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우주가 열리다.
목요일부터 몸상태가 조금씩 안 좋아지더니 금요일부터는 열이 펄펄 끓는다. 그동안 식단대로 잘 챙겨 먹고, 제철 과일 빼고는 항상 똑같이 식사하면서 건강하게 지냈는데, 요즘 물가가 계속 오르고, 특히 가스비, 전기세, 보험료 같은 고정비가 계속 오르니, 식비를 조금이라도 줄여보겠다는 생각에 낯선 상표의 기획상품 우유를 샀다. 아무래도 이것이 단단히 탈이 난 것 같다. 열나고, 토하고, 설사하고... 결국 병원에 가서 주사 맞고 약타오고 지금까지 끙끙 앓고 있다. 열나서 두통으로 어지럽고, 못 먹어서 기운은 없고, 감각만 예민해져서 옆집에서 풍겨오는 음식냄새도 역겹고, 아랫집에서 하수구 냄새가 올라오는 것 같고, 자고 있는 침구도 꿉꿉하고 퀴퀴한 냄새가 나는 것 같다. 오늘따라 밖은 왜 이렇게 소란스러운지 소주 신제품 판촉행사를 한다며 확성기를 단 트럭이 아파트 주변을 5번째 돌고 있다. 월급쟁이라는 규칙적이고 정형화된 생활을 하다가 성우 공부라는 우유를 먹고 나서 이렇게 탈 나듯이 뭔가 몸상태와 생각들이 변하고 이상이 오기 시작했다. 오늘은 그 얘기를 해볼까 한다. 최초 기획은 단순히 성우 공부를 하면서 드라마가 재미없어지고, 책 읽는 속도가 늦어지고, 감각이 예민해진다 등등 좋아진 점과 나빠진 점에 관한 에피소드를 써볼 생각이었는데, 조금 더 진솔한 얘기를 써보라는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했는지, 약 먹고 힘들게 누워있는 동안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의 우울증에 관한, 극단적인 선택을 할 뻔한 이야기를 쓸 마음을 먹었다.
앞에서 성우가 꿈이 되면서 회사 생활이나 주변 인간관계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고 했다. 일단 지방으로 발령을 받고 약 3년 만에 다시 내려간 공장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간단히 요약해서, 더 이상 나에게 호의적인 사람만 있지 않았다. 내가 없는 동안 새로 들어온 사원들이 나를 굴러들어 온 돌 취급을 했고, 당시 팀장들도 공장장의 배려로 평가를 좋게 받자 안 좋은 시선으로 보기 시작했다. 물론 그들에게 아첨을 하면서 좋은 시선으로 바꿀 수 있었겠지만, 더 이상 남을 위해 나를 버리지 않기로 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내가 갈 길을 꿋꿋이 걸어가고자 했다. 그리고 인간 관계도 더 이상 모래주머니 같은 가족, 친구, 주변인들을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들은 내가 아니어도 다른 사람의 다리에 붙어서 모래주머니의 역할을 계속해 나갈 것이 뻔했다. 그렇게 몇 년을 지내니 호의적인 아군과 반감을 가진 적군이 확실하게 구분이 되었다. 사회생활의 기본이 ‘내 편은 못 만들어도 적은 절대 만들지 마라’라는 말이 철칙같이 받아들여지던 때이다. 결과적으로 적군들은 모두 회사를 떠나거나 다른 곳으로 갔고, 친구와 주변인들도 정리가 되었다. 나중에는 결국 나도 나오게 되었지만... 그렇게 내 위치 때문에 붙어있거나, 내 배경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아닌 오롯이 나라는 사람 자체를 걱정해 주는 사람들만 남기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 보면 그렇게 생각했던 이들 중에도 결국 몇몇은 적군이 되더라.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부모도 나에게 아무 바람 없이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는 게 아니었는데, 정으로 이어진 사람들에게 그런 사랑을 요구할 수는 없다. 나도 똑같을 건데... 철이 들었다고 해야 할까? 인생의 쓴 맛을 봤다고 해야 할까? '살다 보면 적이 안 생길 수 없으니, 되도록 피하라'가 나에게 맞는 철칙이 되었다. 그렇게 나에게 새로운 우주가 열렸다. 나 혼자 살아가야 하는 새우주. 이것이 독불장군이라거나 허무주의자가 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인생에서 믿을 수 있는 것은 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옆에 친한 누군가가 배신했다고 슬퍼할 필요도 없고, 그럴만한 사정이 있겠지라고 이해해야 한다. 다만 아군이라는 생각이 들면 그들이 배신해야 할 상황이 안되게 내가 노력해서 관계를 유지해야 할 뿐이다. 나도 그들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줄 수 없지 않은가? 그러니 '그럴 수 있어. 그러라 그래. 하지만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라는 생각이 지금까지의 최종 결론이다.
이렇게 생각이 정리되기까지 방황의 시기에 우울증이 찾아왔다. 누군가는 바보 같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때는 이런 작은 사건에도 쉽게 무너질 수 있을 정도로 힘들었다. 시궁창 같은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 같은 성우의 꿈이 어느 정도 가시권에 들어왔다고 생각되던 때이다. 눈물 스위치도 장착했고, 감정의 서랍도 가득가득 채워놨다. 연기에 대한 생각도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서 이제는 내일 KBS 시험만 잘 치면 된다는 희망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앞에서 사는 곳이 전주이지만 본가가 의정부여서 지방에서 서울로 학원을 다니는 성우지망생으로는 괜찮은 일정이었는데, 나중에 엄청난 재난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 기억할지 모르겠다. 그랬다. 매주 지방에서 회사생활하는 아들이 의정부 부모님 집에서 자고 가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부모님은 아들이 매주 집에 오니 둘의 감정 쓰레기통으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서로에게 쌓인 감정으로 말 안 하고 지내다가 내가 오는 토요일에 모두 나에게 쏟아냈다. 그동안은 내가 중재를 하거나, 내 핑계로 일주일 만에 대화도 아니지만 겨우 말을 붙이는 식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내일은 KBS 시험을 보는 날이고, 둘 사이의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고,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누가 툭 건드려도 눈물을 와락 쏟을 수 있게 감정을 예민하게 해 놓고 그걸 잘 추슬러서 내일 시험에서 최선을 다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내일 시험임을 알리고 먼저 자러 들어갔는데... 늘 해소되던 감정쓰레기가 처리되지 않자 결국 폭발하게 되었다. 술을 마시고는 큰 욕설을 하며 대판 싸우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감정싸움에 휩쓸리지 않고, 나를 챙기기 위해 노력하고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하지만 술기운에 서로에게 상처 주는 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고 있는 부모님의 이성을 잃어버린 행태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아무리 귀를 닫아도, 아무리 신경을 꺼도, 방안에 숨어버린 나에게 일부러 들리게 하려는 듯했다. 그래서 본인들의 감정쓰레기를 어떻게든 해소하려는 듯 이기적으로 느껴졌다. 결국 나도 폭발해서 내가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되냐고 하소연을 하면서 시험을 위해 아껴두었던 감정을 모조리 발산하고 말았다. 그리고 다음날 의절까지 생각하며 다시는 안 보겠다는 다짐을 하고 새벽에 전주로 내려왔다. 물론 시험은 안 봤다. 그때는 회사에서도 연차가 쌓이고, 계속 안 좋게 보던 상사들 때문에 진급도 여러 번 누락되면서 본캐와 부캐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이번이 마지막 도전이라고 생각하며 열심히 준비했는데,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그냥 주저앉게 되었다. 주말 동안 이제는 이 세상에 '나 혼자'라는 생각에 엄청 울었다. 고아가 된 것 같은 막막함으로 눈물이 마를 때까지 울었다. 그렇게 월요일 아침 눈을 떴는데 유난히 창밖으로 햇살이 밝게 비쳤다. 이상의 소설 '날개'처럼 햇살 비치는 창밖으로 나가면 편할 것 같았다. 행복할 것 같았다. 그냥 여기서 끝내는 것이... 순간적으로... '어! 이게 무슨 이상한 생각이지?'라고 바로 정신을 차렸는데 이런 생각이 거의 매일 아침, 특히 햇살이 밝게 비추는 날에 심해졌다. 어쩔 수 없이 병원을 찾았다. 약을 처방받았지만 워낙에 잠을 못 자서 약도 그다지 소용없었다. 약을 먹으면 도리어 이상한 환상에 사로잡혔다. 약간 마약성분의 약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래서 약도 끊고 술을 많이 마셨다. 학원은 계속 다니는 것이 다 소용없는 짓 같았고, 경기도 근처도 가기 싫었기 때문에 전주에서 혼자 독학을 하자는 생각으로 그만 다니게 되었다. 가족들과는 거의 4년 정도 연락 안 했다. 코로나가 좋은 핑곗거리가 되어주었다. 이렇게 나 혼자 살아가야 하는 우울한 새우주가 열렸다. '정신 차리자'를 속으로 수없이 외치며...
그렇게 성우공부는 더 진척시키지 않고 공채시험공고가 나오면 매년 응시만 하면서, 본캐에 점점 더 충실하게 되었다. 이때는 거의 매일같이 술만 마셨던 것 같다. 그렇게 술을 마셔대니 술친구들이 늘면서 회사에서 인간관계가 좋아지고 평판이 좋아졌다. 그래서 진급도 하고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이번에는 건강이 문제였다. 술로 살이 쪄서 100KG에 육박하고 있었고, 고지혈증과 지방간으로 나날이 건강이 안 좋아졌다. 독감백신을 맞고 폐렴까지 간 적도 있었다. 그래서 코로나 백신 접종이 겁나기는 했지만, 맞아야 출근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맞게 되었다. 1차 접종 후에 심장이 두근거리고 몸이 안 좋아져서 병원을 찾아서 심장초음파검사까지 했으나 이상 소견이 없어서 2차 접종도 해야 한다고 했다.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지만 병원 소견을 믿고 계속 일하면서 2차 접종을 하게 되었다. 이때, 또 몸 상태가 더 안 좋아졌다. 이번에는 간수치가 이상하다고 했다. 정상이 40인데 444가 나왔다. 병원에서는 당장 입원하라고 했는데, 당시에는 입원이 더 무서웠다. 코로나가 병원에서 더 잘 전파된다고 연일 뉴스에서 떠들었다. 그렇게 아픈 몸을 이끌고 계속 일을 했다. 아픈 몸이기에 정시퇴근을 하고 있었는데, 주변의 팀원들이 하나, 둘 병에 걸렸다고 자가격리로 회사를 안 나오게 되면서 일이 더 늘어났다. 그렇게 힘들게 생활하면서 나도 힘들기에 특별한 일이 없으면 계속 정시에 퇴근을 하고 있었는데, 격리를 마치고 온 팀장이 정시퇴근하면서 회사 다닐 거면 다른 팀으로 가라고 했다. 더 이상 여기에 있는 것도 무의미한 것 같았다. 진짜 혼자가 되는 또 다른 새우주에 가야 할 것 같았다. 아니 이번엔 블랙홀일 것 같았다. 그때 생각난 것이 가족이다. 그래도 힘들 때는 미우나 고우나 가족 생각이 먼저 나더라. 그래서 오랜만에 엄마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회사를 그만둬야 할 것 같다고 했다. 그래도 제일 마지막 내 편은 가족이었다. 그래서 사직서를 내고 다시 가족이 있는, 원래 우주로 돌아갈 수는 없는, 새로운 우주가 열렸다. 그 뒤로는 건강회복에 집중을 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살도 빠지고 건강도 되찾으면서 이렇게 성우지망생 기억을 글로 쓰고 있다. 우울증은 퇴사하고 혼자 자유롭게 살면서 옅어지기 시작해서 글을 쓰면서 쓱 사라졌다. 그리고 앞에서 얘기한 '그럴 수 있어. 그러라 그래. 하지만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라는 결론까지 도달했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얘기지만 성우라는 길이 바늘구멍이고, 장시간을 준비해야 하다 보니 나 같은 좌절을 겪는 분도 많을 것이고, 꿈에 올인했던 분이라면 앞날이 막막할 것이다. 그래서 지금 지망생 생활을 하고 있거나, 하고자 하는 분들이 있다면 반드시 장기전을 생각하고 시작하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비록 지금은 직장도 없고, 경제적 자유도 없고, 건강하지도 않지만 44년을 살아온 내 인생 중에 최고로 행복한 날들을 보내고 있다. 돈 좀 없으면 어때? 아껴 쓰고 살면 되지. 인생길의 유턴 지점에 와보니 어릴 때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많이 들었던 충고와 명언들이 무슨 얘기를 하려고 했는지 알 것 같다. 내가 바라는 '나'와 현재의 '나'가 일치하는 것만큼 행복한 상태는 없다. 겨우 현재의 '나'를 그곳으로 옮기는 중인데도 이렇게 행복한데… 성공하고 부자가 되어야 행복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유턴하고 나서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