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릭터 형성
대학교 때 풍물패에서 동아리 활동을 했었다. 신입생 1학기에는 이것저것 다양한 체험을 해보겠다며 동아리 활동을 안 했다. 결국 다양한 종류의 술만 체험한 것 밖에는 안 됐지만... 2학기에는 뭔가 진득하게 활동할 터가 필요했다. (그때 성우 동아리나 연극 동아리를 할걸, 지금 후회해서 뭐 하나. 무대공포증이 해결 안 된 상태였다.) 만약 미성년자 성우지망생이라면 반드시 일반대학으로 진학해서 동아리 활동으로 성우 경험을 해보기를 추천한다. 인생에서 남들이 가는 길로 가는 경험을 해야 연기를 잘할 수 있다.
어쨌든 당시 우리 단대에는 풍물패가 중앙동아리로 되어 있어서 동아리 활동하면 자연스럽게 풍물패 활동을 떠올렸다. 운동권이네... 데모하러 다니네... 이런 것, 물론 해보기는 했다. 그런데 농활에서 잘해주신 형님들과 의리 차원에서 보라매 공원에 한 번 참석했지 더는 안 했다. 최루탄 처음 맡았는데 화생방 사과탄은 저리 가라다. 어쨌든 그 뒤로는 학생운동활동은 안 했고, 풍물패도 문예동아리로 방향을 새로 잡았던 터라 학교전체행사 빼고는 시위현장에 따라가는 일은 없었다.
2학기에 늦게 시작하다 보니 (난 왜 이렇데 다 늦게 시작하는지 모르겠다.) 수업시간 빼고 공강시간에는 거의 동아리실에서 계속 장구 연습만 했던 것 같다. 계속 연습하고 있으면 선배들이 한 번씩 들르면서 이것도 가르쳐주고, 저것도 가르쳐줬다. 그래서 만약에 성우지망생 중에 경제적으로나 생활적으로나 확실하게 계획을 세웠다면 가능하면 학원 죽돌이, 죽순이가 되라고 조언한다. 계속 성우 관련 환경에 본인을 노출시키면 뭐든지 배운다. 어쨌든 그렇게 늦게 시작했지만 실력이 쭉쭉 늘어서 2학년이 되어 각 악기별로 장(長)을 뽑는데, 내가 장구 파트 장이 되었다. 보통 상장구라고 칭한다. 상장구가 되어 전대(前代) 장구치배 누나들에게 기술을 전수받아서 각종 행사를 뛰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내가 장구를 칠 때 반응이 예쁘다고 하는 거다. 남자애가 왜 이렇게 예쁘게 장구를 치냐고 한다. 엥? 당시 동아리실에 거울이 없어서 몰랐는데, 녹화된 행사 영상을 보니 내가 봐도 선이 곱더라... 선배들과 같이 원인을 분석했다.
가만히 보니 선배 누나들이 전수해 준 기술이 내 머릿속에 각인이 된 것 같았다. 키만 컸지 흐릿하게 실루엣만 보면 전대 상장구 누나랑 똑같았다. 결론을 내렸다. 아~ 여자선배한테 배워서 저렇다. 그 뒤로 남자 상장구를 찾아봤는데 학교 내 모든 풍물패의 상장구가 여자였다. 간혹 장구를 치는 선배가 있었지만 대부분 꽹과리나 징, 북을 하는 사람들이었고, 앉아서 치는 것만 했지 나처럼 장구를 메고 선반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나중에 필봉마을 전수관을 가보니 무형문화재 장구치배 사부님이 있기는 했지만 이미 때가 늦었었다. 머릿속에 선배 누나의 모습을 다른 것으로 새로 덮어쓰려고 국악원 영상자료실도 가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지금처럼 유튜브나 영상기록이 접하기 쉬웠다면 들고 다니면서 봤겠지만 당시에는 CD로 음악 듣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1년 기간 동안 선이 고운 남자 상장구로 그냥 행사를 뛰었다. 어쩌겠냐 배운 게 저건데...
성우 학원을 다니면서도 어떻게 하다 보니 계속 여자 선생님에게만 배웠다. 남자 선생님은 기초반 때 PD님이 전부였다. 그래서 각 방송국 성우극회 남자선생님들 음성 샘플도 찾아보고, 라디오 드라마도 찾아들었다. (팟캐스트에 KBS라디오 드라마 잘 되어있다. 지망생이라면 꼭 듣기를 바란다. 문제가 여기서 나온다.) 그때는 유튜브나 영상샘플이 매우 귀했다. 직접 결재를 해야만 볼 수 있는 것들이 많았다. 어둠의 루트는 대부분 자막판이었다. 그래서 심화반을 다니다가 당시 선생님께, 죄송하지만 남자선생님 한번 초빙해 주시면 안 되냐고 반장으로서 요청을 드렸다. 지금 생각하면 참 당돌했다. 어쨌든 선생님도 내가 계속 요청하니까 당시 학원 원장님께 SOS를 보내주셨다. (이 때는 스튜디오와 분리돼서 유명 성우님이 운영했다.) 원장님이 딱 오더니 처음 하는 말씀이 이랬다.
"너희들이 요청했다며? 뭐가 궁금한데?"
"남자 성우님께 연기를 배워보고 싶었습니다."
"그래? 그럼 어디 한번 해봐."
확실히 여자 성우님들과는 포스부터가 남달랐다. 이 이후로 남자선생님들 강의반이 많아졌다. 그리고 연기수업과 녹음수업을 남녀성우님으로 반을 짜게 되었다. 성우님의 '그럼 어디 한번 해봐.' 이 말씀에 순간 얼음이 됐다. 예상치 못하게 갑자기 훅 들어온 연기 요청. 보통 여자성우님들은 이야기를 먼저 해주시거나 처음이면 본인이 먼저 책을 읽어주신다거나 출연작들을 알려주신다거나 대화를 먼저 하면서 친근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시는데 남자선생님들은 보통 '너 성우 왜 하려고 그래?', '공부한 지 얼마나 됐어?' 아니면 '어디 한번 해봐.'이다. 나중에 선생님들도 특징별로 분류해서 쓰면 재밌겠다. 어쨌든 갑작스러운 선생님의 요청에 한 명씩 일어나서 연기를 했다. 이것도 보통 여자선생님들은 한 명씩 듣고 피드백해 주시고 다음시간에 다시 연습해와 하는 방식이었는데, 남자선생님들은 한 명이 연기가 끝나면 '다음' 또 다 듣고 '다음'... 이렇게 연기만 쭉 들었다. 그리고 '음...'이라며 생각에 빠졌다. 같은 반 친구들은 모두 얼음 상태다. 나는 괜히 요청을 드렸나 살짝 후회도 밀려왔다. 내가 모두를 곤경에 빠뜨린 것 같았다. 그리고 말문을 열었다.
"자! 성우가 되려고 온 거지?"
"네"
"그러면 오늘부터 가서 자기가 가고 싶은 방송국의 현재 전속성우 음성을 다 들어봐."
"?"
처음 듣는 신선한 접근이었다.
"각 방송국이 사람을 뽑을 때, 지금 있는 전속들이 나가면 걔를 대체할 사람을 뽑게 되어있어. 그러니까 각 방송국 전속들 음성 다 찾아서 들어보고 본인이랑 비슷한 결을 찾아서 그 사람 연기를 다 찾아 들어봐."
오... 역시 남자 선생님들은 또 달랐다. 보는 관점이 여자선생님들은 내 실력 향상 위주였다면, 남자 선생님들은 조금 더 분석적이었다. 저런 식의 접근 생각도 안 해봤던 거였다. 그냥 내 실력을 키워서 'Only One'이 될 생각만 했지, 합격 전략을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 말로 하면 일타강사 같은 느낌이었다. 새로운 눈을 뜨게 됐다. 바로 그날 집으로 오는 길에 모든 방송국 전속 성우님들의 음성샘플을 새로운 관점으로 다시 들었다. 찾는 대상은 '내가 좋아하는' 혹은 '되고 싶은 소리'가 아니다. 나랑 가장 결이 비슷한 목소리다.
여자 선생님들도 수업 중에 한 번씩 'OO성우랑 비슷하다. 가서 한번 들어봐.'라고 말씀해 주셨던 것이 생각났다. 나는 KBS의 원호섭 성우님을 추천받았었다. 역사스페셜에 많이 나오신다. 그때는 기초반이라서 듣고도 까먹고 있었는데, 다시 생각이 났다. 물론 전속성우는 아니지만… 이미 성우계에 한 획을 그은 유명한 성우님이었다. 사실 나 같은 평범한 목소리에 같은 결이라고 할 만한 알맞은 전속성우님이 없었다. 그래서 원호섭 성우님으로 쭉 팠다. 어쨌든 그냥 여러 성우님들을 따라 하다가 뭔가 전략을 갖고 찾아서 연구를 하니까 길이 더 명확해졌다. 아주 좋았다. 원장님이 현재 선생님께 휴가도 드릴 겸 한 번 더 강의해 주시겠다고 했다. 이번에는 애니메이션 캐릭터 관련이었다. 역시나 연기는 듣기만 하고 피드백 없이 생각에 잠겼다가 두 번째 비법을 풀어주셨다. 아마도 잠깐 본 연기로는 실력을 제대로 평가할 수 없기도 하고, 어떻게 발전해 왔으며, 어떤 점이 부족한지 단번에 집어내기는 힘드셨을 거로 생각된다. 카리스마 있게 시작해서 갑자기 아빠 같은 분위기로 바꾸기도 힘드셨을 거고… 우리 연기가 평가할 수 없을 정도였을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두 번째 일타 강의는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이것저것 마구잡이로 하지 말고 지금부터 시험 때까지 시간분배를 잘해서 연령대 별로 한 개씩 본인만의 캐릭터를 완성하라는 것이었다. 무슨 말이냐면, 보통 애니메이션 연기 수업은 본인이 애니메이션을 찾아보고, 거기서 대사를 뽑고 연습해서 선생님께 보여드렸는데, 그렇게 하다 보면 눈에 뜨이는 것만 중구난방으로 하게 되다 보니 공부를 어렵게 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이번주부터라도 10대부터 시작하든, 노년부터 시작하든, 첫 주에 10대 미소년 캐릭터 잡아서 연습하고 선생님께 컨펌받고, 다음 주에 10대 열혈 캐릭터 잡아서 똑같이 하고, 다음에 10대 명랑한 캐릭터 잡아서 쭉쭉 이런 식으로 연령대별로 준비하라고 하셨다. 그러면 체계적으로 실력이 잡힌다고 코치해 주셨다. 듣고 보니 맞는 말씀이었다. 그동안은 사실 못하는 연기는 되도록 패스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진즉에 왜 저런 생각을 못했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강의니까 비법을 전부 전수해 주겠다면서, 애니 쪽 캐릭터가 완성되면 그때부터는 주변사람들 말투를 꼭 관찰하라고 하셨다. 아역 연기가 어려운 사람은 놀이터에 놀고 있는 아이들 말투를 연구하고, 노인 연기가 어려운 사람은 탑골공원에 가서 실제 노인분들의 말투를 연구하라고 하셨다. 애니메이션에서 성우들이 하는 거 성대모사하듯이 따라 하지 말고...
그때부터 나는 우리 공장 사람들의 말투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당시에 공장 반장님들 중에 깐깐하기로 소문난 분이 있었는데 그분이 목소리가 까랑까랑하니 아주 성격 고약한 꼬장꼬장한 노인네 같은 목소리였다. 몇 달간 말투를 연구하다가 마침 그런 성격의 노인역을 할 기회가 왔다. 상장구 선배 누나 모습이 각인되었던 것처럼 내 귀에 그 반장님의 말투가 각인되어 있었다. 대사를 읽는데 그냥 내가 그 반장님이 되어서 술술 입에서 자동으로 나왔다. 선생님이 들으시고 약간 놀라시면서 주변에 진짜 그런 사람이 있는 거냐고 물으셨다. 살짝 부끄러워서 얼굴이 빨개지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잘했다고 칭찬해 주셨다. 개성도 있고, 너무 과하지도 않고 딱 적당하게 캐릭터를 잘 잡은 것 같다고 하셨다. 그 뒤로 귀에 이어폰 꽂고 다니는 짓은 하지 않았다. 버스에서건 지하철에서건 사람들의 말투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좋은 캐릭터를 발견하면 귀에 각인시키려고 노력했다. 내 말처럼 술술 나올 수 있도록... 다른 사람의 수십 년간의 살아온 이야기를 단번에 훔쳐올 수 있는 것이 말투였다. '아 캐릭터는 이렇게 잡는 거구나'를 느꼈다. 아마 다른 선생님도 계속 말씀해 주셨던 것인데, 화자가 남자선생님으로 바뀌고, 분위기도 비법전수에 집중하는 분위기라서 더 확 와닿은 것 같다. 분명 내가 듣고도 흘려보낸 귀중한 옥석 같은 말씀 중에 하나였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