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테일은 평범한 데서 생기던데...
나는 항상 철이 없다고 생각했다. 책임감도 없고, 재밌는 거만 찾고, 하고 싶은 건 꼭 건드리기라도 해봐야 하고, 사고 싶은 건 사고... 오죽하면 필명도 '철없는박영감'이다. 이 필명은 예전에 성우학원에 다닐 때 반친구들이 지어준 별명이다. 같은 반 누나들 사이에서 나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다.
"쟤는 집에서 장남이야. 반장일 하는 거 보면 듬직하잖아."
"아니야 막내일걸. 하는 짓 보면 딱 우리 집 막내야."
"음... 말할 때나, 생각하는 거 보면 딱 영감님인데... 막내 같진 않아..."
"야! 말할 때 보면 진짜 철딱서니 없지. 딱 막냇동생이구만..."
이렇게 지어진 필명이다. '철없는박영감.' 지금 나이가 벌써 40대 중반이다. 어릴 때는 40대는 정말 늙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생각하는 것은 10대 때나 지금이나 별로 다르지 않은 것 같은데... 관절이 조금 쑤신 것 빼고는 하는 짓도 똑같은 것 같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확 늙어버린 사촌들을 보거나, 세월을 정면으로 맞아버린 머리 벗어진 친구들을 보면 나이가 들었음을 실감한다. 아마도 나는 나와 24시간을 같이 있으니 시나브로 변하는 것은 알아차리지 못했으리라. 서서히 사라지는 것들을 인지하지 못하다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아 그땐 그랬지'라고 성찰하는 게 지금을 살고 있는 내 모습이다. 영화나 소설에서 저렇게 어느 순간 사라진 것들이 다시 소환될 때면 감성에 젖어 저걸 만들어낸 감독이나 작가의 디테일에 감동한다. 오늘은 그 얘기를 좀 해볼까 한다. 평범했지만 평범하지 않게 된 것들...
디테일은 결과만 보여준다. 과정을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과정을 상상하게 만든다. 저게 저기에 있는 이유가 납득이 돼야 한다. 아무리 생뚝 맞는 물건이라도 저기에 있다고 납득이 되는 것이 디테일이다. 저게 저렇게 변한 이유가 납득이 돼야 한다. 성격이 아무리 개떡 같아도 살아온 이야기를 듣다 보면 연민이 생기는 것이 디테일이다. 그래서 디테일은 살아온 만큼 느끼게 된다. 작은 것에도 감동하며 행복해진다면 그만큼 겪은 것도 많고, 겪은 사람도 많고, 경험이 풍부하다는 말일 것이다. 그리고 경험은 사람마다 달라서 각자가 감동을 받는 디테일 포인트는 다르다. 우연히 보게 된 드라마에서 나는 오열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장면에서...
'중쇄를 찍자'라는 드라마 2화다. 의욕을 잃어버린 출판사 영업사원이 주인공과 함께 일하며 다시 태어난다는 스토리이다. 잘생긴 사카구치 켄타로라는 배우가 영업사원 연기를 했다. 출판사에 입사한 코이즈미 준은 원래 편집부를 가고 싶었지만, 영업부로 발령 난다. 의욕을 잃고 모든 것이 불만이었던 그가 주인공을 만나면서 의욕적인 영업사원으로 다시 태어나며 고군분투하는 내용이다. 어떻게 보게 된 건지도 모르게 그냥 보고 있다가 푹 빠져들어 저 장면에서는 오열하고 있었다. 나는 사회생활을 제약회사 영업사원으로 시작했다. 대학생 때까지 늘 운동화만 신다가 처음으로 구두를 신고 일하게 됐는데, 그때까지 구두수선집을 가본 적이 없었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똑같이 일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내 구두 뒷굽을 보고는 갈아야 한다는 거다. 운동화만 신고 살아서 진짜 몰랐다. 구두굽이 다 닳도록 뛴다는 얘기만 들었지 그 주인공이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처음 산 구두는 굽을 갈아야 하는 시기를 놓쳐서 어쩔 수 없이 버려야 했다. 굽이 너무 닳아서 수선을 못한다고 했다. 그 뒤로 구두굽을 바꾸러 자주 다녔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실적이 좋아질수록 주기가 빨라졌던 것 같다. 단골 수선집이 생겨 한 번씩 공짜로 구두도 닦아주셨다. 드라마를 보면서 감독이 어디서 캐치해 냈는지 모르지만, 닳아버린 구두뒷굽을 보고 얼마나 열심히 뛰어다녔을까라는 애틋함에 펑펑 오열하고 말았다. 드라마 초반부에 사카구치 켄타로가 지하철을 기다리는 장면에서 뒷굽이 멀쩡한 구두를 클로즈업했는데 (커버이미지) 별생각 없이 봤던 장면이 나중에 이렇게 감동을 줄 줄이야.
글을 쓸 때, 기억을 떠올리면서 상황을 되도록 자세하게 묘사하려는 이유가 저런 디테일 때문인 것 같다. 누군가와 여행을 가서 좋았던 느낌을 글로 남기려면 그 누군가와 같이 갔던 곳, 같이 먹었던 음식에 대해서 쓰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예전에 'K-POP STAR'라는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한 참가자가 '엄마로 산다는 것은'이라는 노래를 부르는데 잔잔한 피아노 반주로 시작한 노래를 듣다가 또 오열했다. 의정부에서 대방동으로 차를 끌고 다녔는데 10년 전 동부간선도로는 교통체증으로 악명이 높았다. 병원이 문을 닫으면 영업활동을 끝내고, 회사에 복귀해서 서류를 정리하고 퇴근하다 보면 아무리 일찍 출발해도 집에 도착하면 12시를 넘기기 십상이었다. 그러면 내가 올 때까지 엄마는 거실에서 TV를 틀어놓고 졸고 있다가, 현관문을 여는 소리에 잠에서 깨서 맞아주셨다. 피곤하다는 이유로 한가득 짜증을 내면서 들어왔는데... 엄마는 그런 짜증을 다 받아내면서 뭐 하나라도 더 해주려고 애쓰셨다. 하지만 나만 생각하기도 바빴던 나는 '알았어요'를 남발하며 옷을 갈아입고 있으면 엄마는 슬그머니 과일을 들고 오셨다. 매일매일이 이랬었는데... 이 상황을 그대로 노래로 부르고 있는 거다. 정말 깜짝 놀랐다. 그 힘들었던 매일매일이 떠오르며, 그리고 애썼던 엄마가 생각나며 노래 4 소절만에 펑펑 울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꽤 많은 일들을 겪었다. 잊고 살고 있었는데... 이렇게 추억을 소환해 주는 것이 디테일이지 싶다.
이제는 골목길이 좋다. 특히 담쟁이덩굴이 자라 있는 빨간 벽돌 담장이 있는 골목길... 빨간 벽돌 담장너머가 항상 궁금했던 곳... 이제는 키가 훌쩍 자라 고개만 돌리면 담장너머가 보이는 곳... 그리고 요즘과는 다른 정사각형의 이끼 낀 시멘트 타일이 깔려있는 골목길... 신나게 뛰어놀던 내가 있던 곳... 울퉁불퉁 솟아있는 타일에 걸려 무릎이 까졌던 곳... 이제는 타일보다 내 발이 더 커진 곳... 그래서 예전에 KBS의 '동네 한 바퀴'를 정말 좋아했는데 요즘은 프로그램 성격이 조금 달라진 것 같아서 안 보게 된다. HOT가 문화의 중심이었을 때, 거리마다 우리 또래들은 길바닥을 쓸고 다녔다. 벨트를 길게 축 늘어뜨리고... 요즘 길거리를 나가보면 타임머신을 타고 온 것 같다. 레트로를 넘어선 무언가 새로운 시대조류가 생겼나 보다. 친구들이 보고 싶다. 어쨌든 오늘도 십 년 뒤의 나에게, 이 십 년 뒤의 나에게 평범하지 않게 될 평범한 날을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