惡의 서사 (6)
들키면 멈추고, 드러나면 사라지는 악
악은 많은 경우 스스로를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내면의 윤리나 양심에 의해 제어되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시선에 의해 조절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범죄자의 회한보다, 뉴스에 등장한 날의 인터뷰를 먼저 믿는다. 악은 드러나기 전까지 공존 가능하고, 들킨 이후에야 “사회적 문제”로 규정된다. 이 말은 곧, 악은 행위의 본질이 아니라 노출의 여부에 따라 성립된다는 것이다. 이때 등장하는 문장이 있다.
“취재가 시작되자…”
이 문장은 무언가가 끝났다는 신호처럼 사용된다. 누구도 설명하지 않던 사건이 드러나고, 누군가가 부끄러움을 느끼고, 조직은 입장을 내며, 대중은 분노하거나 침묵한다. 그 모든 반응은 단 하나의 전제에 기대어 작동한다.
악은 발각된 순간에만 존재한다.
그러므로 악은 그 자체로 기능하지 않는다. 악은 발각되기 전까지는 일상이며, 발각된 이후에야 악이 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구조를 알면서도, 여전히 시선이 도달하지 않는 곳에서 그것이 자라나는 것을 방관한다. '취재가 시작되자...(악은 멈췄다.)' 즉, 악은 스스로를 통제하지 않는다.
그것은 감정이나 양심보다도 외부의 시선에 좌우되는 존재다. 발각되는 순간에만 작동을 멈추고, 그전까지는 무력하게 반복된다. 그러나 이 질문은 계속 맴돈다. 우리는 정말 악을 미워하는가, 아니면 단지 들키는 순간을 두려워하는가? 그렇게 바라보면, 악의 본질은 죄라기보다 실패처럼 느껴지기 시작한다. 악은 멈췄지만, 누구도 죄를 고백하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발각되었다는 사실에 당황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죄란 무엇인가? 그곳에서 우리는 묻는다. “악은 정말 죄인가, 혹은 단지 실패였던가?”
악은 죄가 아니라, 들킨 실패다
어떤 이들은 말한다.
“그 사람은 착하다. 적어도 들킨 적은 없다.”
이 문장은 우스운 동시에 정확하다. 악을 판단하는 기준이 ‘행위의 도덕성’이 아니라 ‘들킨 여부’로 바뀐 사회에서는, 죄란 들킨 실패에 불과하다.
현대의 악은 더 이상 비윤리적 행동으로만 정의되지 않는다. 그것은 브랜드를 손상시키는 리스크이고, 이미지 전략에 있어 불필요한 변수를 제거하는 작업이다. 사과는 감정이 아니라 협상의 언어이며, 침묵은 성찰이 아니라 리스크 회피다. 중요한 것은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가해의 유무보다 발각의 유무가 중요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악을 멈추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악을 들키지 않게 다듬는다. 이런 구조 속에서 우리는 도덕을 내면에서 찾지 못한다. 윤리는 눈앞에 펼쳐진 타인의 반응 속에 존재하고, 죄는 성찰이 아니라 노출 실패로 규정된다. 이 시대의 악은, 결국 마케팅의 실패일 뿐이다.
악은 더 이상 윤리적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지의 손상이고, 시스템적 노출이고, 커뮤니케이션의 오류다. '죄'는 사라지고, '사건'만 남았다. 우리는 사과를 소비하고, 침묵을 감내하며, 발각되지 않으려는 전략만을 존중한다. 이제 문제는 더 깊어진다. 윤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더 이상 내면의 물음이 아니고, 단지 '보이는가?'라는 기술적 여부로 축소된다. 그렇게 도덕은 점점 외부로 밀려난다.
그렇게 윤리는 더 이상 마음속 기준이 아니다. 그것은 화면을 가득 채운 숫자들, 시청률과 클릭 수로 측정된다. 이제 도덕은 측정 가능한 대상이며, 감시는 윤리를 통제하는 기술이 되었다.
눈이 닿는 곳까지만 도덕은 작동한다.
어둠 속에서 자라나는 악은 항상 침묵을 동반한다. 누군가 그것을 직접 보지 않는 이상, 그것은 사건이 아니라 '원래 다 그런 거야~'라는 습관이며 일상이다. 도덕은 빛 아래서만 작동하고, 감시는 그 빛을 정교하게 조율한다. 현대 사회의 윤리는 내면의 기준이 아니라 시선의 거리에 따라 달라진다. 감시받는 영역에서는 모두가 선해지지만, 시선이 닿지 않는 구역에서는 구조적 악이 반복된다. 그리고 그 악을 멈추는 방법은 도덕적 각성이 아니라 “카메라가 도착했는지 여부”다.
사람들은 말한다.
“그는 항상 타인의 눈을 잘 의식했다.”
그 말은 찬사가 아니라 경고다. 윤리를 내면화하지 못한 구조는 들키지 않을 만큼만 선하고, 보이지 않을 만큼만 나쁘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점점 윤리의 실체를 잊는다. 도덕이란 무엇인가? 질문의 답은 이제 ‘얼마나 많은 눈이 지켜보고 있는가’가 되어버렸다.
빛이 닿는 곳에서만 윤리는 기능한다. 악은 어둠 속에서 생겨나고, 시선이 없는 구역에서 살아남는다. 도덕은 감시망 위에 놓인 선택지이며, 우리 모두는 그 망을 피해 살아가는 법을 익혀버렸다. 그리고 그렇게 도덕이 외면화된 사회 속에서, 우리는 반복되는 악의 흐름을 지켜보기만 한다. 고통은 특별함을 잃고, 뉴스는 일상이 된다.
반복되는 악은 누구의 삶에도 특별하지 않다. 카메라의 초점이 머문 자리에 잠시 서사가 생기고, 그다음은 침묵이다. 그렇게 우리는 무수한 '익숙한 고통'들 속에서, 감정을 잃어간다.
악은 너무 많아서, 누군가의 고통은 어제와 다르지 않다
우리는 고통에 반응해야 한다. 그러나 반응은 지쳐 있고, 악은 너무 많으며, 사람들은 감정의 무게에 피로해진다. 모든 고통이 특별하지 않은 시대. 뉴스는 매일 같다. 범인만 바뀔 뿐이다. 각 사건의 고통은 분명 고유하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개별 사건으로 다루지 않고, 하나의 패턴으로 분류하기 시작했다.
“또 이런 일이 생겼다.”
“이번엔 누가 피해자인가?”
감정의 반복은 마비를 낳고, 기억은 흐려지고, 관심은 사라진다. 그리고 그 모든 흐름 속에서 가장 많이 반복되는 말이 다시 등장한다.
“취재가 시작되자…”
이 문장은 하나의 마법처럼 작동한다. 악은 들킨 순간 멈추고, 들킨 이후 사라진다. 그러나 정작 악의 본질은 계속된다. 카메라가 꺼진 뒤, 마이크를 내린 뒤, 우리는 다시 그 악 속에서 살아간다. 문제는, 들키지 않았을 때의 그 긴 시간이다. 그리고 그 시간이, 가장 많은 고통을 만든다.
우리는 이제 놀라지 않는다. 범죄는 기사와 함께 떠오르고, 피해는 분노 대신 무표정 속에 가라앉는다. 누군가는 울었고, 누군가는 사라졌다. 하지만 내일도 동일한 구조 속에서 악은 반복된다.
그리고, 여전히 들키지 않은 누군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