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기억 속의 나, 현재의 나

Part 1. 내가 나를 보는 방식 (자기 인식) (5)

by 철없는박영감
콕 집어 '나'라는 순간


나는 늘 현재를 말하지만, 현재를 말하는 순간 이미 미래는 오지 않았고, 과거는 사라졌다. 한때는 이렇게도 생각했었다. '이미 지나간 과거는 돌이킬 수 없으니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자.', '지나간 일은 묻어두고 앞으로 다가올 일만 생각하자.' 기억상실증을 유발하는 이런 자기 위안 속에서 점점 괴로워하는 나를 발견하고는 이것이 해법이 아님을 알았지만, 이것보다 나은 방법 또한 찾지 못했다.


그러다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을 접하고 조금 깨달았다. 내가 무엇을 괴로워한 것인지를... 과거, 현재, 미래는 없다. 과거는 기억이라는 형태로, 미래는 기대라는 형태로, 결국 모두 현재의 나에게 속해 있다. 내가 기억하는 나, 내가 기대하는 나, 그리고 지금 눈앞에 있는 내가 동시에 현재라는 사실이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것이다.


기억 속의 나는 때로는 낯설다. 오래된 사진 속의 나는 지금의 나와 닮았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 같다. 그때의 웃음은 지금의 웃음과 같은가? 그때의 고민은 지금의 고민과 같은가? 기억은 나를 붙잡아두지만, 그 기억은 언제나 현재의 마음이 다시 빚어낸 그림자다.


현재의 나는 기억을 통해 과거를 다시 쓰고, 기대를 통해 미래를 새로 그린다. 그래서 현재는 단순한 순간이 아니라, 기억과 기대가 겹쳐진 복잡한 층위다. 나는 지금의 나를 말하면서도, 동시에 기억 속의 나와 미래의 나를 함께 말하고 있는 셈이다.


이 겹침 속에서 나는 묻는다. 기억 속의 나는 정말 나인가? 아니면 현재의 내가 만들어낸 허상인가? 현재의 나는 진짜인가, 아니면 기억과 기대가 덧칠한 가면인가?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세 가지 현재... 기억의 현재, 눈앞의 현재, 기대의 현재... 그 속에서 나는 어느 하나로 고정되지 못한다.


물욕이 차올라 강림한 지름신을 내일의 내가 해결할 거라며 정당화하면 괜찮은 건가? 주변인과 심지어 나를 모르는 콘텐츠 속 인플루언서들까지 그래도 된다고 부추기는데... 나는 왜 그들의 말에 부화뇌동했던 어제의 내가 싫어질까? 이불킥을 날리며 과거의 나를 아무리 채근해 봐도, 그때의 나는 돌아오지 않는다. 기억 속의 나는 현재의 내가 다시 빚어낸 그림자일 뿐이다. 후회는 기억을 다시 쓰는 방식이고, 자기 합리화는 기억을 덧칠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기억 속의 나는 늘 낯설고, 현재의 나는 늘 불안하다.


거울 앞에 선 나는 묻는다. 나는 기억 속의 나인가, 현재의 나인가, 아니면 그 둘을 겹쳐놓은 흔들림인가? 어제의 내가 했던 고민이 해결되지 않은 채 오늘의 나에게 떠넘겨졌다고 할 수 있을까? 오늘의 문제를 내일의 나에게 맡겨도 되는 걸까? 나의 이런 질문들은 임시적이고 일시적이다. 순간의 질문들이 쭉 이어져있는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잊어버리면 그만인데? 하긴 그러다가 갑자기 기억나면 또 괴로워지지...


이 불안 속에서 나는 깨닫는다. 기억 속의 나와 현재의 나는 서로 다른 사람이 아니라, 같은 사람의 다른 층위라는 것을... 나는 기억으로 과거를 살고, 기대로 미래를 살며, 결국 모든 것은 현재라는 순간 속에서만 존재한다라는 것을...


'나는 언제나 미루어진 존재인가, 아니면 순간마다 새로 태어나는 존재인가.' 아마도 나는 그 두 가지를 동시에 품은 모순일 것이다. 그 모순 속에서 흔들리며, 흔들림 자체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나' 아닐까? 내 질문과 괴로움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나를 정의하는 낱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