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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재구성 : 탄생, 맵찔이

대책 회의는 항상 밤에 열린다. (2)

by 철없는박영감
나는 매운 음식을 싫어한다?


나는 대외적으로는, 소위 매운 음식을 싫어하는 사람, 맵찔이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매운맛을 싫어하는 게 아니다. 문제는 땀이다. 조금이라도 맵거나 간이 센 음식을 먹으면 땀샘이 폭발한다. 정도가 심할 땐, 속옷까지 다 젖을 정도로 땀이 난다. 그래서 매운 음식을 피한다. 싫어서가 아니라, 피곤해서... 그리고 비슷한 이유로 다한증도 있다. 긴장으로 자극을 받으면 손에 땀이 나기 마련이다. 즉 쓸데없는 긴장을 많이 한다는 말이다.


이게 사회생활을 하는데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땀이 많으면 냄새도 나고, 특히 사회인은 악수를 해야 하는데, 항상 소심하게 손을 내밀며 땀이 많아서 죄송하다고 사과부터 하게 된다. 그러면 보통 괜찮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땀이 흥건한 손으로 맞잡게 되면, 상대방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진다. 이게 꽤 마음에 상처다.


그러다 보니 불편함을 주기 전에 내가 먼저 조정하는 습관이 생겼다. 좋게 말하면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는 성격이 된 거고, 나쁘게 말하면 다른 사람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게 된 거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기 검열을 한다. 그리고 검열에 지나치게 신경 쓰는 나머지 더 긴장하게 되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 것이다.


첫 번째 한 밤의 대책 회의 : 핫윙과 변기


처음으로 이 "변종 맵찔이"라는 정체성을 자각하게 된 계기는 교촌치킨의 핫윙이었다. 회식을 하면 2차로 교촌치킨을 무조건 가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아니지만, 한 때 가성비로 회식정규코스처럼 여겨졌다. 특히 '단짠단짠'의 대유행으로, 허니콤보와 핫윙을 함께 시켜서 먹는 것이 국룰이었다. 이런 문화를 처음 접하게 된 날, 술에 취해 별생각 없이 핫윙을 한 개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바로 후회했다.


첫 입을 베어 무는 순간, 혀는 불타고 땀샘은 폭발했다. 겨우 한 개를 먹고 포기했다. 그리고 그날 밤에 화장실에 밤새도록 들락날락거렸다. 밤잠도 설치고, 숙취도 남아있고, 배도 아프고, 엉덩이는 화끈거리고... 그야말로 최악의 컨디션으로 겨우겨우 출근했다. 하지만 아침 회의를 마치고 전날 마신 소맥을 다시 확인하고 난 후에는 팀장님께 부탁해서 조퇴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시는 핫윙 따위에게는 눈길도 안 주리라 다짐했다.


두 번째 한 밤의 대책 회의: 혼자라면 가능할지도?


집에 와서 씻고, 바로 뻗어 잠이 들었다. 눈을 떴을 땐 밖이 어둑어둑했다. 자고 나니까 그나마 좀 살 것 같았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도 나는 것을 보니 숙취도 말끔히 씻긴 것 같았다. 침대에서 뒹굴뒹굴하고 있는데 살짝 출출해졌다. 밥을 차리기는 기운이 없고, 뭔가 해장을 하긴 해야 하는데... 이런 생각이 스쳐가는 찰나에 치킨이 다시 당겼다. 내가 핫윙을 다시 먹으면 사람이 아니고 멍멍이다라고 다짐했건만 머릿속에서 두 번째 대책 회의가 열렸다.


"이거… 다시 도전해도 괜찮을까?"

"그래도 해장으로 매운 음식은 피해야 하지 않겠어?"

"하지만 왜 꼭 피해야 하지?"


이 질문이 떠오른 순간, 어느샌가 전화기에 대고 허니콤보와 핫윙을 주문하고 있었다. 배달은 금방 도착했다. 우선은 조심스럽게 달달한 허니콤보를 먹기 시작했다. 콜라도 같이 한 잔.


"아~ 두통이 심해서 그렇지 배가 많이 고팠구나... 하긴 도로 다 뱉어냈으니 배고플 만도 하지..."


그렇게 콜라와 함께 허니콤보 몇 조각을 먹고 나니, '단짠'의 '짠'이 너무 필요해졌다. 그래서 도전을 외치며 핫 윙을 다시 집어 들었다. '엥? 먹을 만 한데? 쫌 맵긴 한데... 어제 만큼은 아닌데?' 손가락에 양념까지 쪽쪽 빨며 혼자서 땀을 뻘뻘 흘리고 먹었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혼자 먹으면 문제 될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땀이 나면 휴지로 닦고, 휴지로 안되면 세수하면 된다. 입안에 매운맛이 넘쳐흘러 콜라로 해결 안 되면, 우유를 꺼내 마시면 된다. 테이블 한쪽에 휴지가 산더미처럼 쌓여도, 땀범벅이 돼도 아무 눈치 보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그날, 핫 윙을 혼자서 다 먹어치웠다.


나는 맵찔이인가?



'아~ 매운 걸 싫어하는 게 아니라, 매운 걸 먹고 난 이후의 반응을 피하고 싶어 했던 거구나.'


매운 걸 못 먹는 것은 단순한 신체적 반응이 아니라, 사회적인 관계와 타인의 시선에 대한 지나친 의식 때문이었다. 혼자 먹으면 매운 걸 즐길 수 있다. 문제는 음식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이었다. 맵찔이는 단순한 식습관이 아니라, 사회적 환경 속에서 만들어지는 성격일 수도 있다.


결국 나는 맵찔이가 아니었다. 단지 누군가 옆에 있으면 맵찔이가 되는 것뿐. 그렇다고 이제부터 매운 음식을 적극적으로 먹겠다는 말은 아니지만, 최소한 나는 매운 걸 못 먹는 게 아니라,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나의 성격이 이렇게 형성된 이유에 대해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게 됐다.


어! 혼자 있으면 손에도 땀이 안 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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