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와 진실 사이

Part 2. 나를 더 깊이 이해받고 싶다. (4)

by 철없는박영감
감정의 외주화


유튜브 알고리즘은 요사스럽다. 어떻게 그렇게 내 마음을 잘 아는지, 때로는 나도 모르는 나를 깨닫게 해 준다. 신기할 정도다. 좋아할 만한 영상을 척척 추천해 주고, 내가 찾던... 혹은 필요로 하던 아이템, 제작법, 적용방법을 알려준다. 그리고 어떤 때는 하고 싶었지만 차마 할 수 없었던... 혹은 막연하게 이렇지 않을까 생각하던 뇌피셜을 오피셜로 탈바꿈시켜 준다. 그 순간 뇌는 도파민에 절어버린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무비판적 수용 상태가 되고, 좀비처럼 화면 앞에 붙들려 있게 된다.


그러다 문득 자각한다. '어! 왜 댓글을 봐야 개운하지? 왜 유튜버가 시키는 대로 하고 있지? 왜 그들이 추천하는 것을 선택하지? 나는 어딨지?'. 정체 모를 누군가에게 스스로 권위를 부여하는 나, 어떻게 보면 현대판 자발적 노예인 나를 발견한다. 그나마 빨리 자각해서 다행이라며 이내 시청기록과 검색 기록을 지운다. 그러면 처음엔 새로운 콘텐츠들이 추천되며 신선한 기분이 든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예전에 보던 영상들이 다시 스멀스멀 나타나기 시작한다. 마치 처음 추천인 양. 그때 드는 생각은, ‘아, 나는 원래 이런 성향인 건가? 난 노예로 살 팔자인가?’라는 자괴감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채널 추천 금지, 차단이라는 초강수를 둔다. 하지만 그것도 결국 몇 단계 지나면 그 나물에 그 밥이 된다. 게다가 더 최악인 것은 다양성마저 실종된다는 것이다. 살려둔 뉴스채널, 살려둔 패션정보채널, 살려둔 건강정보채널을 피해서 계속 '밑으로 밑으로' 올리다 보면, 결국 그렇게 지워댔던 국뽕채널, 연예가십채널, 카더라통신급 가짜뉴스채널이 다른 이름을 걸고 나타난다. '아~ 이건 대체 뭐야? 난 뭘 위해 그렇게 열심히 구독을 취소하고, 차단한 거야?'


이것은 내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맡긴 결과다. 감정의 외주화. 그게 간편하고, 효율적이라는 것이 현대 사회의 선이다. 곰국 끓이듯 고우고, 시간을 들여 발효시키고, 한 땀 한 땀 뜨는 것은 비효율, 악으로 간주한다. 내 감정을 누군가에게 맡겨뒀으니, 거의 탈인간급... 즉 자발적 노예가 맞다. 하지만 형식은 내가 수주를 한 형태로 교묘하게 갑을이 바뀌어있다.


이 경험은 나를 이해해 달라는 요청과 닮아 있다. 알고리즘은 나를 이해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내가 남긴 흔적을 되풀이할 뿐이다. 날 위해 일해줄 이는 세상에 나밖에 없다. 공감도 마찬가지다. 공감은 우리를 친절하게 만들지만, 그 친절은 결국 자기 확장의 방식으로 작동한다.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는 따뜻하게 수용하지만, 그 밖에서는 싫은 데 무슨 이유가 필요하냐는 식의 무논리로 배척한다.


결국 오해와 진실은 늘 교차한다. 알고리즘은 나의 진실을 보여주는 듯하지만, 사실은 오해의 반복이다. 공감은 나를 확장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배제의 논리를 강화한다. 진실은 그 사이에서 흔들리고, 나는 그 흔들림 속에서 자꾸 자괴감과 자각을 오간다.


오해와 진실 사이에서 중요한 것은, 그 덫을 인식하는 순간이다. 오해를 두려워하지 않고, 진실을 고집하지 않으며, 그 사이에서 나를 읽어내는 시선을 다시 세우는 것. 그 과정에서 나는 조금 더 깊이 이해받고, 조금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그 순간, 알고리즘이 아닌 내가 나를 선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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