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관운이 있다더니…”

세상이 감옥 같았다.

by 철없는박영감
세상이 빌런인가?


“사주에 관운이 있네!”


되는 일 하나 없고, 하는 일마다 풀리지 않고, 사방이 출구도 없이 꽉 막혀있다고 느껴졌다. 나이는 점점 들어가지... 체력은 예전만 못해서 쉽게 병들고 지치지... 위에서는 찍어 누르고, 아래에서는 치받고, 정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점(占) 집을 찾았다. 상호는 카페였는데 실상은 무당이 신점을 보는 곳이었다.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자회사이긴 했지만 국내 굴지 대기업의 공장 생산관리직으로 일하고 있었다. 연봉도 대우도 나쁘지 않았다. 성취의 보람도 있었다. 사내에서 10명 내로 육성한다는 6 시그마 MBB인증도 받았다. 그래서 여러 혁신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생산팀장으로도 내정되었다. 하지만 올라갈수록 여기저기서 빌런들이 출몰하기 시작했다. 웬만한 싹수들은 잘 쳐냈다고 생각했는데... 복병이 나타났다.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되며 공장마다 안전관리자가 선임됐다.


그런데 이들의 업무행태가 경악을 금치 못할 수준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업무를 감시와 조언의 역할로 한정했다. 즉, 모든 책임은 내가 지고, 자신들은 뒤에 한 발짝 물러서있겠다는 얼토당토않은 업무프로세스를 내밀었다.


'참나~ 차라리 일을 안 하겠다고 하지...'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서방이 버는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CEO는 자신이 감옥에 가지 않으려면 안전관리자를 앞세워야 했기 때문에, 그들의 말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했다. 결국 나는 액막이 꼭두각시가 될 상황이었다. 그래서 ‘관운’이라는 말은 나에겐 오히려 불길한 암시였다.


공무원? 아니, 나는 교도소부터 떠올렸다. 결국 인명사고가 나고, 안전관리 소홀로 내 발목에 법의 굴레가 채워지는 상상을 했다. 그때는 정말 아무것도 하기 싫던 시절이라서, 내가 맡은 생산라인에서 누군가 죽어 나가도 대수롭지 않게 여길 것 같았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세상이 나에게 빌런 짓을 했다기보다,


내가 빌런이 되어있었다.


그런 마인드로 일을 하니, 잘될 턱이 없었다. 일터에서는 트러블이 반복됐다. 다양한 욕망이 내 안에서 뒤죽박죽 섞였다. 그래서 팀원들을 닦달하고, 동료들을 채근했다. 소중한 사람들을 챙기지 못했다. 그렇게 매일 소진되다가, 결국 나는 브레이크를 밟았다. 휴식이라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정의의 정비소에 들어간 거였다.


그때 나는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펼쳤고, 그 속의 문장 하나가 내게 오래 울렸다.

“나의 정의로 너의 권리를 침범할 수 없다.”


나는 그것을 바꿔보았다.


“나의 정의로 너의 권리를 구속할 수 없다.”

그리고 다시, 정의를 이렇게 정의했다.


“정의는 타액이다.”


내 안에 있을 때는 소화와 윤활을 돕는 선한 원칙이지만, 밖으로 발산되는 순간 오물이 되고 항원이 된다. 그것은 곧, 울분의 발생 조건이었다. 내 안의 정의가 사회와 충돌할 때, 울분은 미세한 모래알처럼 쌓여갔다. 작은 불일치들이 반복되며 강물의 흐름을 가로막았고, 나를 고립시키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그 문장을 다시 고쳐야 했다. 정의는 사람마다 다르고, 방향마다 다르니까.


그 말이, 몇 년 후 내 삶의 내비게이션이 될 줄은 몰랐다.


나는 울분을 이렇게 이해했다. 울분은 이명과 같다. 청력 손상의 틈을 뇌가 메우기 위해 만들어내는 소리. 마찬가지로 울분도, 정의와 현실의 간극에서 생긴 감정이다. 극복은 정면돌파가 아니라 인지하지 않음이라는 방식일 수 있다. 울분은 신경 쓸수록 커지고, 흐름을 막는다. 그래서 나는 공부하고, 생각하고, 의미를 재해석하기 시작했다.


이해할 수 없는 모순을 해석할 수 있는 구조로 바꾸면서, 강물은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 나는 공무원이 되었다. 사주팔자의 관운이 맞았다. 아니면 정의와 울분 사이에서 생겨난 내면의 자정작용이 내게 새로운 길을 열어준 걸까? 어쨌든 나는 안성맞춤 IC를 지나, 행정이라는 차선에 합류했다. 이 길은 내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내가 운전 중이다.


운명은, 때때로 울분이 흘러간 자리에 길을 내기도 하니까.


그 길은, 생각보다 낯익고 차가웠다. 꽃으로 장식됐지만, 급하게 갖다 심은 티가 확 났고, 금방 시들어 갖다 버릴 일만 새로 추가될 것 같았다. 무엇보다 향기가 없었다. 사람 냄새가 너무나 부족했다. 회의실, 회식, 반말, 그리고 어공. 나는 정비된 차로 그 길에 진입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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