩌다가 너 같은 주인을 만나서 이리저리 굴려지다가... 알맹이 다 잃고 단물 빠지니까 이젠 날 버린다고? 그러고도 네가 인간이냐?」
사실 알맹이만 없을 뿐이지, 립밤의 뚜껑에 인쇄된 제품명도 아직 선명하고, 플라스틱 몸체도 어디 하나 부서지거나 깨진 곳이 없습니다. 겉모양 멀쩡한데 내용물을 다 써서 버려야 하다니... 사실 내용물이 남아 있었어도 쓸모가 없어졌으니 버려야 마땅하지요. 놔뒀다가 겨울에 다시 쓰려고 해도, 그 사이에 잊어버리거나, 잘 보관했어도 찝찝해서 새것을 사게 되고요. 모든 것이 새롭게 태어나는 봄에도 사라지는 것은 있게 마련인가 봅니다. 요즘은 개나리, 진달래 보다 미세먼지로 봄소식을 먼저 듣게 되지요?
음~ 미세먼지가 정신에도 영향을 주는 걸까요? 흐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