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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텍스트의 존재를 알다

무궁무진한 연기(희로애락)의 세계

by 철없는박영감

연기라는 것이 인간의 희로애락을 다루는 영역이라서 그런지 공부를 하다 보면 인생살이와 비슷한 양상으로 흐른다. 우선 기초반 첫 수업에서 나를 찾자며 다시 태어났다. 발음, 발성, 호흡을 배우면서 아기 때 걸음마하듯이 잘 안되지만 아장아장 하나씩 하나씩, 조금 틀리고 넘어지더라도 선생님과 친구들의 응원을 받으며 배워나갔다. 그렇게 조금씩 자라다가 학교에서 기초소양을 쌓듯이 소리로 가래떡도 뽑아보고, 귀도 트이고, 친구들과 웃고, 눈물짓다가 점점 성숙해지면서 성우라는 꿈이 진지하게 다가오면 사춘기가 온다. 요즘말로 중2병이라고 하나? '나는 왜 태어났지? 나는 앞으로 뭐 하면서 살아야 하지?' 같은 정확한 실체를 알 수 없는 고민으로 방황을 하게 된다.


나도 이 정도 시기였던 것 같다. 성우 훈련을 하면서 발음, 발성, 호흡 같은 기초적인 능력은 자리를 잡아가는데 '성우가 뭐지?'라는 근본적인 물음이 생겼다. 꼭 성우가 아니더라도 '연기가 뭐지?'가 더 맞는 표현이겠다. 그래서 한동안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로 비유했던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냈다. 사실 진짜 인생은 아직도 사춘기이다. 아니 사추기인가? 40대 중반이 된 이제야 '나는 왜 태어났지?'라는 의문의 실체에 직접 부딪혀볼 용기가 나서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그동안 자기 계발서도 읽어보고, 심리학 책도 읽어보고, 방탕하게 살아보기도 했지만 풀리지 않던 의문의 실체 그리고 내가 무엇을 추구하고 싶었는지 철학을 접해 보고 깨달았다. 아니 철학이 답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먹고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미루다가 이제야 직접 부딪힐 용기가 생겼다. 연기도 비슷해서 '뭐지?'라는 의문의 실체를 알 수 없었기에 답답하고 짜증 나고, 거기에 지지부진한 내 모습까지 합쳐져서 나락으로 빠지고 있었다. 여기에 철학같이 빛을 밝혀준 두 분의 선생님이 계시다. (성우 되고 합격수기를 썼다면 더 좋았을 것을 늙고 못난 제자는 이렇게 에세이를 쓰고 있습니다.)


한분은 EBS 성우극회 장은숙 성우님이다. 거의 3~4년간 배웠고, 내가 여기에 쓰고 있는 거의 모든 에피소드는 선생님과의 일화다. 만약 성우지망생을 계획하고 있는 분이라면 장은숙 성우님을 찾아가 배우는 것을 적극 추천한다. 또 한 분은 KBS 성우극회 이병용 성우님이다. 정신적인 지주였고, 지금도 걱정된다고 전화 주시고 여전히 용기 많이 주시는 정신적 지주이시다. 내가 연기나 어려운 일로 술 먹고 카톡으로 주정 많이 부렸던 선생님이시기도 하다. 이 글도 성우 선생님들 중에는 이병용 성우님께만 쓰고 있다고 알렸는데 읽어보시고 느낌 좋다고 많이 칭찬해 주셨다. 글을 올리고 장은숙 선생님께도 전화를 드렸다. 오랜만에 선생님 목소리 들으니까 반갑고 죄송하고, 그리고 여전히 내 얘기 하나하나 들어주시고 신경 써주시는 음성에 성우지망생 시절로 다시 돌아가는 것 같아서 행복해졌다.

"선생님 제가 브런치라는 글쓰기 플랫폼에 제 맘대로 학원 얘기를 쓰고 있었는데, 같이 수업 듣던 친구들이 오랜만에 전화가 와서 찌들어 있다가 제 글을 읽고 꿈꾸던 시절이 생각나서 정신 차리게 된다고 하고, 조회수 점검하다가 '성우' 검색어 링크로 들어오는 것이 보여서 ‘멋대로 쓰는 거 들키는 건 시간문제다’라는 생각에 이실직고하려고 전화드렸어요."

선생님은 ‘봄기운이 느껴지며 새 바람이 불어오려나’하고 알 수 없는 기대감이 들었는데, 좋은 소식 들어서 기분이 좋다고 더 기뻐해주셨다. 훌륭한 두 선생님 덕분에 미약하나마 철학도 생기고 성우 혹은 연기자의 꿈을 가진 자아도 조금씩 형성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나는 실패했다. 하지만 나는 항상 움직이는 사람이라서 지금은 글을 쓰고 있다. 또 다른 일에 계속 나 자신을 밀어 넣어 볼 것 같다. 오늘은 연기철학이라고 하면 매우 거창하지만 그 새싹을 틔우게 해 주신 장은숙 성우님과의 일화를 쓰려고 한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한 '서브텍스트' 이야기다. (선생님께서 예쁘고, 아름다우신 선생님으로 묘사해달라고 부탁하셨는데 안할거다. 나 혼자만 알고 있을거다. 궁금한 사람은 찾아가서 배우시길...)


앞에서 '서브텍스트'를 대사나 장면 속에 숨어있는 진짜 의도라고 말했었다. 이것이 서브텍스트를 전부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전까지 배워오던 실체를 알 수 없던 것들을 '서브텍스트'라는 용어로 묶어서 설명할 수 있게 되면서 방황을 끝낼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서브텍스트라는 용어 하나면 다 설명이 되는데, 그렇지 못했던 거다. 이전까지는 우리가 준비가 덜 된 것도 있고, 못 알아들을 수도 있기 때문에 선생님들이 느낌으로 풀어서 설명해 주셨다. 그런데 ‘서브텍스트’라는 개념이 생기자 마치 대학교 때 원서로 공부하는 것이 더 명쾌하고 이해하기 쉬웠던 것처럼 명료해졌다. 선생님은 아나운서도 준비하셨고 연기전공 대학원 공부도 하셨던 분이라서 비단 서브텍스트뿐만 아니라 그동안 느낌으로만 배우던 다양한 것들의 개념을 명확하게 해 주셨다. 흐리멍덩하던 초점을 선명하게 잡아주는 느낌이었다. 그 당시에 나는 날 것 그대로의 야생적인 연기와 틀이 꽉 짜인 연기에 대해서 많이 고민했다. 지금이야 이렇게 정리할 수 있지만 그때는 뭐가 고민인지도 몰랐다. 그냥 혼란스럽고 복잡했다. 선생님에 따라서 말이 다른 것 같기도 하고, 또 같은 선생님인데도 지난번과 오늘의 얘기가 다른 것 같기도 하고,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같은 느낌에 '뭐 어떻게 하라는 거야?'라는 불만이 쌓이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다 맞는 말씀이었다. 코걸이를 귀에 걸고, 귀걸이를 코에 걸고 있었으니. 선생님이 오시고 'ㄱ, ㄴ은 제대로 아니?'부터 시작하여 점점 틀이 생기고, 퍼즐이 맞춰지고, 톱니바퀴들이 제대로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했다.


내가 배운 '서브텍스트'는 이리 튀고, 저리 튈지 모르는 연기의 흐름을 하나의 줄기에 붙여주는 접착제다. 고민되던 날 것 그대로의 야생적인 연기는 상대역의 반응에 따라 리액션이 달라져야 한다. 그러다 보면 배가 산으로 갈 수 있다. 그런데 서브텍스트로 단단히 접착해 놓으면 배가 육지로 올라오려다가도 다시 바다로 돌아갈 수 있다. 그리고 꽉 짜인 연기 속에서도 어느 정도 자유롭게 배가 육지 근처까지는 오게 연기할 수 있다. 배가 산으로만 안 가면 되니까. 다시 바다로 가면 되니까. 그러면 생생하면서도 연기의 의도가 제대로 살아있게 극을 이끌어 갈 수 있다.

어떤 '사랑해'일까요?


예를 들어 도깨비의 '사랑해'라는 공유의 대사를 보면, 말은 ‘사랑해’인데 그 속에는 형식적인 '사랑해'로 정 떨어지게 하려는 목적이 있다. 어차피 무로 돌아가야 하니까... 미련을 두면 안 되니까... 그러면 서브텍스트로 미련을 두지 않겠다를 넣는다. 그럼 이 서브텍스트가 중심이 되어 연기자는 자유롭게 여러 가지 버전의 '사랑해' 대사를 할 수 있다. 아마도 공유 배우의 다양한 시도 중에서 저 장면이 선택되었을 것이다. 사람 정 떨어지게 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니까. 여러 버전 중 저것이 제일 정 떨어지는 버전이었을 것이다. 입으로만 가식적인 웃음을 지으며 진심을 숨기고 '사랑해'를 할 수도 있겠고... 아예 진짜 형식적으로 먼산을 바라보거나 귓밥을 파면서 말만 '사랑해' 할 수도 있겠고... 아예 상대배우 앞으로 얼굴을 들이대며 비아냥대듯이 '사랑해'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핵심적인 서브텍스트 하나로 무궁무진한 표현의 자유를 주는 것이다.


반대도 가능하다. 대사를 기준으로 서브텍스트 즉 연기의 의도를 바꾸게 되면 전혀 다른 상황이 될 수도 있다. '널 사랑하지 않아'라는 노래를 예로 들어보면 가사는 이렇다.

무슨 말을 할까. 어디서부터 어떻게. 고개만 떨구는 나, 그런 날 바라보는 너, 그 어색한 침묵. 널 사랑하지 않아. 너도 알고 있겠지만. 눈물 흘리는 너의 모습에도 내 마음 아프지가 않아. 널 사랑하지 않아. 다른 이유는 없어. 미안하다는 말도, 용서해 달란 말도, 하고 싶지 않아. 그냥 그게 전부야. 이게 내 진심인 거야. 널 사랑하지 않아.

원곡자들의 의도는 사랑이 식으면 자신 있게 얘기하고 떠날 수 있는 사랑을 노래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래서 뮤직비디오가 그런 거였나 보다. 그런데 나한테는 '널 사랑하지 않아'가 '나 아직도 널 진짜 사랑해'로 들렸다. 그렇게 서브텍스트를 잡고 다시 설정하면 이건 반어법 노래다. 다 반대로 들어야 한다. 앞의 도깨비 장면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더 애절해진다. 널 사랑하지만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사람의 이야기가 된다. 사랑하지 않는다고 크게 외칠수록 더 슬퍼진다.


완전히 다른 식의 서브텍스트 적용도 가능하다. as if~라고도 하고, magic if~라고도 하는데 극의 상황을 나의 상황으로 바꾸는 것이다. 내가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한 사건을 연기해야 할 때, 만약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슬퍼하는 장면이라고 하면, 이것을 우리 집 반려견이 죽었을 때의 감정으로 대체해서 연기를 하는 것이다. 고백에 실패하고 이불킥을 하는 장면이다. 그런 경험이 없고 상상이 안되면 내가 이불 킥했던 다른 사건으로 대체해서 연기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방법은 다양한 경험이 많아야 한다. 잘못 대체했을 때,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스마트폰 잃어버리고 나라 잃어버린 표현을 하는 식으로 과잉 혹은 그 반대가 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표현의 자유가 생기니까 연기의 세계가 갑자기 내 안에서 전 우주로 확장되는 느낌을 받았다. 대사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리고 서브텍스트를 3번, 4번 꼬아서 생각도 하게 되었다. 호흡에 대사를 실어 보내는 것이 1차원적인 연기라면, 그것만으로 해결되지 않았던, 내 안에서 복잡했던 의문들이 서브텍스트로 해결되었다. 이렇게 깨달을 즈음 학원에서 월말 테스트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쑥 발전한 모습에 학원 관계자분들이 좋게 봐주셔서, 오래 다니기도 했고, 1등을 했다. 학원비도 한 달 면제받고 나름의 결실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제는 이걸 표현하는 스킬을 훈련하는 일만 남았는데, 아쉽게도 여정은 여기서 끝났다. 안 좋은 상황은 겹쳐서 온다고, 나이가 40을 넘기면서 본캐와 부캐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가 왔고, 마음에 우울한 병이 찾아오면서 심적으로 육체적으로 버티기 힘든 시기가 찾아왔다. 가족문제도 생기고, 직장에서 은근히 티 나지 않게 괴롭히는 것도 한 몫했다. 그래서 본캐로 돌아가기로 선택했다. 아니 학원은 그만 다니고 독학을 하기로 했다. 결과적으로는 본캐로 돌아간 거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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