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이건 내 길이 아닌 줄 알았는데...

어쩌다 보니!

by 철없는박영감
안성으로 이사했다.

합격 통보를 받고, 짐을 싸고, 새로운 도시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아시다시피 나에게는 휴게소의 도시다. 빠르게 적응하고 싶어서 출근 일주일 전에 무리해서 이사했다. 모집공고가 나고, 원서를 접수하고, 면접을 보고, 이사를 하고... 이 모든 게 한 달 만에 다 이뤄졌다. 진짜 번갯불에 콩을 볶았다. 먹진 못했지만, 타긴 했다.


면접 보러 왔을 때만 해도, 안성은 집이 남아도니까 의정부에서 집 나가는 일정을 먼저 잡고 오라고 했다. 그런데 실제로 일정을 잡고 왔더니, 중개인들이 하나 같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이상하게 안성에 집이 없다는 거다. 허걱...! 그래도 뭐 어떡하랴~! 왠지 앞으로 공무원의 업무라는 게 이럴 것 같았다. 뭐 어떡하랴~! 그냥 해야지...


집을 살까도 고민했다. 그런데 세금도 들고, 지금 나와있는 집들이 죄다 1층뿐이라서 나중에 팔릴게 걱정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상하게 집값이 올라있는 상태라서 상투 끝을 잡을까 무섭기도 했다. 무엇보다 1년 계약직으로 시작해서 2년, 다시 2년을 연장한다는데, '1년만 하고 나가라고 하면 어떡해?'라는 생각. 그래서 전세계약을 했다. 전세가율이 무려 90%가 넘는다.


이번 이사는 최대한 가성비를 따졌다. 이 기준은 2년 전 이사 경험이 큰 몫을 했다. 거의 새 거였던 집기들이 이제는 낡은 구형모델이 되어있었다. 중점이 보호에서 가성비로 옮겨갔다. '나'라는 사람의 가치도 그렇게 변했겠지? 사실 이번 직장은 약 15년 전의 신입사원 초봉보다도 못하다. 아니 수습기간 때 보다도 적다.


아휴~ 그래도 뭐 어쩌랴. 돈보고 온 것도 아니고... 새로운 활력을 찾는다는 데 의의를 두고 짐정리를 했다. 그리고 공무원이라는 신분에 맞는 옷을 몇 벌 샀다. 점잖은 색깔, 폭염에도 버틸 수 있는 기능성 소재. 하지만 디자인적으로나마 트렌디한 감성을 놓칠 순 없는 그런 두 마리 토끼를 잡고 다녔다. 귀걸이는 빼고, 머리는 짧게 잘랐다. 문신은 없어서 다행이었다. (흐흐, 농담이다.)


출근 준비는 계획이 아니라 디자인이었다.

이사 오고 출근까지 남은 기간 동안 안성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차로 다녀야 하는 곳도 있었지만, 아휴 내가 제일 좋아하는 드라마 '도깨비'의 촬영지가 있을 줄이야, 대부분은 걷는 범위 위주로 다녔다. 차 안에서 풍경처럼 스쳐갔던 첫인상은 합격이었는데, 실제 그 안에서 살아가는 모습도 그럴지 궁금했다.


먼저 집 앞에 있는 '중앙대학교'를 찾았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캠퍼스의 낭만은 나를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아쉬운 건, 방학이라 캠퍼스에 사람이 없었다는 것. 도시의 얼굴을 보고 싶었는데, 그날은 마치 마네킹만 남아 있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시장을 갔다. 안성은 2, 7일에 오일장이 선다. 물론 늙은 독신남이 살 건 별로 없었다. 그래도 오랜만에 시골 장날의 왁자지껄함을 느끼며 닭똥집 튀김을 사서 돌아왔다. 푸근함이나 삶의 현장감은 없었다. 그보다는 약간의 도도함을 느꼈다. 의정부 시장과는 달랐다. '안성맞춤'이라는 말이 안성 유기장인들의 솜씨를 칭찬하는 말에서 유래됐다고 하던데... 장인 정신의 꼬장꼬장함이 더 느껴졌다. 아니면 공무원이 된다는 생각 때문일까?


드디어 첫 출근


며칠간 아침 산책 겸 아파트 단지의 출근차들을 관찰했다. 많이 밀리는 시간대를 체크했다. 그리고 내비게이션으로 앞으로 일하게 될 '안성농업기술센터'의 거리와 시간을 계산했다. 평균 14분이 걸렸다. 그래서 차 시계는 일부러 15분 빠르게 맞췄다. 그리고 그걸로 8시 45분이 뜨면 출발하는 계획을 세웠다. 나는 출근을 디자인한 사람이었다. INFJ의 ‘J’는 그런 데서 빛난다.


계획은 순조로웠다. 예상한 시간에 맞게 출발, 도착, 시뮬레이션대로 착착 진행됐다. 공무원이니까 규정속도도 지키고, 단 1km/h도 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규정속도 70km를 지켰다. 깜빡이도 잘 켜고, 우회전은 무조건 정차. 횡단보도에서는 일단정지. 크크크 AI급으로 규정을 지켰다. 그리고 정확히 8시 45분. 너무 이르지도 너무 늦지도 않은 어정쩡한 시간에 딱 도착했다.


오랜만에 아침 공기를 느꼈다. 차 안엔 새 옷의 냄새가 은은했고, 사무실로 향하는 발걸음은 묘하게 경쾌하면서 익숙했다. 3년 전, 이전 직장에 마지막 출근하던 그 아침이 떠올랐다. 설렘과 긴장감이 뒤섞인 감촉. 회사 주차장에 차를 대고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출입구를 들어서던 샐러리맨. 나는 다시 살아 숨 쉬는 것 같았다. 과거로의 회귀였고, 짠하고 묘한 감정이었다.


그리고 문을 열었다.


낯선 시선들이 나에게 집중됐다. 하지만 그곳엔 아무도 웃지 않았다. 눈이 마주쳐도, 인사를 해도,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같이 일하게 된, 박 OO입니다."


표정은 움직이지 않았다. 공기가 식었다. 그 순간 바로 나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그들은 나를 보았지만, 나를 받아들이진 않았다. 나는 그들의 공기 속에 들어왔지만, 그 공기는 나를 숨 막히게 했다. 나는 그들의 시야에 있었지만, 그들의 세계엔 없었다.


공무원 사회에는 인수인계가 없었다. 결재는 있었지만, 업무는 없었다. 나에게 처음 주어진 것은 산더미 같은 서류 더미였다. 공무원 사회는 임무만 있고, 방식은 없다. 아니 방식은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나는 업무를 인수받은 게 아니라, 업무의 잔상을 추적해야 했다.


'아~ 민원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출근하고 한 시간도 안 돼서 든 생각이다. 민원인들이 가장 답답해하는 것도 이 지점이다.


“아니 전에 계시던 분은 다 해주셨던 건데, 왜 주무관님은 안된다고 하세요?”


"작년에 이렇게 다 했던 건데, 올해는 왜 안된다는 거예요?"


능력의 차이일 수도 있고, 기준의 차이일 수도 있다. 이사의 중점이 보호에서 가성비로 바뀌는 것처럼, 비중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혹은 정치 성향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다. 결과가 다른 이유도 천차만별이다. 이유가 공무원의 자존심 때문일 수도 있다는 것은 안 비밀. 사람의 일이라는 게 자를 갖다 대고 판단할 수는 없다.


'유도리, 융통성, 관행, 선례, 분위기...' 많은 말들이 있지만, 결국엔 사람이다. 공무원은 법을 집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법을 해석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해석에는 사람이 있다. 내 자리에는 ‘안성시’라는 로고가 크게 찍힌 기능성 조끼가 걸려있었다. 전임자가 남기고 간 듯한 흔적이었다. 나는 그 조끼를 입었고, 그 조끼는 나를 입었다. 새로 산 옷과 기능성 소재는 그 조끼 속으로 숨겨야 했다. 내가 동종이라는 보호색을 빨리 찾아야 했다.


그들은 웃지 않았다.

게다가 그들은 화도 내지 않았다. 그게 더 섬뜩했다. 인간답지 않다고 느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나는 그들을 불쌍하게 느꼈다. 얼마나 고달프면, 웃는 걸 잊고, 화내는 걸 접고, 인간이길 포기했을까. 첫 출근에 들어선 길은 이정표는 고사하고, 방향도, 목적지도 없이 깔린 비포장 도로 같았다. '이 길은 내 길이 아닌가 봐'라는 자조는 사치에 가까웠다. 길이 없었다.


생각해 보라. 우리에게는 공무원 하면, 막연하게라도 고정관념이 있다. 점잖고, 차분한 무채색의 느낌. 그들에게는 개성이 사치품이었다. 모두가 다른 얼굴이지만, 똑같은 가면을 쓰고 있는 느낌. 웃픈 표정. 민원인들에게 립서비스를 날리는 순간, 입은 웃고 있지만, 그들의 눈에는 영혼이 없다. 흐리멍덩한 초점 없는 눈. 그래서인지 그들의 조직 속으로 들어와서 본 그들의 모습은 매우 생경했다.


한마디로, 정상이라는 이름 아래 비정상적인 감정들이 눌려 있는 곳이었다. 그 안엔 웃지 않는 사람도, 화내지 않는 사람도, 그리고 감정을 잃어버린 사람도 있었다. 그곳은 감정의 사막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사막 한가운데 던져진

낯선 이방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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