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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 스폿 배우는 날

뭐라도 된 것 같이 신나더라

by 철없는박영감

어느덧, 8번째 글이다. 정말 신나게 썼나 보다. 벌써 아쉬워지는 것을 보니... 배우는 모든 것이 처음이었던 기초반 때, 남은 수업 횟수가 줄어들수록 딱 이런 기분이었다. 인생 베프들을 만나서 학원가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었고 스트레스 해소 창구였다. 첫 번째 선생님이 개인사정으로 주말반을 그만두고 원장님(a.k.a 유명 PD 님)이 강의를 해주셨다. 우리 6명이 똘똘 뭉쳐서 반 분위기도 좋고, 열심히 한다고 소문이 났더랬다. 원장님이 한 주 땜빵으로 오셨을 때 성우들은 트렌드에 민감해야 한다면서, 지금은 오래된 영화지만 당시에 '납득이' 열풍을 일으킨 '건축학개론' 같은 신작영화는 꼭 봐야 한다고 하셨다. 우리 6명 중 고등학생 남동생과 첫째 누님 빼고 4명이 모여서 영화를 보러 갔다. 거기서 원장님을 딱 마주쳤다. 본인이 수업 중에 한 얘기를 실천하겠다고 학원생들끼리 몰려다니는 모습이 대견해 보였나 보다. 영화관에서 우리를 먼저 발견하시고 반갑게 인사해 주셨다. 그 뒤로 수업시간이 조금 더 추가되었다. 원래는 한 번만 땜빵해주시려고 했는데 네 번으로 늘었다. 3개월 과정이니까 거의 1/3을 강의해 주셨다. 아무리 원장님이라도 유명 PD 님이 이렇게까지 해주지는 못한다고 한다.


원장님 강의가 끝나고 새로운 선생님이 오셨다. 나머지 6주 동안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셔야 했기 때문에 강도가 조금 세졌다. 원장님은 디렉팅 하는 듯한 수업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기초 훈련인 호흡과 발성은 각자 알아서 초기에 배운 방법으로 하고 있었다. 새로운 선생님이 현 수준을 진단하신 후, 처음부터 다시 배우듯이 호흡과 발성 1시간, 연기와 내레이션 1시간, 이렇게 꽉 짜인 수업이 진행되었다. 이때즈음 애니메이션 덕후이던 여동생이 학원을 안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른 고등학생 남동생과 직장인 미남 동생이 합류했다. 기초반에서 많이 낙오하는 지점이 호흡, 발성 수련과정이다. 차이가 서서히 나타나기 때문이다. 내 능력의 한계를 경험하고 많이 그만둔다. 사실 한계는 아닌데 본인이 뛰어넘지 않는다. 여동생은 발성을 많이 힘들어했다. 소리가 조금만 커져도 목소리가 떨리며 뱃심을 못쓰고 목으로 발성을 하다 보니 염소 같은 소리가 났다. 매 수업시간마다 지적을 당하니 지칠 만도 하다. 생각만큼 안 되는 본인은 얼마나 답답했을까... 얼마 못 가서 드문드문 나오더니 결국은 안 나오기 시작했다.


사실 기초반 수료만 해도 어디 가서 성우학원 다녔다고 명함은 내밀 수 있다. 하지만 기초반 수료까지는 어떻게든 꾸역꾸역 다니지만, 심화반으로 진급할 때는 많이 포기한다. 성우공채라는 목표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함을 깨닫기도 하고, 성우 덕후로 왔다가 생각보다 힘들어서 포기하기도 한다. 그래서 기초반이 끝나면 심화반은 안 다니겠다는 사람이 생겼다. 나를 포함해 둘째, 셋째 누나들만 계속 다닐 거라고 했다. 기초반이 끝나면 심화반으로 진급해서 새로운 선생님을 만난다. 또 기존 심화반의 새로운 친구들도 만난다. 주말에 기초반과 심화반 2개 반이 운영됐는데, 기초반이 연기수업할 때, 심화반은 녹음수업을 하고, 기초반이 녹음수업할 때, 심화반은 연기수업하는 식으로 운영되었다. 강의실을 이동하면서 복도에서 잠깐씩 마주쳤는데 모두 목소리도 멋있고, 선배의 포스가 느껴졌다. 심화반 첫인상 얘기도 나중에 따로 쓰려고 한다.


기초반 이야기가 거의 마무리되어 간다. 모두가 궁금해할 학원비 얘기를 잠깐 해보면, 3개월 과정에 학원비가 70만 원 정도였을 거다. 10년 전이니까 지금은 조금 올랐을 것이다. 그 뒤로는 심화반으로 진급하면서 한 달에 30만 원 정도 냈던 것 같다. 이것을 5년을 다녔으니 비록 실패했지만 성우가 되기 위해 차한대값은 투자했다. 후회하지는 않는다. 도리어 지금도 나이만 좀 젊었으면 계속 도전하고 싶다. 그만큼 성우라는 직업은 매력적인 직업이다. 나는 직장을 다니면서 다녔기 때문에 경제적인 어려움이나 궁핍함은 없었다. 공채시험 끝나고 다른 사람들이 학원을 쉴 때도 나는 쭉 다녔다. 지방에서 서울에 올라올 핑곗거리도 되었기 때문이다. 새롭게 학원을 다니고자 하시는 분들은 학원비가 만만치 않으니 가성비를 꼭 따져야 한다. 실제로 알바를 하면서 학원을 다니는 분들은 학원과 잘 이야기하면 몇 달 치를 한 번에 내는 조건으로 할인을 받는 경우도 있다. 물론 생활이 어렵다는 사정을 모두 알고 있을 경우에 한해 특별 케이스다. 그리고 꼭 해주는 것도 아니다. 학원도 손해를 보면서 운영할 수는 없을 테니까.


가장 안 좋은 경우가 학원비가 모자라서 다니다가 말다가 하는 경우다. 실력도 안 늘고, 시간과 돈만 버리는 선택이다. 돈 벌겠다고 한 달 쉬고 왔는데 같이 수업 듣던 친구들은 이만큼 성장해 있고, 자기는 퇴보해 있다면 이 GAP을 극복 못한다. 특히 지방에서 홀로 상경해서 자취, 아르바이트하면서 학원 다니는 친구들은 계획을 잘 짜고 시작하기 바란다. 성우 한다고 했을 때, 집에서 지원을 해주는 사람은 거의 없다. (뜬구름 잡는 소리 같아서겠지? 아마도...) 고시원 완전히 비추천이다. 성우 연습은 소리 내서 해야 하는데... 나는 원룸에 살면서도 눈치가 보여서 연습실을 따로 대관했다. 만약 진짜 열심히 하겠다고 하면 돈을 모아서 학원비와 생활비는 딱딱 계획에 맞춰서 최소한으로 지출하고 나머지 시간은 학원에서 살기를 추천한다. 비는 강의실에서 혼자 연습할 수도 있고, 다른 데 가서 딴짓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본인을 계속 성우와 관련된 환경에 노출시켜야 한다. 그리고 계속 있으면서 성우 선생님들 눈도장도 좀 찍고 이리저리 지나가다가 곁눈질로 배울 수도 있다. 가끔 인원 모자라는 반에 청강도 시켜주신다. 물론 학원 스텝과의 친분을 잘해둬야 한다. 불청객이 되지는 말아야 한다. 그러려면 앞에서 말 한 금욕주의 생활이 필요하다. 몸도 건강해질 수 있으니 일석이조다.


간혹 학원에서 스텝 알바를 하면 원하는 수업을 듣게 해 주겠다는 제안이 있을 수 있는데, 내가 옆에서 지켜본 바로는 학원생과 직원은 아무래도 대우가 다르다. 추천한다, 추천하지 않는다까지는 아니고 잘 생각하고 선택하시길… 살짝 귀띔하자면 자기가 원하는 수업에 정원이 꽉 차면 못 듣는다. 그리고 우리 반이 주말인 데다가 질문이 많아서 항상 늦게 끝났는데 토요일 저녁에 집에도 못 가고 수업도 못 듣고 학원 문 닫으려고 대기하고 있다 보니, 나중에는 알바 분이 참다못해 끝나는 시간 지켜달라고 했다가 우리 반 누나들과 대판 싸운 적이 있다. 그 뒤로 또 한 명 그만뒀다.


광고, 스폿 수업은 조만간 대원방송 공채시험이 있다고 해서, 곧 시험 준비에 전력을 다해야 하니 잠깐 쉬어가는 시간처럼 진행됐다. 그동안 힘들기도 했고, 원래 커리큘럼에도 있었는데 시험 때문에 안 하고 지나가기도 그렇고 해서 맛보기처럼 하게 되었다. 광고와 스폿의 특징은 효과음이나 배경음악이 있다는 것이다. 선생님이 대본과 음악파일을 미리 주시고, 타임라인을 설정해 주신 다음 일주일간 연습해 오기로 했다. 빨리 진행해야 해서 집에서 최선을 다해 연습해 오라고 신신당부하셨다.


흔히들 광고, 스폿 하면 TV나 라디오 광고를 많이 생각할 것 같은데, 맞다 그거다. 그런 매체 광고는, 특히 TV는 예전에는 이미지가 주가 되다 보니 끝에 잠깐 임팩트 있게 성우들이 출연했는데 요즘은 공익광고나 기업이미지 광고같이 이야기 형식의 광고들도 많아지면서 성우분들이 많이 출연하신다. 성우지망생 기초반 수준에서는 하기 힘들다. 라디오는 뭐 말할 것도 없이 성우님들의 주무대이지만 대신 광고들이 자주 바뀌지는 않는 것 같다. 한번 제작하면 몇십 년씩 쓰는 것 같다. 우리를 가르쳐 주신 선생님 중에,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스타키 보청기’ 라디오 광고에 출연하신 분도 있었다.


기초반이 할만한 광고, 스폿은 드라마의 다음회 예고, 박람회 같은 데서 사용하는 기업 소개 내레이션, 관광지 홍보 내레이션 정도였다. 그래도 효과음과 배경음악이 있으니 느낌이 사뭇 달랐다. 배경음악이 웅장하면 나도 같이 웅장해지고, 칼싸움 효과음이 나오면 나도 같이 긴박해졌다. 마치 진짜 성우라도 된 듯이 손에 땀을 쥐고 했다. 배경음악이 깔리니까 사람을 흥분하게 하는 뭔가가 있었다. 제일 어려운 것은 타임라인에 맞춰 대사를 치고 들어가는 것인데, 평소 박치가 아니라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딱딱 치고 들어가는 것이 매우 힘들었다. 노래방에서 노래 시작할 때 ‘3, 2, 1’ 카운트다운... 사실 잘 못 맞춘다. 나는 노래방 기계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문제였나 보다. 분명히 ‘5, 4’ 카운트다운 세는 속도와 ‘3, 2, 1’ 세는 속도를 다르게 설정해 놔서 노래 부르는 사람 헷갈리게 설정해 놨을 거라는 음모론을 제기하던 나였는데... 노래방 기계에는 아무 문제가 없음이 밝혀졌다.


광고와 스폿은 정말 재미있었다. 호흡과 발성이 부족해도 배경음악이 커버해 줬다. 그리고 실제로 내레이션을 해보면 알겠지만 포즈(Pause)를 넣거나, 띄어 읽는 등 오디오가 비는 구간이 분명히 있는데 이걸 참기 힘들다. 그래서 기초반 때는 내레이션이 점점 빨라진다. 그런데 광고, 스폿은 이 비는 부분을 배경음악이 채워주니까 심리적 안정감도 느낄 수 있었다. 잠시나마 성우가 된 듯한 기분이 들어서 확실히 기분 전환도 되었고, 다시 힘이 났다. 짧았지만 좋은 시간이었다. 지금도 그때 했던 배경음악이 어디선가 들려오면 나도 모르게 손에 땀을 쥐고 치고 들어갈 부분의 박자를 센다. 슬슬 봄기운이 찾아오고 있다. 혹독한 한파에 그동안 고생했는데, 이렇게 따뜻한 날씨가 한 번씩 고생을 멈춰주는 것 같다. 광고, 스폿은 힘들다면 힘든 성우기초반 생활에 봄기운 같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불청객 미세먼지도 봄기운과 함께 덩달아 찾아온다. 갑자기 성우공채시험이 들이닥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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