흩어진 자아들

Part 4. 내 안의 조각들을 정리하고 싶다 (1)

by 철없는박영감
판도라의 상자


판도라의 상자에 남은 희망은 과연 구원일까, 재앙일까? 세상의 온갖 죄악과 재앙을 모아놓았다는 상자 속에서 마지막으로 발견되었다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건대, 재앙의 범주에 속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겠다. 음... 그렇다면 희망은 인간을 위로하는 선물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끝없는 기다림과 좌절을 낳는 속박일 가능성도 있다.


그냥 혼자 생각이지만, 희망은 구원과 재앙 사이에서 흔들리는 인간의 자아를 드러낸다고 본다. 그래서 상자에서 도망가지 않고 남아있던 것은 아닐까? 희망이 자기의 정체성을 의심하던 사이 도망칠 기회를 놓쳤을 수도... 아니면 희망은 욕망의 진화된 형태라서 인간 따위에게 방제될 걱정이 없는... 인간 곁에서 자신의 이익에 따라 떠날지 남을지를 결정할 수 있는 '쥐'처럼 말이다. 음... 희망은 어쩌면 쥐toRl일지도 모른다.


should have + P.P


욕망은 현재를 지배하고, 희망은 미래를 지배한다. 동물은 욕망에 충실하며 망각 속에서 자유롭게 살아간다. 그러나 인간은 기억과 언어를 통해 욕망을 미래로 확장시켜 희망을 만들어낸다. 이때 희망은 단순한 욕망이 아니라, 기억과 시간의 회로가 낳은 산물이다. 기억은 인간을 성장시키지만 동시에 후회와 자책 속에 묶어둔다.


인간은 이 기억 때문에 기쁘기도 슬프기도, 행복하기도 불행하기도 하다. “should have p.p.”라는 영어 표현은 바로 그 기억의 산물이다. 과거를 다시 평가하고 후회하거나 비판하는 언어적 구조. 동물에게는 필요 없는 시제지만, 인간에게는 필수적인 장치다. 괜히 어렵게 학술적으로 '가정법 과거'라고 이름 짓기보다 그냥 '가정법 후회 시제'라고 지었으면 영문법은 사랑받는 과목이 되었으리라.


망각은 축복일까, 의미의 소멸일까?


동물은 망각 덕분에 현재를 자유롭게 살아간다. 그러나 인간은 기억 때문에 의미를 붙들고, 후회와 희망 속에서 흔들린다. 망각은 자유를 주지만, 의미를 비워낸다. 기억은 의미를 주지만, 자유를 빼앗는다. 인간은 이 두 힘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며 오늘도 '삶의 의미'를 찾아 취하고, 주정하고, 행패를 부린다.


아침이 되어 숙취에 괴로우면 만사가 귀찮아진다. 그리고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의미가 정말 필요한가?'로 바뀐다. 그냥 당장 지금의 이 깨질 것 같은 두통과 메스꺼움을 가라앉혀 줄 뭔가를 입맛이 없어도 뱃속으로 욱여넣어야 한다.


숙취에서 정신이 들면 이런 생각이 든다.


삶은 의미 없이도 충분히 살아질 수 있다. 지금 이렇게 속 편하고 따뜻한 햇살을 맞고 있는 게 얼마나 행복하고 평안한가 느끼면서 말이다. 하지만 잠시 후, '이제 좀 씻자~'라는 인간다움을 되찾고 문명으로 되돌아가려는 생각이 들면 다시 술 생각이 난다. 그리고 '내가 또 술을 먹으면 사람 새끼가 아니다'는 선언은 '해장술'을 핑계로 허문다.


이렇게 의미를 찾으려는 강박은 인간을 속박할 수도 있다. 의미는 필수라기보다 선택적 장치다. 의미를 묻는 행위 자체가 인간의 조건일 수 있지만, 의미를 찾지 않아도 삶은 흘러가고 경험은 쌓인다. 만약 삶의 의미가 단순히 생존이라면, 그것은 자연의 질서일 뿐이다. 그러나 인간 사회는 정의(justice)를 만들어 약자를 보호하고 공정을 추구한다. 생존이라는 자연의 의미와 정의라는 사회적 의미는 서로 다른 층위에서 충돌한다. 인간은 이 두 질서 사이에서 긴장하며 살아간다.


희망을 붙드는 나, 희망을 의심하는 나. 기억에 매여 후회하는 나, 망각 속에서 자유를 꿈꾸는 나. 의미를 찾으려는 나, 의미 없이도 충분하다고 말하는 나. 이 자아들은 충돌하면서도 결국 나라는 퍼즐을 이루어간다. 흩어진 자아들은 모순 속에서 대화하며, 그 대화 자체가 삶의 서사가 된다.


결국 삶의 의미를 모른다는 것, 그 자체가 삶의 의미일 수 있다. 답을 찾지 못하는 상태가 인간을 탐구하게 만들고, 그 탐구가 곧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 된다. 의미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흩어진 자아들이 충돌하고 대화하는 그 순간, 이미 삶의 의미는 살아 움직이고 있다. 딸꾹! 숙취해소제는 아무 소용없다. 간만 괴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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