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던 글을 날리니 멘붕이던데...

멘붕에서 더 깊이 생각하다. 전화위복

by 철없는박영감

바로 어제다. 원래는 집에서 컴퓨터로 글을 쓰는데 유난히 층간소음이 심했다. 다 같이 모여사는 아파트에 층간소음은 필연이고, 소위 '발망치'라고 일컫는 쿵쿵 소리나 새벽이나 늦은 밤 트레드밀로 추정되는 컨베이어 벨트 소리 더하기 천장을 전체를 울리는 쿵쿵 소리가 있었지만, 언젠가부터 내가 조금 예민한 성격인가 싶어서 생각을 바꾸고 나니 참을 만 해졌다. 아니 이제는 그 소리가 안 나면 '윗집이 다이어트를 이제 포기했나?' '오늘이 작심삼일째인가?'라고 생각할 정도로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렇게 변하니 층간소음이 더 이상 괴롭거나 힘들지 않았다. 그리고 앱으로 소음도를 측정해 보니 38 데시벨인가? 소음 기준에는 못 미치는 수준이라서 나 혼자 밑에서 미치고 폴짝 뛰어봤자 나만 손해라는 것을 나중에 깨달았다. 그래도 가끔 참기 힘들 때는 산책을 다녀오거나 장을 보러 밖에 1시간 정도 나갔다 오면 다시 조용해져 있었다. 그러면 낮시간 동안은 세상 조용한 집이 돼서 아주 만족스러운 우리 집이었다. 그런데 어제는 윗집인지 아닌지 정확하지 않지만, 아무래도 어딘가에서 인테리어 공사를 하는 것 같다. 마침 글을 쓰려고 마음먹고 있던 차에 망치소리와 쇠구슬 굴러가는 소리가 계속 났다. '음... 이건 조금 심한데...' 그래서 그동안 절약한다고 안 갔었는데, 오랜만에 카페에서 글을 써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패드를 챙겨서 자주 가던 분위기 좋고 커피맛 좋은 하지만 다소 비싼 카페로 나섰다. 커피와 조각케이크 한 조각이면 만원을 넘는다. 내가 물가를 모르는 건가?


어제는 날도 추워서 드라이클리닝 맡기려고 빼놨던 패딩을 다시 찾아 입고 집을 나섰다. 카페가 5분 거리라서 가방도 없이 아이패드만 들고 나왔는데 손이 너무 시렸다. 카페 근처에 도착할 즈음 평소에 내가 좋아하던 창가자리가 비었나 슬쩍 염탐하니 오예~! 딱 좋다. 아무도 없다. 그런데 주인도 없다. 오랜만에 와서 화요일 휴무를 깜빡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따뜻한 카페라테에 달콤한 케이크 먹을 생각으로 잔뜩 기대하고 왔는데, 오랜만에 당충전이라면서 신났었는데 망했다. 아니 돈 굳어서 좋은 건가? 그래서 어제 저녁에 평소대로 샐러드와 단백질 파우더를 우유에 타서 먹고 자려고 누웠다가 라면에 닭볶음탕 추가로 더 먹고 잤다는 핑계를 대면 안 되겠지? 갑자기 허기가 몰려와서 어제는 오랜만에 입 터진 날이었다. 그래서 지금 몸이 조금 무겁다. 어쨌든 카페가 정기휴일이라서 하는 수 없이 근처에 도서관으로 향했다. 1층에 노트북을 쓸 수 있는 장소가 있어서, 아이패드를 펼치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미 걸어오면서 첫 줄을 생각하고 왔기때문에 쉽게 시작했다. 작가님들은 아실 거다. 첫 문장이 찾아오면 그 뒤는 알아서 손가락이 움직인다는 것을... 물론 초고는 엉망이라서 퇴고는 확실히 해야 하지만... 도서관 1층에서 혼자, 그날따라 또 아무도 없었다, 자판을 피아노 치듯이 아주 신나게 미친 듯이 써 내려가고 있었다. 중간쯤 다시 현실세계로 슬쩍 정신이 돌아왔다. '뭐라고 써놨지?' 중간 점검이 필요했다. '음...' 읽어보니 맥은 짚었는데 문장 순서가 앞뒤가 조금 매끄럽지 않았다. 뒤에 있는 문장을 앞쪽으로 바꿔야 읽는 분들이 쉽게 이해할 것 같았다. 컴퓨터로 하면 쉬프트키로 지정해서 Ctrl X, Ctrl V 하면 끝날 일이라서 간단하게 생각하고, 아이패드를 조작했다.

멘붕의 순간

나름 애플펜슬도 구비하고 있어서 정교한 수정이 가능하다는 자부심을 갖고 만지다가 '전체선택'으로 문단을 지정해 놓고 다시 눌러서 '오려두기'를 눌러야 하는데, 애플펜슬이 살짝 미끄러지면서 문단 전체가 하이픈 하나로 대체됐다. 컴퓨터면 얼른 Ctrl Z 하면 되는데... 아이패드는 이런 경우가 처음이다. 으악 완전 멘붕! 그대로 손이 나도 모르게 머리로 올라갔다. 어쩌지? 10초 정도 멍하게 있다가 오늘은 글 쓰지 말라는 건가 하고 허망하게 짐을 챙겼다. 지금은 검색해서 실행취소방법을 알아냈는데, 어제 저 때는 멘붕이 오니까 그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다시 쓸 생각으로 '지워진 내용이 뭐였지?' 이 생각밖에 안 났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뭐였지?'를 생각하다가 갑자기 '글을 이런 내용으로 쓰지 말라는 하늘의 계시인가?'라는 쪽으로 생각이 튀었다. 그리고 지워진 내용이 다시 떠올랐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또 'MBTI가 어쩌고... 나는 INFJ라서 상대방 표정만 봐도 무슨 말할지 다 아네 어쩌고...'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어이없는 내용이다. '생각 좀 더하고 쓰자'라고 결론을 내리고 다시 썼다. 혼자만의 만족일 수 있지만 지워진 글보다 훨~씬 나았다. '그래! 요즘 철학 공부도 하고 얕게 생각 안 하려고 노력하면서 왜 그런 글을 썼냐!'라고 아마도 높은 곳에 계시는 어느 분이 그렇게 만들어 주신 것이 아닌가...라는 전화위복의 교훈을 담은 어제의 일기이다.

keyword