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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재구성 : 별명

대책 회의는 항상 밤에 열린다. (1)

by 철없는박영감
아~ 이게 트라우마인가?


딱히 관계없는 일인데도,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거나 답 없는 사건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으면, 갑자기 과거의 기억이 스멀스멀 되살아난다. 음... 이걸 트라우마라고 해야 하나? 사실 이 용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딱히 더 적절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는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사건이 다시 떠오르면, 안 그래도 긴 밤이 더 길어진다. 누워서 한참을 뒤척이며 머릿속에서 대책 회의가 열린다. 오지랖 넓은 사람들, 참견과 간섭, 내 가슴을 온갖 무례한 말들로 도배했던 순간들에 대한 분석과 대응 전략을 고민하는 시간.


하지만 결국, 그런 밤의 회의는 항상 같은 결론으로 이어진다. '그때 아무 말도 못 했으면... 이제 와서 뭐가 달라지겠어? 나만 바보 되는 거지...' 그러다가 문득 떠올랐다. 바보의 대명사 '맹구'.


"아휴~ 이 바보! 어~ 이런 맹구 같은... 어? 맹구? 엥? 맹구라고!"


맹구 병장


군대나 학교에서는 별명이 자연스럽게 따라붙는다. '영웅재중, 최강창민'. 이런 선비 같은 호였으면 참 좋을 텐데, 유치한 남자들은 흔히 신체적 특징이나 행동 습관을 기반으로 정한다. 나는 이등병 시절 "맹구"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짱구는 못 말려'에 나오는 맹구 캐릭터와 닮았다는 것. 뭐, 어느 정도 수긍은 한다. 둥글둥글하고 어디 하나 뾰족한 구석 없는 희멀건 백면서생의 외모, 그 자체였으니까. 하지만 이등병이라는 존재 자체가 원래 좀 어리바리하지 않나?


어쨌든 당시 선임들에게 신병은 그들의 장난감이었고, 외모만으로 어리바리하다고 판정받은 나에게, 전역이 얼마 남지 않은 한 병장이 툭 던진 별명이 바로 그것이었다. 다행히 나는 원래 '짱구는 못 말려'를 좋아했고, 맹구 캐릭터도 긍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느릿하고 어수룩해 보이지만 숨겨진 천재성을 가진 존재. 그래서 속으로 삭이며 그냥 넘겼다. 맹구가 단순한 바보가 아니라 천재형 바보라는 점이 어느 정도 위안이 됐다.


반전의 순간


그러던 어느 날, 내무반에서 뜻밖의 사건이 벌어졌다. 어디선가 영영사전이 생겼는데, 선임들끼리 단어 맞히기 놀이를 시작했다. 사전 속 영어로 된 뜻풀이를 듣고 단어를 맞히는 방식이었다. 출제자는 바로 맹구 병장. 그는 단어의 뜻을 읽어주며 다들 못 맞히길 바라며 우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단어가 나왔다.


"Blah Blah Blah, 솰라솰라솰라"


다들 머뭇거리던 찰나, 나는 바닥을 쓸고 닦는 중이었지만, 그 말이 귀에 들어왔다. 그리고 무심코 답을 말했다.


"Rescue."


순간 모든 시선이 나에게로 쏠렸다. 그리고 이어진 몇 개의 단어에서도 나는 계속 정답을 맞혔다. 그날 이후로, 나는 숨겨진 능력을 가진 진짜 맹구가 되어버렸다.


맹구는 누구인가?


그런데 지금 와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별명을 붙여줬던 그 병장... 외모는 그가 더 오히려 맹구스럽지 않았나? 긴 얼굴, 단춧구멍 같은 눈, 비염 때문에 늘 훌쩍이는 코, 그래서인지 늘 코맹맹이 소리가 나는 말투. 거기다 특유의 허세까지. 특히 그는 어느 날 파워포인트로 한 획씩 그어 그림을 완성했다고 자랑했는데, 사실 그냥 도형 도구를 쓰면 더 쉽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굳이 그 방식을 강조하며 자신만의 독창성을 어필하려 했다. 아! 문득 깨달았다. 그는 내게 맹구라는 별명을 붙였지만, 실제 맹구는 그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


사람은 자기 모습을 객관적으로 보기 어렵다. 거울을 볼 때도 한껏 폼을 잡고 보기 마련이고, 오히려 타인의 모습을 통해 자신을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이등병의 모습에서 자신을 발견했을 수도... 뭐~ 그는 자신을 맹구라고 생각하지 않았더라도, 내 기억 속에서는 맹구 병장으로 남았다. 사실 맹구 병장 이 외에는 누구도 나를 별명으로 부르지 않았다. 그마저도 그가 전역한 후로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결국 나는 맹구가 아니었다. 맹구 병장이 자기 얼굴을 보지 못했을 뿐이다. 하지만 나는 '어... 어... 어... 그게 아닌데...' 맹구 흉내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낼 수 있다. 그게 세상 살기 편한 성격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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