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 작가, 바리스타, 번역가

Part 4. 내 안의 조각들을 정리하고 싶다 (2)

by 철없는박영감
과로사의 위기에 처한 백수


하고 싶은 게 많아서, 뭘 해볼까 고르느라 시간을 다 보내고 있다. 백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모든 가능성 속에서 길을 잃은 사람이다. 작가가 되고 싶고, 바리스타가 되고 싶고, 번역가가 되고 싶다. 그러나 정작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하루가 저물어간다. 바리스타와 번역가는 내가 커피를 좋아하고 영어를 잘하고 싶다고 하니까 AI가 건네준 직업이었다. 그럴싸해 보이는 이름표가 내 앞에 놓이자, '한번 해볼까?'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하지만 가능성의 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 현실과 공상의 그 한 끗을 넘어서지 못하는 나. 백수로서의 나는 모든 가능성을 품고 있지만, 그 가능성은 언제나 미완의 상태로 남아 나이만 먹어간다. 작가가 되고 싶다는 열망은 원고의 첫 문장에서 멈추고, 바리스타가 되고 싶다는 상상은 커피 향 속에서만 머물며, 번역가가 되고 싶다는 꿈은 언어의 틈새에서 길을 잃는다.


나는 늘 가능성의 문 앞에 서 있지만, 그 문을 열지 못한 채 시간만 흘려보낸다. 불혹은 한참 전에 지났고, 이제 이립이 더 가까운 나이라고 핑계를 대며 성과 없음을 합리화하지만, 언제나 눈앞에 있는 문... 하지만 손잡이를 잡을 용기는 늘 내일로 미뤄진다. 그리고 '이 나이에 성과, 성공이 뭐가 중요해'라며 '세상아 망해라!' 악다구니를 쓴다.


백수는 두 종료로 나뉜다.


돈 있는 백수, 돈 없는 백수. 아! 많고 적고는 떠나서 말이다. 이렇게 기준을 바꿔 볼까? 먹고살만한 백수, 못 먹어 곧 죽을 백수. 나는 전자 쪽에 좀 더 가깝지만 마음이 빈곤한 후자 쪽 부류다. 많이 없어서 그렇지 있는 건 돈 뿐인 백수다. 그래서 지금 있는 것을 밑천으로 불리던가, 아니면 최대한 아끼며 살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신경 써야 하는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늘 까먹을까 봐 노심초사해야 하고, 작은 혜택 하나라도 놓칠까 전전긍긍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비굴해져야 한다. 하여튼 별 쓸데없고 중요하지 않은 일로 과로사하기 딱 좋다. 그냥 있으며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안분지족 하는 삶이 가장 속 편할 텐데... 알면서도 막상 그지꼴로 사는 것은 싫고, 여전히 제삼자의 시선을 살핀다. 도대체 커피 주문하는데 성우발성으로 목소리는 왜 까는데? 그나마 키오스크가 생겨서 이제는 진동벨 울리면 '감사합니다'만 하면 되니 가증스러운 모습 더 안 보여도 돼서 다행이다.


빈둥빈둥하더라도 육체적으로 안정돼 있으니 가만히 있으면 되는데, 이상하게 불안은 변태가학적 본능을 발동시켜 스스로 정신을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 생각을 멈추지 말아야 하고, 글을 써야 하고, 하다못해 뭐라도 해야 한다며 책이라도 읽어야 한다. 그리고 쓰다 보니 언감생심 '작가?'라는 몹쓸 병도 도진다. 불치병이라며 스스로 깔아뭉개고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하고 정말 조용히 나무늘보처럼 살아보지만, 그래도 시간은 잘 가고 몸은 노쇠해져 간다.


누워있으면 망상만 늘어서 이번에는 '소설가?' 히히! 요즘말과 다른 의미로 정말로 미쳤다!!! 찢었다!!! '아~ 잡생각이라도 떨치게 몸이라도 놀려야지'하면서 산책을 나서 본다. 어제는 만 삼천보... 그제는 만 오천보... 잡생각의 양만큼 걸음 수도 늘어난다. 건강앱에서는 전년에 비해 평균 걸음수가 늘었다면 칭찬을 쏟아낸다.


하지만 그래도 너무 걸었는가... 발에서 피가 나고, 골반이 쑤신다.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도 AI는 건강해진다고 박수를 보낸다. 다행히 요즘은 너무 추워서 밖에 나갈 수 없다. 어쩌면 이 변태는 곧 백팔배를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이번에 무릎이 아작 나겠군. 적당히 하자!


결국 백수의 삶은 가능성과 망상 사이에서 찢어지고, 그 틈에서 나는 오늘도 운동화 끈을 맨다. 걷는 발걸음마다 미완의 가능성이 흔들리며, 그것이 곧 나의 하루다.

매거진의 이전글흩어진 자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