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눈물 스위치를 장착하다

우는 연기를 잘해야 연기 잘한다는 소리 듣지...

by 철없는박영감

10년 전의 이야기를 하다 보니, 예로 들게 되는 영화나 드라마가 전부 옛날 것들이다. 요즘 감성에 안 맞을 수도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연기하는 사람은 '나'이니까 내 기준에서 나에게 영향을 준 것들을 소개한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메서드 연기'까지는 아니지만, 이 연기법의 기본이 된 '스타니슬랍스키 시스템'에는 어느 정도 맞을 것이다.


메서드 연기 : 배우가 극 중 배역에 몰입해 그 인물 자체가 되어 연기하는 방법. 메서드 연기는 연기자와 극 중 인물을 일치시키는 기법으로 연기자가 정신과 육체 등 모든 면에서 드라마 속의 인물에 이입되어 연기하는 것을 말한다. 1930년대 이전의 ‘고전 연기’는 장르마다 정해진 호흡이나 발성, 동작패턴 등을 잘 소화하는 것을 중시했으나 사실주의가 연극ㆍ영화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어 연기법에서도 극사실주의 기법이 등장한 결과가 바로 메서드 연기법이다. 콘스탄틴 스타니슬라프스키는 진실하면서도 살아있는 연기의 개념을 주장하였고 미국의 리 스트라스버그는 이를 더 발전시켜 메서드 연기이론을 정립하였다. 리 스트라스버그는 엘리야 카잔과 함께 액터즈 스튜디오라는 학교를 만들어 뛰어난 배우들을 다수 배출하였다. 제임스 딘, 말론 브란도, 알 파치노, 로버트 드 니로, 스티브 맥퀸, 더스틴 호프만, 폴 뉴먼, 잭 니콜슨 등이 이 학교 출신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메서드 연기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스타니슬랍스키 시스템 : 러시아 연출가이자 배우인 콘스탄틴 스타니슬랍스키(Konstantin Sergeevich Stanislavskii, 1863~1938)의 근대 배우기술. 콘스탄틴 스타니슬랍스키(1863∼1938)는 무대에서 나타나는 극 중 배역의 심리와 행동은 극에서 드러나지 않는 과거나 감춰진 의도까지 표현해야 하기 때문에 배우가 직감ㆍ상상력ㆍ체험 등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동원하여 배역과 동일화하여 내면 연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틀에 박힌 신파조의 연기를 거부하고, 진실로 배역과 동일하여 살아가는 심리체험의 예술을 주장하며, 배우의 내적ㆍ외적인 능력을 유기적으로 발전시켜 나가며 잠재적인 창조과정을 의식적으로 포착하는 실천적인 지침을 제시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스타니슬랍스키시스템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내가 이해하기로 '메서드 연기'는 배역과 내가 하나가 되라는 것이다. 그래서 실제로 많은 배우들이 작품이 끝나고 상대역과 진짜 사랑에 빠지거나, 우울증 연기 후 진짜 정신과 진료를 받기도 한다. 그리고 배역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장기간 활동을 쉬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스타니슬랍스키 시스템'은 배우의 경험을 바탕으로 연기를 하라는 것으로 연기를 잘하려면 경험을 많이 하라는 말이다. 그래서 연기를 하는 사람이라면 다양한 방법으로 감정을 수집해야 한다. 수업시간에 '감정서랍'이라고 비유하는데, 직접경험, 간접경험을 통해 수집한 감정을 서랍에 넣어놨다가 연기에 필요할 때 꺼내서 쓰라는 비유이다. 그래서 기초반 때 원장님이 성우는 트렌드에 민감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 같다. 그래서 나도 책도 많이 읽고, 드라마, 영화도 많이 보고, 음악감상, 미술전시회와 공연도 많이 다녔다. 내가 나름대로 순위를 정하자면 가장 효과 좋고 오래가는 방법은 역시 독서(소설)이고, 다음으로 전시회와 공연관람이다. 드라마와 영화가 꼴찌이기는 하지만 조금 단순하고 금방 사라지는 단점이 있다는 말이지 나쁜 방법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리고 1, 2위 방법보다 비교적 빠르고 쉽게 수집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물론 나에게만 그런 것일 수도 있다. 나는 영화, 드라마에서 수집한 감정을 한번 써먹으면 다음에는 감정의 강도가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영화 많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임에는 틀림없다. 음악감상은 마음을 촉촉하게 유지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특히 영화음악과 피아노연주곡을 많이 들었다. 'Merry Christmas, Mr. Lawrence', '츠바사클로니클 OST', '냉정과 열정사이 OST',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을 특히 많이 들었다. 소설은 일본작가 '미우라 시온'의 소설을 많이 읽었다. 이 작가의 소설은 인물묘사가 뛰어나고 재미도 있어서 작품을 많이 찾아 읽었다. 그중에서 '배를 엮다'는 여러 번 읽었다. 사전을 편찬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집요하고 숭고한 소명의식을 느낄 수 있다. 미술작품은 故김환기 화백님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보고 크게 감명받았다. 처음에는 제목은 못보고 어마어마 크기의 캔버스에 점들이 쭉 찍혀있는 그림을 보고 '참 예쁘게 찍혀있다'라는 생각만 들었는데, 제목을 보고나서 하나하나 찍힌 점들이 마치 사람의 얼굴처럼 떠올랐다. 그리고 잃어버린 가족을 찾기 위해 방송됐던 이산가족 찾기가 오버랩되었다. 한 사람 한 사람 그리운 얼굴을 점으로 찍을 때 화백님의 감정이 내 안으로 밀려오는 경험을 했다. 공연은 오케스트라를 좋아했고, 서울에서 낙성대역에서 자취했기 때문에 예술의 전당에 시간이 맞는 공연이 있으면 자주 보러 갔다.


오늘 말하고자 하는 우는 연기를 위해 매우 귀한 감정을 수집하게 해 준 영화가 있다. 나는 이 영화를 나의 '눈물스위치'라고 생각한다. '첨밀밀'

장만옥 배우의 이 장면 연기는 볼 때마다 눈물이 주룩주룩

앞의 감정서랍 수집품들은 매우 훌륭했지만, 이상하게 우는 연기에는 별로 도움이 안 됐다. 연기 잘한다는 소리 들으려면 우는 연기를 잘해야 하는데, 내 연기는 '나 이제 운다. 잘 들어. 나 진짜 운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원래 눈물이라는 게 슬픔이 차오르다 차오르다 더 이상 차오르지 못하고 벅차오르는 순간에 터져 나와야 하는데, 내 것은 항상 울기 위해 우는 연기가 되었다. 슬픔을 일차원적으로 표출해 버리면 관객은 감동받지 못한다. 연기자가 슬픔을 참고 참고 끝까지 참는 연기에 관객들이 점점 몰입하다가 나중에 배우의 눈에서 눈물이 터져 나올 때 관객도 같이 운다. 그런 감정을 '첨밀밀'의 장만옥 배우가 느끼게 해 줬다. 홍콩에서 연인이 범죄에 연루되어 뉴욕에서 같이 도피 생활을 하던 중, 사고로 연인마저 죽고 혈혈단신 낯선 땅에 혼자가 된 여주인공이 비자까지 만료되며 출입국관리소로 인도되고 있는데,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죽은 연인때문에 헤어졌던 옛사랑의 실루엣을 발견하고 쫓아가는 장면이다. 금방이라고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지만 꾹꾹 참으며 사랑하는 사람의 실루엣을 간절하게 쫓아가는 장만옥 배우의 연기는 지금까지도 나의 '눈물 스위치'이다.

나의 '눈물 스위치'

그 장면을 보고 눈물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한 줄기 빛과 같은 실루엣을 찾고 그 빛이 나에게 비추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죽을힘을 다해 달리지만 엇갈려 버리고 망연자실하는 저 장면은 2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명장면이다. 이 영화는 다른 것과 다르게 감정을 쓸수록 더 슬퍼지는 눈물 화수분 같은 영화다.


우는 연기를 할 때는 극에 드러나지 않은 부분의 설정을 풍부하게 하면 할수록 연기하기 쉬워진다. 하지만 부작용을 조심해야 한다. 대원방송공채시험이었던 것 같다. 10대 소년이 오늘밤이 지나면 이 마을에서 떠나겠다고 얘기하는 내용이었다. 설정을 좀 풍부하게 잡았다.


'아버지 없이 엄마와 단둘이 살고 있다. 엄마는 이 마을의 무당이다. 동네 아이들은 무당의 아들이라고 항상 괴롭힌다. 마을 사또의 딸은 내 편에 서서 항상 동네 아이들을 물리쳐준다. 마을 사또는 호시탐탐 엄마를 보쌈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데, 엄마가 강하게 반항하자. 억울한 누명을 씌어 극형에 처한다. 나는 복수를 다짐하며 마을을 떠나려는데 사또의 딸이 나를 찾아와 아버지 대신 자신이 사죄한다며 용서를 빈다.'


대충 썼는데도 4줄이나 되는 설정을 했다. 거기에 복수를 다짐하는 비장함이 느껴지는 배경음악과 별이 가득한 밤하늘 아래 뒷동산에서 사또의 딸에게 작별을 고하는 슬픈 배경음악까지 선정해서 서울로 오는 버스 안에서 계속 듣고 장면을 상상하며 학원에 왔다. 공채시험문제가 나오고 첫 수업이라서 각자 설정한 연기를 선보이고 피드백을 받아서 다음시간까지 수정해 오면 되는 시간이었다. 풍부한 설정과 극의 분위기에 푹 빠져서 감정이 과해졌다. 눈물이 쉽게 터져버렸다. 대사 첫마디를 하자마자 오열하기 시작했다. 너무 심해서 대사를 제대로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전후사정없이 갑자기 울음을 터트린 바람에 내 연기가 끝나고 같은 반 친구들이 도대체 왜 울었냐고 물어올 정도였다. 연기로 들켜야 하는데 해설을 해줘야 하는 상황이었다. 망한 거다. 그래도 선생님은 연약하지만 복수를 다짐하면서 떠나는 비장미가 보여서 설정은 아주 좋으니 잘 연습해서 녹음하자고 하셨다. 하지만 녹음은 잘할 수 없었다. 이미 첫 시간에서 감정을 다 소모해 버려서 더 이상 나올 감정이 없었다. 그리고 성우연기를 할 때 우는 연기라도 대사 전달이 제대로 돼야 한다. 지난 심화반 호흡연습에서도 얘기했듯이, 영화, 드라마는 눈물, 콧물 빼면서 연기해야 잘했다는 소리를 듣지만, 성우연기는 대사전달이 안되면 아무리 감정연기가 훌륭해도 망한 연기가 된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완전히 망해버렸다. 우는 연기를 할 때는 감정과잉, 대사전달을 주의해야 한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