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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우나 고우나 같은 반

은근히 경쟁되고, 은근히 의지되는 친구들...

by 철없는박영감

가끔 같은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떠들게 된다. TV에서 ‘알쓸인잡’을 봤는데 끝없이 이어지는 대화에 밤새워 녹화를 하고도 출연한 패널 중에 한 명은 첫 기차가 몇 시인지 확인하는 모습을 봤다. 전북대 법의학과 이호 교수님이었던 것 같은데...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전주분이라서 더 반가웠다. 그렇게 오랫동안 녹화를 하고도 다 말 못 해서 다음 시간에 마저 하자며 1회가 끝났다. 남자들이 가장 이해 못 하는 여자들의 행동 중에 카페에서 4시간 동안 수다 떨다가 ‘못다 한 얘기는 집에 가서 전화로 계속해’하고 헤어지는 모습을 직관했다.


이렇게 관심사만 같아도 밤새워 대화를 할 수 있는데, 같은 꿈을 꾸고 있는 사람들이 모이면 어떨까? 기초반 얘기를 마무리하면서 오디션 프로그램 출연자들이 같은 꿈을 꾸는 친구들과 함께 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하는 장면을 언급했는데... 학원을 가게 되면 똑같다. 특히 아무것도 모르고 배우는 모든 것이 처음인 기초반 과정의 친구들은 가족 이상의 끈끈한 유대감이 생긴다. 아쉽게도 지금은 뿔뿔이 흩어져서 서로 사는 게 바쁘다는 핑계로 연락도 안되지만 지금이라도 당장 만나면 2박 3일 정도는 대화해야 회포가 풀리지 않을까? 5년간 학원을 다니면서 같이 수업을 들은 친구들을 생각해 보니 기초반, 심화반 통틀어 대략 30명 정도 되는 것 같다. 오랜 기간 같이 공부한 친구도 있고, 잠깐 스쳐간 친구도 있다. 하지만 한 명 한 명이 모두 같은 꿈을 품고 모였던 친구들이다. 그리고 한 명 한 명이 각자 다른 빛을 내는 별이었다. 번쩍하고 섬광처럼 빛나다가 금방 꺼지는 별도 있었고, 희미하지만 은은하게 길게 빛나는 별도 있었다. 따로 떨어져 캄캄한 우주 한복판에서 혼자 빛을 내는 별도 있었고, 은하수 속에 섞여서 조화로운 빛을 더하는 별도 있었다. 공전하듯 질서를 갖고 빛나는 별도 있었고, 불쑥 끼어드는 혜성처럼 빛나는 별도 있었다. 오늘은 각자의 별에서 각자의 빛을 냈던 그 친구들을 추억해보려 한다.


기초반 때 친구들은 가족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사람들이다. 첫 수업부터 각자의 드라마를 너무나 잘 썼기 때문에 그렇다. 가족을 비롯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생각과 감정들을 처음 입 밖으로 꺼냈다. 한 번 말로 하고 나니까 생각이 정리돼서 나중에 부모님께 기억이 나는지, 왜 그랬는지 물어보면, 그런 일이 있었냐면서 미안하다고는 하는데, 진짜 기억이 안나는 건지, 안나는 척을 하는지 건지, 혼자만의 공허한 메아리 같이 진심은 들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묻어뒀다. 한번 눈물지으며 말하고 나서 누군가 내 얘기에 귀 기울여 들어줬다고 생각하니까 별 것 아닌 것처럼 넘어가지더라. 기초반 때는 몰려다니면서 이것저것 많이 했다. '건축학개론' 같이 보러 갔던 얘기는 한 것 같고, 학원 MT에 가서 장기자랑으로 싸이 '젠틀맨'을 준비해서 단체로 시건방 춤을 추기도 했다. 빌려 준 돈을 떼여서 속상한 마음에 혼자 술 마시고 있는데 마침 학원친구들 카톡이 와서 상황을 설명하니까 한달음에 달려와줘서 내 자취방에서 다 같이 술 마시고 잔 적도 있고, 수업 끝나고 술 마시다가 만취해서 근처 찜질방에서 자기도 많이 잤다. 고등학생으로 돌아간 것 같은, 함께하면 뭐든지 재미있던 시기였다.


그러다가 한번 크게 싸운 적이 있었는데, 내용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데 카톡을 하다가 오해가 생겨서 '목소리도 듣기 싫어.'라고 막말까지 하면서 다시는 안 볼 것처럼 싸웠다. 나중에 오해가 풀린 뒤에, 내레이션 대본을 읽지 않고 얘기하듯이 하는 느낌을 깨우치기 위해, 직접 쓴 글을 대본으로 하는 시간이 있었다. 싸웠던 내용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전송버튼 말고 통화버튼을 누르세요.'라는 주제로 내레이션 대본을 같이 완성하기도 했다. 기초반에서 고등학생이었던 동생들이 한 명은 대학생이 돼서, 한 명은 극단에서 들어가서, 다 같이 학원 근처에서 만났다. 술 한잔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하고 또 보자 하면서 나중에 다시 약속을 잡았는데 내가 급한 일이 생겨서 펑크를 낸 뒤에, 이상하게 시간이 안 맞고 연락이 안 되고 하다가 이제는 연락처조차 없어졌다. 다들 뭐 하고 살고 있으려나, 내 필명을 지어준 사람들인데, 자존심들이 세서 먼저 연락은 안 할 건데... 나도 연락처가 없고... 고등학생 친구들은 이제 30대가 다 되었겠다. 갑자기 보고 싶어 진다.


기초반 때는 경쟁심이란 것은 조금도 없었고, 설사 못하더라도 우리끼리 서로 칭찬하며 우쭈쭈 해줬다. 아마 옆에서 선생님들이 많이 어이없으셨을 것이다. 기초반 선생님은 MBC 성우극회 배주영 성우님과 KBS 성우극회 김희선 성우님이었다. 공채시험 준비할 때 스튜디오에서 선생님의 어이없어 하시는 표정 얘기를 한 적이 있는데 두 분의 표정이 비슷했던 것으로 기억나는 것을 보니 우리끼리만 좋았던 것이 분명하다. 미운 4살들이 지들끼리 좋아서 히히덕 대는 모습이 가관이라서 한 대 쥐어박고 싶지 않으셨을까? 철딱서니 없던 때라서 좋은 기억만 가득하다.


심화반에서는 살짝 경쟁의식이 생긴다. 물론 개인적으로 만나면 다 좋은 친구들이지만, 이때부터는 앞서 나가는 친구, 조금 뒤떨어지는 친구가 눈에 보인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자존심에 상처를 줄 수 있기 때문에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조금은 조심해야 하는 그런 분위기다. 같은 지망생 위치이기 때문에 친하지만, 친해졌다고 함부로 조언했다가 '네가 뭔데'라며 뺨 맞을 수 있는 그런 관계다. 왜 중국영화 보면 사형제 간에 재능이나 사부님의 편애를 질투하다가 서로 죽고 죽일 정도로 극에 치닫지 않는가. 그런 관계라고 보면 된다. 간혹 연영과나 뮤지컬학과 친구들이 성우쪽으로 전향하기 위해, 혹은 성우 연기를 배우기 위해 학원에 등록하는 친구들이 있는데, 좀 겸손할 필요가 있다. 학원에 다니는 사람들, 즉 비전공자를 깔보는 경향이 있다. 그들의 진심이 아닐 수도 있고, 나의 자격지심일 수도 있지만, 말투에서 풍기는 분위기나 새어나오는 행동에서 분명히 느꼈다. 대부분이 성우 공채에 성공하지 못한다. 그리고 다른 학원을 다니다가 옮겨 온 경우도 마찬가지로 방어기재가 발동한 건지 거만한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있는데... 목소리도 훌륭하고, 얘기를 들어보면 공부도 오래한 것 같아서 일단 대우 해주지만, 수업시작하고 선생님께 대판 깨지고 나면 아마 본인도 우리앞에서 얼굴 들기 힘들었을거다. 그래도 다 이해한다. 잘하고 싶은 마음에서 생기는 부작용 같은 거니까.


그렇게 반에서 1등을 해야 하고, 또 학원에서 1등 해야 하고, 나아가 전국 성우지망생들 중에서 30위 권에 들어야 합격하는 것이다. 쓰고 보니 대학교 수능입시랑 비슷한 것 같다. 남자들은 그나마 조금 낫다. 뽑는 인원은 남녀가 같은데 남자는 지망생수가 여자 지망생수의 절반 정도밖에 안 된다. 그리고 여자 지망생들은 수준이 상향평준화 되어있고, 남자 지망생들은 잘하는 사람은 엄청 잘하고 못하는 사람은 엄청 못하는 것으로 양극화되어 있다. 그리고 여자 지망생들은 빨리 본인의 능력치를 알아서 안될 성싶으면 빠르게 방향을 트는데, 남자 지망생들은 '중꺾마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 정신으로 될 때까지 도전하는 장수생들이 많다. 그래서 심화반 수업에 단문이 아닌 대화하는 대본이 주어지면 자존심을 건 연기 대결이 펼쳐지기도 한다. 아... 이거 아주 재밌는 광경이다. 기싸움이 대단하다. 드라마나 연극 무대 보다 더 긴장감이 흐른다. 일단 라이브고 선생님들도 이런 상황은 어디까지 하는지 그냥 내버려 둔다. 그렇게 해봐야 실력이 느니까. 심해지면 애드리브가 난무하는데 이쯤 되면 '둘이 악수하고 화해해'로 웃으며 마무리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은 연기 잘하는 지망생들이 모여있을 때 그렇고, 실력차가 많이 나면 한쪽이 기에 눌려 연기를 포기하게 된다. 그러면 선생님도 같은 반 친구들도 김샌다. 어쩔 수 없다. 다음을 기약해야지... 그런데 계속 기가 눌리다 보면 결국은 접게 되더라. 앞에서 칭찬받으려고 이것저것 하다가 도리어 욕먹은 에피소드 기억나는가? 그게 다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래서 연기 잘하는 친구 중에 짜증을 내는 친구들이 간혹 있다. 더 심한 친구들은 '저 제대로 연기하고 싶은데, 제대로 빡치게 만들어 주실 분 있나요?' 이렇게 요청하는 친구들도 있다. 굉장히 무례한 것이다. 연기는 '나를 어떻게 하게 만들어 주세요'가 아닌데 저 정도면 변태 수준이다. 앞에서 연기는 같이 한 방향으로 가는 것이라고 얘기했으니 이해하실 거라 믿는다. 성우지망생들은 기도 세고 끼도 많은 친구들이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간다. 언젠가는 그 친구들도 깨닫는 날이 올 거다.


이 '끼' 때문에 성우의 꿈이 포기가 안된다는 친구들도 많다. 중간에 포기하고 그만뒀다가도 끼를 주체를 못 해서 컴백하는 친구들이 있다. 이런 경우가 가장 안 좋게 들락날락하는 경우다. 학원비가 모자라서 아르바이트로 학원비 벌고 다시 등록하는 것은 시간낭비, 돈낭비라고 앞에서 얘기했다. 그래서 계획을 잘 세워서 한 번에 집중해서 준비하는 것이 좋다고도 얘기했다. 그런데 꿈이 포기가 안 돼서 그만뒀다가 다시 컴백하는 친구들은 전과 같은 이유로 많이 그만둔다. 헤어진 연인이 다시 만났다가 같은 이유로 또 헤어지는 것과 같달까. 본인이 좌절했던 이유를 망각하고 꿈을 포기 못하겠다고 다시 도전했다가 같은 이유로 좌절하고 접는다. 진정한 시간, 돈 낭비다.


학원을 오래 다니다 보니 꿈을 접어야 하는 친구들을 많이 보게 된다. 가장 안타까운 경우가 너무 열심히 연습해서 목에 무리가 오는 친구들이다. 쉬어가면서 해야 하는데 빨리 꿈을 이루고 싶은 간절함에 무리해서 연습을 하다 보니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돼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자기 몸 안 돌보고 연습하는 친구들도 그렇다. 안 먹고 안 자고 연습만 하는 연습벌레들이 있다. 꼭 목이 아니더라도 다른 데로 탈 나는 경우가 많다. 이러면 성우가 돼서도 오래 못할 수도 있다. 연기하는 사람은 몸이 제일 중요하기 때문에 꼭 몸 챙겨야 한다. 쉴 때는 쉬고, 먹는 것도 잘 먹고, 운동도 열심히 해야 한다.


꿈을 좋은 방향으로 튼 친구들도 있다. 나랑 동갑내기 친구인데 낭독봉사를 열심히 한다. 그래서 지금은 점자도서관에서 행사가 있으면 사회자로 진행도 하고, 소개자료에 내레이션도 한다. 물론 봉사로 하는 거지만 저런 경험을 어디서 해보겠는가? 일부러 책 한 권을 소리 내서 완독 하는 연습도 하는데 봉사까지 하면 일석 몇조인가? 그리고 저런 이력은 공채시험 지원서에 쓸 수 있는 것들이다. 의식 있는 PD 님들은 낭독봉사 경험 없는 지망생들은 우선 거른다는 분도 있다. 멋지게 재능기부를 하는 친구에게 박수를 보낸다. 낭독봉사로 책 한 권이라도 완독 하면 공채시험 이력서에 쓸 수 있다. 가능하다면 낭독봉사는 하는 것이 좋다. 아니 필수라고까지 말하고 싶다. 나는 왜 안 했느냐... 할 말이 없다. 한다고 폼만 잡다가 결국 중간에 그만뒀다. 지금은 미안해서 더 못 간다. 책 한 권 완독이 그만큼 어렵다. 그러니 이력서에 충분히 쓸만하다. 요즘 뜨는 성우님 중에 '쓰복만' 성우님이 낭독봉사로 실력을 키웠다고 '유퀴즈'에서 인터뷰하시는 영상을 봤다. 낭독봉사는 좋은 것이다. 성우지망생이라면 꼭 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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