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 더빙 연기
애니메이션 덕후분들이 제일 기대하셨을지도 모르는 더빙 수업시간이다. 예전에는 외화와 애니메이션이 성우 더빙연기의 양대산맥을 이루고 있었지만 외화 더빙이 사라진 지금 애니메이션이 더빙연기의 주활동무대이다. 애니메이션은 일본애니메이션이나 디즈니, 픽사의 애니메이션 같이 이미 완성된 영화에 한국어 더빙을 하는 연기와 뽀로로나 우리 조카가 좋아하는 미니특공대 같이 자체제작된 애니메이션에 영화처럼 성우가 직접 캐릭터를 연구해서 더빙하는 연기가 있다. 전자는 이미 목소리가 한번 입혀진 상태라서 한국어로 번역된 대사를 입모양에 맞춰 덮어쓰는 것이고, 후자는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고 보면 되겠다. 그래서 두 분야의 페이 차이가 크다. 정확하게는 안돼봐서 모르겠다. 사실 듣기는 했는데 밝힐 수 없다. 어쨌든 일본애니메이션 덕후들이 직접 성우가 돼서 캐릭터 연기를 하고 싶어서 학원에 오는 경우가 가장 많은 성우지원동기 중에 하나이다. 아쉽게도 이런 동기로 성우지망생이 된 친구들은 내가 본바로는 거의 중간에 포기하고 접는다. 성우의 활동 무대가 다양해서 애니메이션 더빙 수업이 어쩌다 한 번이다보니 덕후들은 단문연기와 드라마연기 그리고 지루한 신체훈련이 견디기 힘든 것 같다. 덕후 지망생들은 대부분 내레이션 대본에서 많이 좌절한다.
어쨌든 성우공부를 하다 보면 더빙연기를 할 기회가 가끔 있다. 대부분의 영상이 저작권에 묶여있기 때문에 성우선생님이 직접 출연하시는 애니메이션의 시사용 화면과 대본으로 수업을 진행하는 경우가 99%이다. 이것은 본인 강의반 학원생 소수만을 대상으로 수업에서만 사용하고 바로 폐기해 버리므로 외부유출 없이 진행한다. 그야말로 연습용이다. 나는 운 좋게도, 번역작가를 양성하는 학원과 우리 학원이 콜라보를 하게 되어서, 작가지망생들이 번역한 대본으로 더빙연기를 할 기회가 두 번 있었다. 처음은 포켓몬스터였던 것 같다. 기초반 마지막 즈음에 했었는데, 당시 우리 반 인원이 모자라서 지원사격으로 한분이 오셨다. 차원이 다르게 잘한다 생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당해연도 바로 성우시험합격했다. 누군지는 안 가르쳐주지~! 벌써 10년 차 베테랑 성우님이 됐겠네… 두 번째는 심화반에서 3년 차 정도 됐을 때인가 보다. 각 반에서 잘하는 사람들을 모아서 역시나 작가지망생들과 콜라보를 했다. 이전에 몇 번 정도 같은 반을 전부 참여시켜 콜라보를 했더니 실력차가 많이 나서 작가지망생, 성우지망생 양쪽 다 도움이 안 됐다고 한다. 그래서 이번에는 지원을 받아서 그중에서 몇 명을 선출하는 방식으로 바꿨다. 나도 지원했고 운 좋게 한편에 주인공으로 캐스팅 됐다.
더빙은 화면을 보면서 캐릭터에 숨을 불어넣는 작업이다. 그래서 캐릭터가 움직이는 대로, 표정 짓는 대로 맞춰서 캐릭터가 말하는 것처럼 연기해야 한다. 그래서 화면에도 시간이 보이고, 대본에도 시간이 체크되어 있다. 그런데 시간은 참고용이다. 주인공 같이 대사가 많은 캐릭터가 시간마다 딱딱 맞춰서 대사를 치는 것은 불가능하고, 특히 상대역이 있어서 티키타카가 있는 대사라면 절대 불가능이다. 그래서 실제로는 화면을 보면서 캐릭터 입이 움직이거나 원어로 소리가 들리면 그다음에 대사를 시작한다. 그리고 끝날 때는 시작 때 딜레이 된 만큼 늦게 끝낸다. 돌림노래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그렇게 녹음된 대사를 엔지니어분들이 시간에 맞게 편집을 해서 맞추면 완성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성우지망생들이 가장 많이 하는 실수가 늦게 시작해서 제때 끝내는 거다. 즉 화면 속 캐릭터는 입이 움직이고 있는데 대사를 끝내버리는 실수를 가장 많이 한다. 같이 수업했던 엔지니어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더빙의 신 같은 성우님이 있는데, 요즘 슬램덩크 송태섭으로 한참 인기몰이 중이신 엄상현 성우님이 그렇다고 한다. 그분은 대사 시작과 종료가 화면과 딱 들어맞고 입모양과 대사까지 거의 완벽에 가깝게 들어맞는다고 한다. 엔지니어들은 천재라고까지 했다. 다른 성우님들은 대사 사이에 조금씩 편집이 필요한데 엄상현 성우님은 처음 화면과 녹음대사 사이의 딜레이만 조정하면 그 뒤는 전부 딱 들어맞고 연기까지 기가 막히게 맞는다고 한다. 정말 대단한 능력이다. 보통 CV라고 표시되는데 캐릭터 보이스의 약자이다.
이런 콜라보가 지금도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수업시간 중에 연습용으로 연기할 때는 화면을 보면서 더빙을 하는 모습을 선생님들이 직관을 하시면서 녹음을 한다. 그래서 엔지니어들이 편집을 해주거나 영상을 남기지는 못한다. 같이 확인하고 그 자리에서 바로 지운다. 이런 수업시간에는 덕후 성우지망생들은 신이 날 때도 있고, 축 쳐져있을 때도 있다. 무슨 말이냐면, 본인이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을 하면 신이 나고, 잘 안 맞는 애니메이션을 할 때는 의욕이 다소 떨어진다. 진정한 덕후필이다. 딱 보인다. 좋아하는 것과 억지로 하는 것이... 기초반 때, 선생님이 당시 성우공채에서 사용된 더빙 화면과 대본 자료를 갖고 있어서 실습을 했는데 다들 처음인 데다가 발음도 잘 안될 때라서 연기는 고사하고 입 맞추기도 힘들 때였다. 그래도 다들 열심히는 했다. 내 차례에 피노키오 같은 내용인지, 나무인형을 만든 할아버지가 하는 대사였다. 화면을 보면서 대사를 하다 보니 할아버지가 앉았다가 일어나는 장면에서 나도 모르게 끙차하는 호흡이 들어갔다. 아하 공부시작한 지 두 달도 안된 사람이 이런 호흡 못 넣는다. 물론 칭찬받았다. 남자들은 더빙연기를 하다 보면 남자주인공이 열혈 캐릭터인 경우가 많다. 나는 열혈 성격은 죽어도 안된다. 열혈이라고 연기하고 나면 바보 같다고 한다. 성우지망생 접을 때까지 괴롭혔던 캐릭터 성격인데 끝끝내 못해냈다. 이상하게 소리만 냅다 지르게 되고 목을 긁게 돼서 재미도 없고 이해도 안 된다. 흑흑
더빙 연기는 일본애니메이션과 디즈니, 픽사 같은 3D애니메이션이 좀 차이가 난다. 일본애니메이션은 우선 캐릭터가 표정이 없이 입만 움직이는 경우가 많고, 표정이 있더라도 변화가 거의 없다. 그래서 연기를 진짜 잘해야 한다. 너무 오버해서도, 너무 심심해서도 안 된다. 그리고 생생하게 해야 한다. 정말 어렵다. 3D 애니메이션은 Acting도 많고 표정도 다양하게 변하는데 그 연기를 따라가기 버겁다. 말도 빠르다. 개인적으로는 일본애니메이션이 조금 더 쉽고 재밌다. 상상력도 어느 정도 넣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