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들을 수 있는 이야기인데...
처음 만나는 사람이나, 알고 지내던 사람인데도 내가 성우학원을 다니고 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으면 나타내는 주된 반응이 몇 가지 있다. 독자분들도 만약 옆사람이 성우공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아래 반응 중에 하나이지 않을까 싶다. 내 기준으로 순위를 매기자면...
1위, "나도 어디 가서 목소리 좋다는 얘기 많이 들었는데..."
가장 많은 반응이다. 주임, 대리 시절의 공부를 시작했을 때, 사무실에서 100% 비밀보장도 어렵고, 점심시간에 발성연습한다고 따로 다니면서 주변 선배, 과장급들이 내 앞에서 갑자기 헛기침하면서 자기도 소싯적에 목소리 좋다는 얘기 많이 들었다는 썰을 풀기 시작한다. 들어보면 연예시절에 와이프와 전화통화할 때 목소리 좋다고 했다는 얘기들이 대부분이다. 그게 목소리가 좋아서였을까? '내 귀에 캔디'같은 사탕발림에 취한 거지... 1위 반응의 사람들 대부분이 비염환자들이다. 코맹맹이 소리랑 공명소리를 구분 못하고 코가 막혀서 본인 귀와 입안에서 소리가 울리는 것처럼 들리니까 본인의 목소리가 좋다고 착각한다. 이런 사람들은 발음도 느끼하다. 연예인 지석진을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그래서 대부분 주변 지인들 중 선배들의 반응이 이렇다 후배들은 맞먹는 애들이나 이런 반응을 할까? '내가 안 해서 그렇지 마음먹고 하면 너보다 낫지!'라는 서브텍스트가 깔려있는 게 눈에 보인다.
2위, "그러고 보니 목소리가 좋으시네요."
'그러고 보니'라는 반응이 포인트이다. 이 반응은 술자리에서 친구의 지인을 소개받았을 때나 후배들이 많이 보이는 반응이다. 어색한 사이에서 성우공부를 한다고 하면 그때서야 목소리에 집중한다. 대부분 성우지망생 초보시절의 반응이다. 이런 집중 없이 처음 인사하자마자 '목소리 좋으시네요' 반응이 나와야 하는데... 아직 수련이 부족하다는 소리다. 첫인상이 목소리에서 많이 결정된다고 하니 중요한 매력어필 포인트이기도 하다. 어느 정도 실력이 늘면 여기저기서 갑자기 목소리 좋다는 소리를 듣게 된다. 목소리가 크고 작고를 떠나서, 좋은 목소리는 듣는 사람들이 얼마나 잘 알아듣고 친절하게 들리느냐에 달렸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좋은 목소리는 발음과 톤이 제일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래서 간혹 공부하다가 녹음본을 가족에게 들려주면 부모님도 못 알아듣는다. 평소에 말버릇이 하나도 안 나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발성보다는 발음과 톤이 목소리가 좋게 들리는데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3위, "성우? 뉴스 아나운서가 되는 건가?"
주위 어른들의 반응이 대부분 이렇다. 아마도 부모님이 안부를 전하다가 '자식들은 뭐 하고 지내는지'가 화제가 되면 성우공부한다고 하기보다, 조금 있어 보이는 아나운서로 많이 이야기하는 것 같다. 과거 뉴스에서 성우님들이 헤드라인을 방송했으니 전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여기서 다시 부모님들의 성우의 꿈에 대한 무지와 반발심이 얼마나 큰 지 알 수 있다. 자식이 성우 한다고 학원 다닌다고 하면 떳떳하게 말하지 못하는 것 같다. 대신 아나운서 되려고 학원 다닌다고 하면 그나마 조금 내세울 만 한가보다.
4위, 연기자가 되고 싶다고? (연기자가 꿈이라고?)
제일 적은 반응이다. 이 뒤로 5위는 '아, 그러세요?' 정도라서 그나마 반응이 있는 멘트를 기억해내다 보니 이런 반응도 몇 번 봤다. 나이 지긋하신 분들이 보통 이런 반응인데 아무래도 라디오 드라마 세대여서 그런 것 같다. 아니면 전혀 안그렇게 생긴 애가 한다고 해서 놀란 것일 수도…
1~4위 반응을 얻고 있다면 수련이 더 필요하다. 이를 넘어서는 0순위 반응이 나와야 어디 가서 '아~ 성우공부 좀 했구나'라고 말할 수 있다. 잠깐 얘기했지만 그냥 첫인사를 하자마자 '목소리 좋으시네요' 소리가 저절로 나와야 한다. 기초반 첫 시간에 성우 선생님이 책 읽어주시는 목소리에 따로 약력소개가 필요하지 않았다고 했었다. 그렇다 성우님들은 명함을 주거나, 소개를 하거나 하지 않는다. 그냥 인사 목소리에서 성우 포스가 좔좔 흘러넘친다. 따라서 0순위 반응이 아니라면 수련을 더 열심히 해야 한다. 3~4년 성우지망생으로 공부를 하면서 발음, 발성, 호흡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며 옹골찬 소리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0순위 반응이 슬슬 나오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통화하는 사람들은 '여보세요'하고 전화를 받으면, 순간 정적이 흐르다가 조심히 '여보세요? OOO 씨 전화 맞죠?'라고 하기 시작했다. 특히 선후배들이 오랜만에 좋은 소식 알린다고 전화를 하면 목소리가 왜 그렇냐며 '미리 알았으면 사회 좀 부탁할 걸'이라는 얘기를 많이 했다. 물건을 사러 가서도 계산을 하고 영수증을 받을 때 목소리가 너무 좋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갑자기 내 자랑 성토글 같아서 민망하지만 공장에서도 아침에 체조 행사를 갖는데 사장이 바뀌면서 구호를 외치게 지침이 내려왔다. 내가 마이크 방송으로 선창을 하고 나머지 사람들이 따라 하는데... 원래 직원들이 순서대로 돌아가면서 했는데, 내가 한 번 방송한 이후로는 도맡아 했다. 그 뒤로도 사내 방송이나 작은 녹음은 모두 나에게 제의가 들어왔다. 몇 년 만에 연락이 온 군대 선임은 목소리가 나 같지 않아서 자꾸 존댓말 하게 된다고도 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목소리 좋다는 말은 누구나 들을 수 있다. 발음 정확히 '솔'톤으로 친절하게 말하면 말이다. 그런데 성우지망생이라면 목소리에 포스가 느껴져야 한다. 발성을 잘해서 목소리만으로 분위기를 휘어잡을 수 있는 카리스마가 뿜어져 나와야 한다. 특히 부드럽지만 강한 목소리. 외유내강형 목소리가 나올 수 있어야 한다. 친절하고 나긋나긋하지만 심지가 꽉 찬 옹골진 목소리. 기본이다. 잊지 말자. 나도 성우학원 5년 중 4년 차 이후에나 들었던 것 같다. 성우학원 심화반의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더 많은 에피소드가 있지만 성우 연기를 발전시키기 위해 고민하고 노력했던 것들 위주로 추렸다. 추가 에피소드와 뒷 이야기들을 가지고 다른편으로 돌아오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